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께 보내는 예순여섯 번째 흄세레터

안녕하세요. '랑'입니다. 마지막 레터를 올해 2월에 보냈더라고요. 겨울은 무사히 통과하셨나요? 봄의 한가운데는 충분히 만끽하고 계신가요? 저는 하루아침에 여름이 될까봐 계절감을 느낄 수 있는 것들에 골몰하고 있어요. 시간이 좀 더 걸리지만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하면서(출근은 불가능😂) 도로 옆으로 솟아 있는 이팝나무와 라일락에서 눈을 떼지 않고, 회사 근처 산책 코스에도 열심히 발자국을 찍고 있습니다. 이제는 봄에 가장 맛있다는 참외도 열심히 깎아 먹고 있고요. 님도 어디에 계시든 풍성한 계절감을 느끼시기를 바랄게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7. '날씨와 생활' 레터는 5월 10일부터 6월 14일까지 매주 금요일 한 편씩 발행됩니다💌 이번 시즌은 초역만 네 편이고 그중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작가는 세 명이나 있는데요. 첫 레터에는 매거진 여는 글을, 두 번째부터는 정용준, 백수린, 박참새, 이미상, 나푸름 작가가 시즌 7을 먼저 읽고 쓴 리뷰와 에세이를 한 편씩 보내드릴게요❤️ 

가뭄을 소나기로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 책에서는 날씨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인 청구인》의 ‘서문’ 격의 글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장황한 날씨 묘사가 독서의 흐름을 방해 한다면서요. 그러나 실제로는 날씨와 관련한 몇 장면을 등장시켜 자명하게 실패하는 것으로, 소설과 날씨가 멀어질 수 없는 관계임을 도리어 뚜렷하게 보여주죠. 여러분의 삶에서는 어떤가요? 날씨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고, 인생이 뒤바뀐 결정적인 순간이나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을 그때의 날씨로 기억하지는 않나요?

누구나 아는 소설이지만, 그래서 주인공이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이방인》의 뫼르소도 그렇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처하고도 스스로를 변호하지 못한 채 살인을 하던 순간에 ‘요동치던 햇빛’만 떠올릴 뿐이죠. 《이방인》은 장면마다 뜨겁게 내리쬐는 지중해의 태양을 의식해서 읽었을 때 그 강렬한 감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루시 게이하트》는 겨울 한낮의 햇살 아래서 루시를 추억하는 마지막 몇 문장이 압권입니다. 작가가 이 몇 문장을 적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닐까 느껴질 정도로요.

결혼식 날에 폭풍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얼렁뚱땅 딸의 결혼을 해치우려는 《결혼식을 위한 쾌적한 날씨》의 대첨 부인은 “결혼식 날에 날씨가 참 아름답구나!”라는 말을 주문처럼 반복합니다. 돌연히 나타난 옛 애인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딸의 마음도 모른 채요. 《메마른삶》에서는 가물고 황량한 땅을 살아가는 한 가족의 미래에 작은 불행의 불씨라도 댕기게 될까봐 책장을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집니다. 우리가 가뭄을 소나기로 바꿀 수는 없겠지만, 척박한 운명을 개척해가는 이들의 분투에 가만히 마음을 보태게 됩니다. ‘장애를 가진 가난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용감하게 맞서고도 자욱한 안개 너머로 소중한 이들을 잃고 마는 《값비싼 독》의 프루에게도요.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즌 7의 테마는 ‘날씨와 생활’입니다. 눈부신 햇빛과 걷잡을 수 없는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담대하게 걸어 들어간 사람들의 곁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031 이방인 알베르 카뮈|박해현 옮김
032 루시 게이하트 윌라 캐더|임슬애 옮김 *초역
033 메마른 삶 그라실리아누 하무스|임소라 옮김 *초역, 작가도 첫 소개
034 결혼식을 위한 쾌적한 날씨 줄리아 스트레이치|공보경 옮김 *초역, 작가도 첫 소개
035 값비싼 독 메리 웨브|정소영 옮김 *초역, 작가도 첫 소개
'흄'과 '랑'의 편집 후기

'흄' ‘세상은 넓고 날씨는 맑다?’ 날씨를 테마로 하는 시즌을 준비하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읽어도 읽어도(만들어도 만들어도) 세계 구석구석에서 듣도 보도 못한 소설이 계속 튀어나오고,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 귀한 소설들에서 낯선 감각이나 감동마저 느끼게 되면 마음속이 깨끗하게 닦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한발 더 흄세의 노예가 되어가는 거겠지만…….

'랑' 체감온도 영하 20도에 이사를 했다. 발끝과 손끝이 얼어붙었다. ‘루시’(《루시 게이하트》)가 혼자 서 있었을 빙판을 생각했다. 작년 여름 모래사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황량하다고 생각했다. 웃지 말고 ‘파비아누 가족’(《메마른 삶》)을 생각했어야지. 그때는 파비아누 가족을 몰랐고, 그래서 이런 생각은 이상하지만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호수 낚시를 하는 친구가 안개 자욱한 사진을 보내왔다. 꿈에서 친구는 강으로 걸어 들어갔고 나는 그를 건지기 위해 낚싯대를 던졌다. “지옥에서 자라는 그것까지 원하는 건 아니지?”(《값비싼 독》) 다음 날. 나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적어보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바웃 타임〉의 결혼식은 상쾌하고 쾌적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내가 지켜본 결혼식(《결혼식을 위한 쾌적한 날씨》)에도 ‘상쾌하고 쾌적’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건……. 충동을 억제하는 선글라스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햇빛을 막는 건 충동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여섯 바퀴를 구른 자동차 안에서 기어 나왔던 여름이 있었다. 내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건 그날의 “태양”(《이방인》)이다.
흄세(휴머니스트 세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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