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첫 편지에 이치코 실장의 글이 없어 아쉬우셨지요?
2월의 첫 편지에 이치코 실장의 글이 없어 아쉬우셨지요? 두 번째 편지로 ‘소소한 리-뷰’를 전해드립니다. 새해 첫날엔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았어요.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좇으며 충만함과 평온함을 느꼈을 텐데요.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감동의 여운에 취해 있을 때 혼자 다큐를 찍겠다며 갑자기 분위기를 파괴하는 사람.” 네, 자타공인 ‘갑분파’, 이치코 실장입니다.
    종종 생각해요. 오후의 소묘의 추구미는 작고 짙은 온기와 아름다움이고, 그것이 현실에서 멀어지는 허상의 방향이어서는 안 된다고요. 그 밸런스를 이루는 한 축에 이치코 실장이 있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올해도 ‘발은 땅을 디디고’ 실감을 손에 꼭 쥐며 그로부터 길어 올린 온기와 아름다움을 전할게요.
올해 첫 영화는 빔 벤더스 감독의 <퍼펙트 데이즈>였습니다. 그리 부지런하지 않은 탓에 극장 개봉 때는 시기를 놓쳤고 새해 첫날 OTT로 감상했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는 매일 반복되지만 충만한 일상을 살아간다. 오늘도 그는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에 비치는 햇살을 찍고, 자전거를 타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잔을 마시고, 헌책방에서 산 소설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이가 소원한 조카가 찾아오면서 그의 반복되는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왓챠피디아 소개 참고) 조카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영화 전반부는 이야기랄 게 없습니다. 주인공 히라야마는 열심히 화장실 청소를(만) 합니다. 중간중간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휴식도 취하면서요. 이 단순한 플롯이 희한하게 감동적입니다. 충만하면서도 반복된 그 일상을 좇다 보면 덩달아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조카가 찾아오지 않고, 사이도 소원한데 뭐 하러 굳이, 러닝타임 내내 그렇게 화장실 청소하는 것만 봤어도 괜찮았겠다고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좋았습니다. 도쿄의 공공화장실 홍보 영화*치고는 잘 만들었더라고요.

*그는 도쿄 시부야구(區)의 17개 공중화장실을 유명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새롭게 단장한 ‘더 도쿄 토일렛'(The Tokyo Toilet) 프로젝트를 기념하는 단편영화 제작을 의뢰받고 지금의 도쿄를 담은 장편을 만들어보겠다고 역제안하면서 ‘퍼펙트 데이즈’를 연출하게 됐다. – 연합뉴스 기사
 
<퍼펙트 데이즈>에 감동한 사람들이 많은 듯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찬사가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하긴 직장인이라면 500% 감정 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영화입니다. 일의 종류만 화장실 청소에서 다른 것으로 바뀔 뿐 대부분의 직장인은, 꼭 직장인이랄 것 없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소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영화 속 히라야마와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을 반복하다 가끔의 일탈 정도가 허용되는 쳇바퀴 속에 갇혀 있죠. 하지만 히라야마처럼 충만한 영혼으로 일상을 반복하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영화에 감동한 지점이, 주인공의 화장실 청소 기술에 감탄해서 자기도 그 일을 너무 하고 싶어서는 아닐 겁니다. 아마도 질투가 날 만큼 평온하고 때론 행복해 보이는 주인공의 표정이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을 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지긋지긋한 밥벌이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히라야마처럼 충만하게 일상을 반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가 감동적이었다는 사실과 별개로, 픽션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들이 으레 그렇듯 <퍼펙트 데이즈> 역시 공공화장실 청소 장면을 그렇게 많이 보여주면서도 공공화장실 청소라는 일의 현실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과연 저 노동자들은 정규직인가? 계약직인가? 제대로 된 근로계약서는 썼을까? 야근과 특근 수당은 제대로 지급되고 있는가? 청소 장비 구입 등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닌가? 청소 중에 취객이나 불량배를 만났을 때 신변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을까?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감동의 여운에 취해 있을 때 혼자 다큐를 찍겠다며 분위기를 파괴하는 사람. 오늘은 제가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궁금한 걸 어쩌겠습니다.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이의 충만한 삶에 관해 빔 벤더스 감독이 보여줬다면, 공공화장실 청소 노동자의 고단한 현실에 관해서도 누군가는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걸요. 이런 사실들은 대체 어디서 알 수 있는 걸까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해답은 여기에, 어느 작은 책 속에 있습니다.
 
<작은책>은 작은 책입니다. 가로 128mm, 세로 186mm 정도로 통상적인 책 판형 중 가장 작은 축인 46판(128*188)에 해당합니다.(이보다 작은 판형의 책이 워낙 유행하고 있어서 이제는 결코 ‘작지 않은’ <작은책>이 되어버렸습니다. 저희 ‘마음의 지도’ 시리즈도 120*185로 조금 더 작습니다.) 매달 펴내는 잡지 <작은책>은 1995년 5월 1일 노동절에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정신으로 창간했습니다. 올해가 벌써 30주년이네요. <작은책>의 평면적 크기는 작을지라도 쪽수는 만만치 않습니다. 최근 3개월만 보자면 2024년 12월호가 160쪽, 2025년 1월호는 176쪽, 2월호는 164쪽입니다. 잡지의 특성상 뒤쪽에 독자편지와 광고가 조금 들어가 있다고는 해도 본문 여백이 좁고 23행이나 들어가는 구성이라 원고량만 보자면 비슷한 판형의 200쪽 이상 되는 책보다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요샌 한쪽에 15~16행만 들어가는 책도 흔하니까요.) 작고 얇아서(책등 8~9mm 정도) 금방 읽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전체를 다 읽으려면 한참을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한 권을 통독하는 경우보다 책을 스스륵 넘기면서 관심 가는 꼭지만 찾아 읽는 일이 더 많습니다.(정신 없고 바쁠 때는 제목들만 훑고 덮어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ㅠㅠ)
 
열성 독자라고 하기엔 매우 불량하지만 그래도 오래된 독자이긴 합니다. 2003년인가 2004년부터 정기구독을 하기 시작했으니 20년이 넘었네요. 다달이 찾아오는 <작은책>이 곁에 있어 세상에 발붙이고 있다는 걸 실감하곤 합니다. 우리는 기호와 언어의 홍수라고 부를 만한 이미지 과잉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엔 수많은 허상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보드랍고 매력적이고 화려하고 무엇보다 마치 내 것처럼 보이는 가짜 삶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에는 ‘부동산-아파트/건물주’라는 (날조된) 신화가 있습니다. 이 허상은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사람들의 욕망을 끝없이 부추깁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에 호응해 욕심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하지만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욕망에 휩쓸린 사람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자신이 일개 ‘누구’가 아니라 특별한 존재라 믿고 싶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모든 것이 허공을 부유하는 신기루, 가짜일 뿐입니다.
 
<작은책>은 진짜 삶을 이야기합니다. 욕망을 자극하는 대신 공감을 나눕니다. 대지에 발 디딘 채 서로 기대며 손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작은책> 2025년 1월호에는 ‘제4회 생활글 공모전 수상작’들이 실려 있습니다. 공모전의 소개글에는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일터 이야기 등 자기가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써서 보내 주세요. 살면서 어렵고 힘든 이야기든 어려운 분들에게 희망이 될 이야기든 다 좋아요.”라고 적혀 있습니다. 4회째를 맞은 이번 공모전의 (대상 격인) ‘작은책상’은 “아들 사망신고라도 하고 싶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2024년 6월 16일 오후 12시 58분, 핸드폰 너머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언니, 우리 아들 죽었대.” 짧은 순간 멍하니 시간은 정지되었고, 나는 전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여기저기 연락하면서 도착한 곳은 전북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이었습니다.
(…)
좋은 회사라고, 큰 회사라고 믿고 보냈던 아들이 ‘왜, 어떻게 홀로 죽어야 했는지’ 너무나 당연한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유족은 싸워야 했습니다.
(…)
결국 고인이 사망한 지 19일째인 7월 4일 고인의 엄마는 단식에 들어갔습니다. 그 아프고 슬픈 자리에 이태원 참사 전주 유가족들이 함께 했습니다.
(…)
고인은 7월 10일 순천시립공원에 잠들었지만 엄마는 아직 아들의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인이 사망한 지 135일이 지났지만 고용노동부는 경찰 수사를 핑계로 아직까지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여부도 판단하지 못하고 있고, 산재 승인도 감감무소식입니다.
(…)
— ‘아들 사망신고라도 하고 싶습니다’,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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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연습한 시간] 신유진 에세이 리뷰로 만나보기〰️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엔 작가님이 엄마의 우산 아래 있다가 엄마의 우산 밖으로 나갔다가, 이제는 나란히 손잡고는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그려졌다. 작가님이 엄마를 이해하면서 다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 내게는 타인을 이해하고 돌보면서 함께 가는 방법을 찾는 길로 들렸다.
  나는 이 책이 사소하고 하찮고 때로는 외면해 버리고 싶은 순간들을 차곡차곡 이야기로 길어 올려 펼쳐준 것이 좋았다. 아름답지 않고, 의미 없고, 별게 아니라 생각한 것, 외로워 침묵해 버린 것들을 건져 살게 해준 이야기들이 무척 좋았다.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을 수도 있었을 내밀한 영역을 솔직하게 고백해 준 덕분에 읽는 동안 슬픔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와르르 무너져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얻었다. 또한 드러내면 안 되는 줄로만 알았던 비밀, 욕망이나 갈망을 두려워하지 않고 표출할 때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힌트를 얻었다. @gomjaland
•믿고 읽는 신유진 작가님의 신작. 여성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모녀 서사를, 그 복잡다단한 사랑의 이야기를 작가님의 글로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때론 내가 살아온 삶보다 나의 책장이 나를 더 잘 드러내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래서 작가님이 엄마의 이야기를 엄마의 책장으로부터 풀어나가는 방식이 참 좋았다. 정작 나는 엄마의 책장 한켠에 놓인 손때 묵은 책들을 펼쳐볼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엄마의 영향으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으면서.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명의 타자로 인식하려는 노력과 또 어쩔 수 없이 엄마로 바라보게 되는 딸의 마음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더욱 공감하며 읽었다.
  여성이라면, 딸이라면, 엄마라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 여성으로서 나의 엄마를, 엄마로서의 나를, 자꾸 돌아보게 하는 깊은 책. @syeon_note
•엄마를 가만히 생각해 본 적이 있었을까. 잘 지내고 있는지, 감기에 들지는 않았는지 그런 안부 말고 엄마라는 사람에 대해서. 엄마와 갈망을 동시에 생각해 본 적이 있던가. 책을 읽을수록 건네는 질문은 많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우리 엄마. 엄마만큼은 아파서도 힘들어서도 안 된다고, 그러나 이 간절함만큼 내가 엄마를 보듬어준 적은 없다.
  사랑을 연습한 시간을 읽는 내내 엄마를 생각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어느 때보다 깊이. 그리고 8년째 엄마를 연습하고 있는 나를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여성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들이 작은 삽이 되어 오랫동안 고여 있던 웅덩이에 작은 물길을 만든다, 미약할지라도 멀리 나아갈 수 있는, 나아가야만 하는. @moajium_
•책을 읽으며 자주 떠올린 것은, ‘알고 싶다’, ‘쓰고 싶다’ 같은 마음이었다. 나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서사에 대해서 자꾸 떠올려보고 싶다. 쓰다 보면 잊혀진 기억들이 하나둘 되살아나겠지.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도 들여다보고 싶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내 삶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않고 관심 가지고 살고 싶다. 그리고, 야성도. 마냥 따뜻한,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예쁘장한 마음 말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야성도 찾아보는 그럼 삶.
  한 번에 최고의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욕심 같은 것 버리고, 연습하면 할수록 조금씩 나아질 거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내 이야기를, 사랑을 써보고 싶어졌다. @__adagio_allegro
✏️ [작가의 방] 3월 예약하기
• 장소: 오후의 소묘 스튜디오(서울 은평구 응암동)
• 시간: 화-토 15:00~18:00 | 3시간 15,000원(다과 포함)
• 링크 : 네이버 예약

긴 대화를 읽고 있으니  마치 제가 두 분의 옆 테이블에서 가만히 엿듣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희미한 미소와 온기가 느껴지는 대화였어요. 저도 산책을 참 좋아하는데요, 이른 아침 집 근처 샛강을 걷다 보면 동이 트는 하늘을 배경으로 부지런하고 우아하게 아침을 깨우는 생동의 기운을 얻곤 합니다. 새소리, 샛강이 잔잔하게 흐르는 소리, 오리가 지나가며 만드는 물길, 이슬이 맺힌 풀들,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코끝을 스치는 차갑고 신선한 공기.. 저의 모든 감각이 함께 깨어 숨 쉬는 기분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그럴 때면 저는 우리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낍니다.  혼자 걸어도 제 안의 무언가가 충만하게 채워져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인데요, 그것은 마치 혜미 작가님의 '혼자여도 둘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느낌과 닮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제가 정말 애정하는 사적인 순간이에요.
돌이켜보면 우리가 가장 사적일 수 있는 때는 주변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하게 느낄 때라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저의 사람들이 가장 사적인 시간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답장을 마칠게요. 겨울과 봄 사이, 찬 기운의 끝자락 감기 조심하세요 :) _inyoung0408


        인영 님의 문장을 여러 번 읽으며 오래 함께 산책한 기분이에요.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때 가장 사적일 수 있다니, 이토록 아름다운 정의가 또 있을까요. 충만함으로 가득한 사적인 시간과 마음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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