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구독자님 :) 독자님은 언제 계절감을 느끼세요? 저는 주변을 맴도는 빛깔이 달라졌을 때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느껴요. 초록초록하던 시장에 사과와 배, 감 등 노르스름한 빛이 많아졌다고 느낄 때,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은행잎 빛깔 니트를 입고 나왔을 때 처럼 말이죠. 며칠 전에는 지인과 남산을 산책하다가 은행나무를 봤는데, 벌써 노랗게 물든 성질 급한 나무가 있더라고요. 그 옆에는 여전히 초록을 간직한 느긋한 나무도 있었고요. 같은 자리에 선 나무들이 각자의 속도로 물들어 가는 걸 보니, 제가 키운 나무도 아닌데 마음이 흐뭇해지더라고요. 가을이 오면 시간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성질 급한 은행나무처럼 서두르게 돼요. 그럴 때… 자기만의 속도로 천천히 물들어 가는 느긋한 나무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빨리 물들든 늦게 물들든, 독자님의 속도를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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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한달을 보내고 내가 사는 알라미다로 돌아오니 문득 익숙하던 것, 가령 맑은 날씨나 서늘함 같은 것들이 낯설게 느껴진다. 베트남에서는 매일매일 비가 내렸다. 장대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수업을 하다 보면 주변이 어두워지면서 바람이 후욱 하고 불었다. 그렇게 비가 장하게 내리면 시끄럽던 사이공 거리는 고요해졌다. 빗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잠시 수업을 멈추고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일, 그리고 학생들이 우비로 무장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일로 여름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도 친근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카자흐스탄으로 선교를 떠나는 새 신부님의 담담한 미소가 내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자그마한 체구의 베트남 신부님에게 그 선교지는 너무 추운 곳이 아닐지 걱정도 되었다. 너무 힘들면 바로 돌아오라고 말을 건네다가 내가 나이든 수녀여서 할 수 있는 말이란 생각이 들며 웃음이 피식 났다. 그곳 수녀님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영적 지도를 하면서, 하늘나라를 위해 달려나가는 그들의 마음이 받은 상처들을 만났다. 아릿하게 아프면서, 그들 생의 여름을 바라보았다.
철학을 공부하는 평신도 젊은이들과 빗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시간도 여름 밤의 풍경에 해당할 것이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면서 누구보다 눈을 반짝이며 라캉을 읽어 온 여학생, 몸이 많이 불편한 그 학생은 장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또한 인문학을 사랑한다고 했다. 영화를 이야기하고, 젠더를 이야기하는 이 젊은이들과의 대화는 몸의 피로를 잊게 했다.
교회 안에서 성폭력을 당한 대학생의 고독한 절망을 들으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진정으로 들어주고 계속 관심을 가져 주는 일이라는 것,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내면이 조금 더 단단해 진 것을 알아채고 박수 쳐 주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느낀다. 온통 푸른 베트남의 이 계절은 내게 뜨거운 여름이다.
베트남의 평신도 프로그램에서 강의하던 날도 비가 억수로 내렸다. 성(sexuality) 과 교황님의 회칙 ‘위대한 인간’에 대한 강의였는데, 여성들이 훨씬 많았다. 그것도 놀라웠다. 그리고 질의 응답 시간에 여성들은 몸에 대한 이미지로 받은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여성은 멀리 떨어진 메콩델타에서 왔는데, 눈물을 흘리며 난 내 몸을 느낄 수가 없다고 이야기했다. 여성의 문제, 몸의 문제를 들으면서, 그 시간이 거룩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베트남의 시간들은 젖었고, 또 따스했다. 베트남의 여름은 빗 속에서도 그렇게 따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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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위엄이랄까. 버클리 대학 북문 앞의 게시판은 세월과 함께 누군가의 게시물의 흔적들이 쌓여 있다. 그 두께 위로 또 새로운 소식들을 만나면서, 생의 여정,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영원을 생각한다. ⓒ박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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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숙소의 도마뱀들의 끽끽거리는 소리와 모습도 익숙해지고, 선물로 받은 연꽃 부케가 시들 무렵, 다시 짐을 챙겨 공항으로 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고요한 가을 저녁이다. 갑자기 시간은 나를 가을 한가운데로 돌려 세워 놓은 듯 낯설다. 베트남에서 학생 수사 수녀님들과 영화 〈오딧세이〉를 보고 우리는 토론을 했었다. 우리는 ‘고향은 어디에 있을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하느님을 따르는 주님의 백성은 영원한 순례자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고향이 있다면 그건 어딜까. 십 년 넘게 가르쳐 온 사이공 신학교, 매년 만나는 이태리에서 온 테리 교수, 친숙한 베트남 수도자들의 틈에서 베트남이 내게 고향인가.
언제나 공항에 들어서면 내 집 같은 한국인가. 아직 변하지 않은 옛날 서울의 그림자를 찾으면서 안도하고,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나고, 새로운 작업을 준비하고 계획하는 그곳이 나의 고향인가. 그것도 아니면, 이제 삼십 년이 되어가는 미국의 베이 지역, 이곳이 나의 고향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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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름의 훈장처럼, 도마뱀의 끽끽거리는 소리를 기억한다. 그리고 무해한, 그러나 낯선 생명과의 한 달은 어느새 내게 고향처럼 그리움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리운 걸 보니 가을이다. ⓒ박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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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베이 지역에는 가을이 한창이다. 저녁에 산책하러 나오니, 장작 타는 향기, 그리고 어스름한 저녁 가로수의 촉촉한 향기가 오랜 익숙함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 오랜만에 성당에 가서 신자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이곳이 또한 나의 고향이란 생각을 한다.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당장 이번 주말에 트럼프에 반대하는 행진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캐롤 수녀의 텍스트 메시지를 보면서 내가 고향에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은 미사 후 친구들과 국수를 사먹고, 틸든 파크를 산책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돌아 오다, 문득 고향은 이 모든 공간이고, 그렇게 고향은 흐르고 있고, 확장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벌써 해는 짧아져서 어둑어둑해지는 오후 여섯 시, 여름과 가을 사이 어딘가를 살고 있는 사람들, 자기 내면을 열어 보여준 고향 친구들이 평안하기를 기도하게 된다. 오늘의 주일 복음 말씀을 묵상하다, 예복을 마련하지 못한 게 나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에게 빌려 입으면 괜찮지 싶다. 나도 누가 예복이 없으면, 내 집에 있는 여벌 옷을 챙겨줄 것이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하늘나라라면 그래도 괜찮지 싶다. 그 하늘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이니. (마태오복음서 22장과 루카복음서 14장의 잔치 비유 비교-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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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가을은 핼러윈 준비로 시작된다. 우리 동네에 가장 화려하게, 가장 진보적인 정치취향을 보여주는 가정의 핼러윈은 올해 조용하다. 주인이 무릎 수술을 했다고 친절하게 써 놓았다. 다른 집들도 서둘러, 죽음을 기억하는 그 가을의 축제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박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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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칼럼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신학 오디세이아3’ 코너에 함께 연재합니다.
🌗 지난 12호에 보내드린 10월 묵상 잘 하고 계신가요? 시간 내서 꼭 해보세요! 다음 《오브》는 10월 28일에 발행됩니다.
보내주신 소중한 답장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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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 묵상글을 읽으며 생각하게 됩니다. 10월의 글을 보면서 관상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실재에 보내는 길고 사랑스러운 시선" 그리고 마지막 주에 그림자를 품어 안으라는 말에서 왜 수녀님이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우리 안에는 빛이 비칠때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내 안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이 또 관상이라고 말한거 아닐까 생각이 들었어요. 내 안에 세상에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의 그림자도 안아줘야 겠다는 생각과 힘들고 슬픈 순간들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겪어낸 나 자신에게 " 나는 , 나의 삶은 아름답다" 라고 말해주라고 했는데 오늘 그 말을 해보았어요. ~~~ 김내식 시인의<그림자에게 길을 묻다> 라는 시는 너무 울림이 컸어요. 자꾸 자꾸 읽게 되네요. 항상 뉴스레터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디터님들의 글도 너무 좋았구요. 책 소개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 와 꼼꼼한 리뷰에 애정이 느껴집니다. 마음에 시를 계속 간직하고 지내시길! 🥰
독자님의 답장이 저희에게는 가을 열매보다 더 반갑습니다. 📮 짧은 가을과 깊게 연애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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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 : 출판사 옐로브릭
- 에디터 : 오수경·임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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