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사 레터 59회 (2022.06.22)
▲ 김하경 님이 직접 찍은 사진

안녕하세요! <우리는 시를 사랑해>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게 된 독자, 김하경입니다.

글을 쓰려 책상 앞에 앉은 지금은 밤 열시 십이분입니다. 불과 한 달하고 보름쯤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엔 불 꺼진 도서관을 총총 빠져나와 버스를 기다리곤 했어요. 저는 밤의 도서관을 지키는 사람이었거든요.

앉아 있는 사람들 옆을 지날 때면 종이에 사각사각 샤프펜슬 스치는 소리나 팔락팔락 책장 넘기는 소리, 이어폰을 단단히 꽂고 몸을 뒤척이는 움직임 같은 것이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밤의 도서관에는 늘 이렇듯 고즈넉하게 고이는 ‘몰두의 시간’이 찾아오지요. 도서관을 지키면서 문득 쓸쓸함에 젖을 때면 생각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갖는 ‘몰두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있는 거라고요. 좀더 살가운 비유를 해보자면, 그들의 일상을 든든하게 지키는 등대지기 같은 존재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가고 싶다고 말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멀찍이 던진 시선에는 유일하게 불이 꺼지지 않은 도서관 로고가 보이는데요. 유난스레 반짝이지도 않고 하루 끝 은은하게 남아 있는 그 불빛이 내일을 버티게 합니다. 누군가에게 그 불빛으로 남을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다짐처럼 하지요.

시와 친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저에게 시는 뜬구름 잡는 말 같고 도통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문장들이에요. 그럼에도 어느 문장들은 내도록 마음에 남아 저를 두드리거나 어루만집니다. 귀갓길에 보이던 그 은은한 불빛을 닮은 몇 편의 시들 중 두 편을 여러분께 속닥거려볼까 해요.

💜김하경 사서가 사랑하는 첫번째 시💜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기억 속에 아슴푸레하게 남은 이들이 있습니다. 분명 어디선가 무엇을 함께 했거나 ‘함께 있었던’ 것만으로 충만했던 순간을 공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연락도 닿지 않고,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다는 상투적인 말을 곱씹으면서, 곁에 없는 이를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불러봅니다. 당신, 하고요.

“부질없는 것”이란 자조가 아니면 결코 견딜 수 없을 안타까움입니다. 그런 것 있잖습니까. 놓쳐버린 행운 혹은 기회를 떠나보내며, 그거 다 별것도 아닌데, 하고 미련의 대상을 어떻게든 격하시켜 매몰차게 잊어보려는 마음 말이에요. “종내 글썽이는 마음”이 저에게는 ‘차마 스쳐 보내지 못한 마음’으로 읽힙니다. 언젠가 그 어느 날, 당신이 있었던 그때 그 순간에 줄곧 머무르면서. 그것을 “슬픔”과 “먼 곳”과 “허무”라 단정짓지 못하는 저 자신과 마주합니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 물음은 당신에게 보내고 싶은 말이기도 하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눈이 흩날리다 끝내 녹는다는 걸 필연적으로 예감하면서도, 첫눈이란 낱말을 그날들에 비견합니다. 그래도 그때 정말, 좋았으므로 두 손에 힘을 주어 그 기억을 꾹꾹 뭉쳐놓고 싶었던가봅니다. 그렇다면 우리,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이자 “풀풀 날리는 공중”에서만은 서로를 하염없이 첫눈처럼 기억하면 안 될까요. 비록 그것이 사라질 것에 부치는 휘발성 낭만이라 할지라도.

  💛막간 우.시.사. 소식💛
문학동네시인선 172 조말선 시집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가 출간됐습니다. 시인이 10년 만에 묶는 네번째 시집인데요, ‘반전-패러독스-블랙유머'로 가득한 이상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펼친 시인의 인터뷰를 준비했습니다. 전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주세요!

"낯선데 재미있다, 굴곡진 언어가 있는데 속도가 지루하지 않다, ‘너’라는 사람이 어쩐지 ‘나’ 같은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해버린다면 시집 한 권을 다 읽지 않아도 다 읽은 것입니다."

💜김하경 사서가 사랑하는 두번째 시💜


바람의 지문 (이은규, 다정한 호칭)

 

먼저 와 서성이던 바람이 책장을 넘긴다

그사이

늦게 도착한 바람이 때를 놓치고, 책은 덮인다

 

다시 읽혀지는 순간까지

덮인 책장의 일이란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는 것

혹은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

 

언젠가 당신에게 빌려줬던 책을 들춰보다

보이지 않는 지문 위에

가만히, 뺨을 대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당신의 지문은

바람이 수놓은 투명의 꽃무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어떤 지문은 기억의 나이테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어느 날 책장을 넘기던 당신의 손길과

허공에 이는 바람의 습기가 만나 새겨졌을 지문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

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

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

지문에 새겨진 그 바람의 뜻을 읽어낼 수 있을 때

그때가 멀리 있을까,

멀리 와 있을까 

당신이 선물해준 이 시의 ‘바람’을

나는 자꾸

바람(wind)이 아니라

바람(hope)으로

읽으려 든다

―필사 노트에서

 

이상한 일이었다. 특별한 대화도 없이 그저 웃기만 했는데 가게를 나올 무렵 우리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가게를 나와서 안 일이지만,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즉 입간판의 또다른 면엔 역시나 아크릴로 크게 <호프>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적힌 작은 영문의 <HOPE>를 우리는 볼 수 있었다. 난데없는 희망이 그토록 우리의 가까이에 있던 시절이었다.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95쪽

 

다정한 노란빛 시집에 담긴 이 시를 선물받았던 날, 한 자 한 자 베껴 쓰며 선물해준 이의 마음을 궁금해한 적이 있어요. 저는 시를 읽을 때 종종, 구절마다 목소리를 얹어보곤 합니다. 손끝으로, 또 목소리로 거듭 베껴 쓰는 동안 이상하게도 바람이 그 바람으로 읽히질 않는 겁니다. 한 번의 음독을 끝낸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롭게 읽어보았습니다. 바람(wind)이 아닌 바람(hope)으로요. 물론 “그 사이사이에 숨어든 바람의 뜻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는 구절처럼, 그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는 없을 겁니다. 멋대로 시 속의 낱말을 동음이의어로 치환하여 오독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이 시가 적힌 종잇장에도 당신의 지문이 묻어 있으리라 생각하면, 화자가 그랬듯 활자의 언저리를 매만지고 싶어집니다. 어떤 기분과 감정과 마음을 시 한 켠에 묻혀 보내셨는지. 둔감하고 느린 저는, 책이 덮이고 나서야 때를 놓치고 뒤늦게 도착한 바람처럼 아득해집니다. 그러나 타인과 마음을 주고받는 건 으레 빗겨나가는 일의 연속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덮인 책장을 들추어 “바람의 지문 사이로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를 맡”고 “다음 장의 문장들을 희미하게 읽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어디에 찍혔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지문이 찍혀 있을 자리에 제 지문이 살포시 포개어지기를 바라면서요.

📢 다음주 <우리는 시를 사랑해> 시믈리에
다음주 아름다운 시 두 편을 추천해줄 시믈리에는 이진송 작가입니다.

최근 에세이 『차녀 힙합』에서 "소외된 차녀들 왼발을 한 보 앞으로"를 외치며 둘째 딸의 입장에서 가족 역학 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살핀 이진송 작가. 이진송 작가가 고른 시 두 편은 무엇일까요? 다음주 수요일에 만나요!
💛우.시.사의 시믈리에가 되어주실 분 🙋‍♀️💛

우시사 독자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시가 있다면 아래 링크의 양식을 작성해 제출해주세요.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어 우시사 독자분들께 대신 소개해드릴게요.
지난호 우.시.사.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소중한 의견💌

💬오늘 제게 필요한 문장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어떤 문장이 유독 마음에 쏙 들어올 때가 있는데, 바로 그런 날이셨군요!

💬항상 레터 읽을 때마다 좋은 시가 많다고 느끼며 중고등학교 문학수업 때 배웠던 시의 의미랑 지금 제가 레터로 읽으면 그 의미가 다르기도 하고 수요일마다 행복을 채워갑니다.
😂그땐 지문 속 화자의 마음을 읽어내려고 애쓰며 빠르게 답안을 고르기 바빴는데, 지나고 나니 조금 더 여유있게 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의 레터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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