익명의 여섯 소녀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 쓰는 성해나입니다. 이렇게 편지를 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오래전,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 있어요.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다는데 나는 왜 끊임없이 누군가를 오해할까, 손해보지 않을 선에서만 누군가를 사랑하려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동안은 제가 최대치의 사랑을 주면 타인은 그 근사치의 사랑이라도 주길 바랐던 것 같아요. 이제는 그런 욕심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어요. 넓고 깊은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사랑하고, 누군가를 넉넉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요."

성해나, 『두고 온 여름』, 창비, 2023, 167쪽.

사랑의 최대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여러분의 물음과도 닿아 있는 답인 것 같아요. 사랑의 표현은 단지 작품 안에서만 가능한 게 아니라 일상에서도 꾸준히 이뤄져야 하기에 여러분의 질문이 더 포괄적으로 다가왔어요.

이 인터뷰를 한 지 삼 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합니다. 최대치의 사랑을 심상히 내어주는 넉넉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타인에게 근사치의 사랑만 바라는 엉성한 어른이 된 것 같아 속상할 때도 많습니다. 이해해보려 애쓰다가도 결국 쉬운 오해를 택하기도, 사랑에 점점 무감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가끔은 사랑이 온 감각을 둔화시키는 마취목(馬醉木)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마취목은 이맘때가 되면 희고 고운 꽃을 피웁니다. 지나가던 말도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꽃의 향과 맛을 볼 정도라고 해요. 그러나 마취목에는 독이 있어 깊이 빠지면 말까지 쓰러뜨리죠. '마취목'이라는 나무 이름의 어원처럼요. 사랑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의심 없이 다가가 마음을 내줄수록 건강한 것과 해로운 것을 가르는 감각은 흐려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상하게 하는 것마저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나오는 횟수가 늘수록 그런 고민은 더욱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나무에 옹이가 생기듯 사랑이 무언지 아프게 겪고, 알면 알수록 모르겠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더욱 몸을 사리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살아갈수록 최대치의 사랑을 내주기 힘든 건 그 때문 아닐까요.

부끄럽지만 저도 더러 그렇습니다. 사람은 그저 바라보기 좋은 관상화가 아닌데도 그렇게 믿어버리고 흠뻑 빠지다 상대가 내 상상과 다르거나 나를 아프게 할 때, 이 사람은 독초구나, 오해하며 멀어집니다. 이제껏 사랑했던 나날을 후회하고, 헛물켰구나, 애석해하며 마음의 빗장을 걸어버리기도 하고요.

사랑이 헛된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깝고, 고까울 때마다 저는 이 시를 떠올립니다.

시집의 시들을 전부 아끼지만, 이 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좋아져요. 국수의 면발처럼, 한 호흡으로 길게 이어지는 시구처럼, 끊김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게 사랑 아닐까 해서요.

한 인터뷰에서 시인이 남긴 말이 기억납니다.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 저는 엄마에게 이 놀라운 태도를 배웠어요. 그런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채널예스 고명재 작가 인터뷰, 2022.12.09.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며 소낙비처럼 맑게 웃는 엄마의 얼굴, 재거나 따지지 않고 사랑만 내주는 시인의 청아한 마음을 떠올리면 사나웠던 감정은 누그러지고, 제 기억 속 어떤 풍경들이 차차로 떠오릅니다.

새순이 막 돋던 초여름 한 날, 부모님과 본가 뒤편의 산을 올랐습니다. 평지로 이뤄진 야트막한 산이라 오르는 데 큰 힘이 들지 않지만, 아버지가 자꾸 뒤처졌어요. 아버지는 작년 말에 고관절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천천히 회복중이십니다. 한때는 운동 부족인 제가 부모님 뒤를 힘겹게 쫓으며 산을 올랐는데, 시간이 흐른 지금은 부모님이 제 뒤를 밟고 있었어요. 그 뒤바뀜이 아프기도, 마음 한구석을 저릿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그 산에서 발목을 접질린 적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아버지와 함께 등산하던 중에요. 등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고, 풀리지 않는 문제와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한껏 뾰족해 있던 시절이었어요. 잘 쓰고 있느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신경쓰지 말라며 공연히 화를 내기도 하고, 안부 전화가 오면 일부러 받지 않을 때도 숱했던 것 같습니다. 산행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묵직했고, 그렇게 한데 정신을 팔다 튀어나온 돌부리에 발이 걸렸죠.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등에 업혀 하산했어요. 한 사람은 어정쩡하게 업히고, 한 사람은 말없이 업은 채로 어색하게 한참 내려가다 잠시 숨을 고르던 중에, 아버지가 겨우살이를 보며 넌지시 말했습니다.

식물도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시기가 다 다른 것처럼 사람도 그래. 오래 기다린 끝에야 뿌리를 내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다 괜찮아.

여름 산을 오르는 중에 저는 자주 멈춰 서 제 뒤에서 나란히 걷는 부모님을 기다렸습니다. 한없이 서툴고 치기 어렸던 나를 그들이 묵묵히 견뎌줬던 것처럼요.

산 중턱에서 등산로에 난 벤치에 셋이 조르르 앉아 물을 마셨습니다. 우거진 녹음과 나무 밑동에 돋은 맹아, 그리고 시시한 대화를 나누며 웃는 부모를 보며 생각했어요.

사랑과 세월은 거친 옹이만 남기는 게 아니라 끊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이어지는 고운 결의 나이테까지 함께 남겨주는 게 아닐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습니다.

"절에 발원하러 왔어. 할머니 초랑 엄마 초랑 해나 초. 코끝이 찡했다."

친구는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제 이름과 생년을 정갈하게 적은 소원지와 초를 올리며 평안해지라 기도했다고 합니다. 친구가 보내준 초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이 역시 제 기억 한편에 귀한 사랑의 풍경으로 자리잡겠죠.

삼 년이 지나 앞선 인터뷰에 다시 답을 단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때는 바라는 욕심 없이 퍼주고, 기다리고, 끝까지 곁에 남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사랑은 그리 거창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시답잖을 수 있지만, 서운한 순간에도 섣불리 상대를 미워하지 않고, 판단 앞에서 조금은 조심스러워지고, 받은 마음을 가벼이 흘려보내지 않고 나의 삶 안에 오래 두는 게 사랑인 것 같아요.

이제는 사랑이 늘 선명한 결말만 가져야 한다고 여기지 않아요. 어떤 마음은 다 전해지지 못한 채로도 한 사람 안에 깊숙이 남아 그를 조금씩 바꾸어놓으니까요.'

큰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기에 그 사랑을 최대치로 돌려주고 싶다는 여러분의 마음이 저에겐 참 다행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슬픈 사랑이더라도 헛되지 않고, 최대로 돌려주지 못하더라도 그 사랑을 받은 누군가는 그 마음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자기 생의 굵고 짙은 결로 소중히 새겨놓을 거예요.

그러니 헛물켜더라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살아가요, 우리. 오래오래요.

성해나 드림

"서툴러도 뭐 어때?" NMIXX의 <Heavy Serenade>!
🎵 NMIXX(엔믹스) <Heavy Serenade> M/V

문학동네시인선 184 고명재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Q. 이 시집에서 특별히 아끼는 시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이유도요.

콩국수를 먹는 내용의 시,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를 좋아해요. 왜냐하면 저는 엄마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엄마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며, 가장 귀한 연인이며, 저의 세부, 그리고 삶의 궁극이에요. 엄마는 몸이 아프기도 했었고 매우 혹독한 시간을 지나 살아냈어요.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 저는 엄마에게 이 놀라운 태도를 배웠어요. 그런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삶으로 시로 얼굴로 손길로 물질로 마음으로, 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 안 그래도 요즘 복잡한 생각들로 너저분한 머릿속과 방 곳곳 널려 있는 물건들을 보며 한숨만 푹푹 내쉬는 나날들이었는데, 오늘 <우시사>를 읽으며 다짐하게 되네요. 하나하나 쌓인 물건들을 머릿속 짐들과 함께 정리해야겠습니다. 다음 <우시사>를 읽기 전까지 반드시!
  • 돌덩이같이 무거운 두 발로 이 지구를 꾸역꾸역 밀고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저도 있어요. 결국 '나'라는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나로부터 눈을 돌려 세상을, 타인을 바라보아야 하는 듯합니다. 어느새 사뿐히 걸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 반, 그러나 짐처럼 느껴져서 울적한 마음 반입니다. 내가 짐짝처럼 느껴지지 않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스스로를 다독여보려고요.
오늘 <우리는 시를 사랑해>는 어떠셨나요?
여러분의 소중한 피드백은 우시사를 무럭무럭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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