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믿음의 사람인가? “저자의 눈을 빌려 욥기를 읽는 동안
우리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선다.“
―김기석, 김회권 목사 추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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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욥은 믿음의 사람인가? - 3월 24일(목)
#2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무능 - 3월 28일(월)
#3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것 - 3월 31일(목) #4 하나님의 신비와 새로운 믿음 - 4월 4일(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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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말하다>의 첫 번째 독자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 연재에서는 까닭 모를 고난을 당하는 의인 욥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믿음에 대해 물음을 던져 봅니다. 마지막에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욥의 모습에서뿐 아니라, 부당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격렬히 저항하는 욥의 모습에서도 우리는 믿음의 의미를 찾게 될 것입니다. 욥기는 한 의인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든 고난을 겪으며 살아갈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욥에게 공감하고 그가 했던 물음과 말들을 우리 것으로 삼으며, 우리는 욥기가 제시하는 고난과 믿음의 의미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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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정의에 대한 물음을 몰고 온다.
고난이 일으키는 정의의 문제는
우주의 기초를 뒤흔든다.
하나님에 대한 물음과 도전으로 몰고 간다.
혹시 거기서 찬양이 잉태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참 후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찬양은 저 끝에서 다가온다.
정직한 물음의 지평 저 끝에서
찬양의 소리가 조금씩 큰 소리로 다가온다.
정의의 물음 끝에 오는 신비와 찬양은 위대하다.
그러나
정의를 모르는 신비와 찬양을 말하지 말자.”
—서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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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믿음의 사람인가?
욥은 끝까지 믿음의 사람이었나? 만일 믿음이라는 것이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주어진 신에 관한 담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라면, 욥은 결코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 욥은 친구들의 담론, 곧 전통적 신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서 고백되는 신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그는 인간의 고통 한가운데서 새로운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자신의 고통을 설명해 줄 분을 찾고 있었다.
친구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그분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그분이 하시는 일은 옳다. 따라서 욥의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분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 그러므로 욥이 할 일은 자신의 잘못을 돌이키고 고난을 수용하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믿음인가. 친구들의 논리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러나 욥은 그런 믿음을 거부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넘어가기에는 하나님은 더 크신 분이다. 전통 신학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은 심판자에 불과하다. 자신의 의를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자에 불과하다. 사람이 죄짓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무서운 벌을 내리는 자에 지나지 않는다. 죄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에 의해 꼼짝없이 불행을 당해야만 하지 않는가. 무슨 일을 당하든 그것은 자기 죄의 결과로 하나님이 내리신 것이 되고 말지 않는가. 욥이 볼 때에 하나님은 적어도 그렇게 설명되는 분은 아닌 것 같았다. 하나님을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욥은 믿을 수 없었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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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전통 신앙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근본적인 큰 질문을 던진 사람이다.
……
하나님의 계시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욥은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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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따졌다. 하나님에 대한 저항이었다. 하나님을 의심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하나님이 욥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38:2) 이 구절로 미루어 볼 때 욥은 무슨 일을 저질렀다. 단순히 믿음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는 뭔가를 떠들어 댔고 하나님을 의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전통 신앙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 근본적인 큰 질문을 던진 사람이다. 3장에서 37장에 걸친 욥과 친구들의 논쟁이 끝난 후, 38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38:1). 폭풍우 속에서 들린 하나님의 말씀은 욥의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물음에 대한 응답이다. 욥은 물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40:2). 이 구절로 미루어 볼 때 욥은 하나님을 비난했다. 친구들과 대결하며 쏟아 냈던 욥의 탄원과 부르짖음과 절규는 범상치 않은 말이었다. 그저 하나님을 잘 믿는 그런 신뢰에 찬 소리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대결하는 소리였다. 그런 점에서 욥기는 단순히 믿음의 책이라고 할 수 없다. 새로운 믿음의 책, 하나님을 새로이 발견한 책이라고 할 수는 있다. 하나님을 새로이 발견한 것은 어떤 면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기에 욥의 신앙은 무신론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저항 없이 어떻게 살아 있는 믿음을 찾을 것인가. 삶은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삶을 살리시는 하나님도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존 교리로 설명된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저항하는 일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늘 새로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람을 돌보시는 하나님이기에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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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 만큼 삶을 살리시는 하나님도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존 교리로 설명된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저항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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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늘 새로운 신학을 정립하는 문제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언어로 새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욥기의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다. 42장에는 하나님이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시는 대목이 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분노한 것은,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2:7).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말로 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말로 다 될 수 없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새롭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욥이 볼 때 죄와 벌의 짧은 인과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에 가두는 것이다. 그때에는 그런 신학에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을 찾는 길이다. 친구들과 달리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서술하는 신학 없이 다만 친구들의 신학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렇게 저항하는 말이 하나님을 찾는 길이다. 고난에 처한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신학에 대한 저항의 언어만으로도 이미 새로운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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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묻다
욥이 그냥 먹고 즐기는 데서 인생의 의미를 찾았던 사람이라면 지금 상황을 그렇게 허무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이었으며 재물도 넉넉하여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물질의 번영을 그의 경건함에 대한 하나님의 보답으로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 인생의 목적이었다. 그때 그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하며 꽉 찬 느낌을 얻었던가. 물질로도 충만하고 내면으로도 충만했다. 존재의 결핍이 사라지고 정말 꽉 차게 존재하고, 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을 느꼈다. 말하자면 구원의 체험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두 잊어버렸다. 헝클어졌다. 지금껏 살아온 삶에 대한 보답 없이 패망과 육신의 병만 남은 지금, 무엇이 선한 일인지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지 모든 것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허망함이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기?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의 친구들은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하지만, 사람이 선한 일에 대한 보답이 없다면 어떻게 선하게 살 수 있단 말인가. 보답을 저생에서 하나님이 해주신다고 믿는다 해도, 이생에서 인과응보를 어느 정도 확인하지 않으면 누가 힘들게 의를 실천하며 살려 하겠는가. 그렇다면 의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없는 것인가? 지금까지 나는 보상을 바라며 하나님을 섬겨 왔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이용한 것 이상이 아니지 않은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 하나님이 누군지 다시 정리할 힘도 없다. 고난 속에서 성숙해지리라는 것은 남들이 쉽게 하는 말일 뿐, 세월은 지루하고 짐이 될 뿐이다. 삶이 지루하고 귀찮을 뿐이다. 누구도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도 귀찮다. 의지할 존재이기보다는 오히려 두려운 존재요, 모호하기 때문에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말한다. 그가 하나님께 말한 것은, 어찌 되었든 살기가 싫다는 것이요, 혼자 있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요, 왜 용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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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7:15-1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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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람에게 마음을 두고 계신다. 그것은 사람이 뭔가 대단하다는 말이다(7:17). 사람이 뭐가 대단해서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람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처럼 사람을 비중 있게 생각하시기로 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희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희망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부담일 수도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는가. 내가 무언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야 하지 않는가.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지는 일이 자랑스럽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누가 그에게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담이다. 만사가 귀찮은 사람에게 희망의 눈총이란 오히려 감시의 눈총이 된다. 욥은 하나님이 매 순간 자신을 감시하고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죄를 지을 때마다 앙갚음하는 하나님을 느낀다.
욥이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자기가 정말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욥은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안다. 친구들 앞에서는 의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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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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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살았지만 왜 잘못이 없겠는가. 사람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그 잘못을 모르실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난을 당할 만큼 용서받지 못할 짓을 내가 했단 말인가? 누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큰 해를 입었다면 그를 용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 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영향을 주고 무슨 손해를 입힌단 말인가. 자질구레한 내 죄악을 덮어 주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사람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완전히 사람을 감시하고 벌을 주는 하나님 아닌가. 저 높은 데 있으면서 아랫것들이 노는 것을 보고 그저 무심하게 그들의 잘잘못을 가려 무정하게 재판하는 신이 아닌가.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줄은 알지만, 그렇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바탕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신학이 깔려 있다. 전능하신 분이라면 영향을 주기만 해야지 영향을 받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학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을까? 수난받는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제는 단순치 않다. 하나님께도 용서는 좀 더 힘들고 좀 더 우주적인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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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는 믿음?
불행이 닥쳐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 아무런 조건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사탄이 의인 욥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한 강력한 시험대였다. 사탄은 의인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유혹한다. 그 유혹의 지렛대가 불행이다. 사람은 거듭되는 불행 속에서도 경건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 대가 없는 믿음이란 가능한가? 잘되고 복 받기 위해 믿는 것 아닌가? 대가 없는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욥기 서론은 사탄의 입을 통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 문제는 욥기 전체를 관통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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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주님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 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님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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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이기 때문에 의인일 수 있다. 사탄의 파괴 공작은 거기서 시작된다. 부를 떼어 놓아도 욥이 계속 믿음을 지키고 의인으로 남아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것은 까닭 없는 신앙, 또는 대가 없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욥은 흠잡을 데 없는 의인이었다. 욥기는 의인 욥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1:1). 첫마디에 욥을 소개하면서 의인이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욥의 정체성은 의인이라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의인의 대표자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욥기에서 벌어지는 욥의 고난은 그 자신의 고난일 뿐 아니라 모든 의인의 고난이다.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된다.
한편 우리는 욥을 그처럼 의인으로 설정한 구도에서 단지 의인의 고난이라는 문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의인이 아니더라도 까닭 없이 갑자기 밀어닥친 고난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이 당하는 불행 중에도 납득할 수 없는 불행,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막힌 불행을 그리기 위해 욥을 흠 없는 사람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욥기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우리의 이야기다. 욥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의 고난의 의미를 찾는 책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모든 인생이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안고 사는데, 그러한 뭇 인생의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 책이기도 하다. 사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이 닥칠 때가 많지 않은가. 죄의 대가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우리 삶을 따라다니지 않는가!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욥기는 추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욥기는 의인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욥은 완벽한 의인으로 그려진다. “흠이 없고 정직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의인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욥은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의인이었다. 1장 1절의 욥에 대한 묘사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8절에서 되풀이된다. 하나님이 욥을 인정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는 부자였다. 사탄이 파고든 틈이 바로 거기에 있다. 욥기는 먼저 욥이 의인이라는 소개로 시작하고, 이어서 그의 막대한 부를 묘사한다. 부자와 의인이 한 사람 안에서 같이 갈 수 있는가? 그러나 구약성서 시대에는 부를 의인에게 주어지는 복으로 여겼다. 오늘날에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욥기는 바로 그 문제에 도전한다. 이 책은 욥이 의인이요 큰 부자임에도 매우 신중하게 행동하고 혹시 모를 자식들의 죄를 위해서도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한다. 자식들을 위해 일일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그의 신심이 얼마나 굉장했는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욥의 부가 그의 경건함을 해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탄의 문제 제기는 정당했다.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의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넉넉하니까 여유가 생겨서 남에게 예의 바르고 종교적인 경건도 지킬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자식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노심초사 하나님께 빌고 조심스레 사는 것 아닌가. 그리 애지중지하던 재산이 없어져도 하나님을 섬기고 지금까지 보여준 신앙의 열심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지킬 것인가. 욥은 지금 모든 것을 다 가진 상태에서 의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 무엇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인지는 그 가진 것들이 사라진 다음에야 드러나는 것 아닌가.
소유물의 문제다. 소유가 신일 수도 있다. 욥이 믿던 것은 재산이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재산을 불리고 지키는 데 사용된 수단일 수도 있다. 돈이냐 하나님이냐? 사탄은 욥을 그 갈림길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보면 예수의 말씀과도 같다.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신약성서는 말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 다만 신약성서는 둘 중에서 하나님을 택하라고 권하는 반면, 사탄은 그 갈림길에서 사람은 반드시 재물을 택할 것이라 한다. 신약성서에는 사람에 대한 희망이 있지만, 사탄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을 좌절시키려 한다. 재물의 복이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사탄이 제기한 문제는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인간에게 제기하는 물음이다. ― 3월 28일(월) 오후 4시, '#2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무능'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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