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한 라디오에 안녕하세요! 에디터 FRIDAY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라디오를 다시 사랑해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 부끄러움도 모르고 살짝 들렀습니다😅 여름 휴가 시즌인데 레터를 읽어주시다니 감동입니다. 휴가 없이 일하시는 모든 분들도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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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완이 돌아왔다
- 라디오는 원시 부족의 북
- 무용의 가치를 발견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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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이 돌아왔습니다. ‘아침창’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지난 3월 떠났었죠. 그리고 4개월 만에 다시 라디오 DJ가 되었습니다. 이번엔 SBS 러브FM에서 <6시 저녁바람 김창완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을 맡았습니다. 2000년부터 10월 12일에 시작해 2024년 3월 17일까지 매일 아침 9시부터 11시를, 24년 동안 진행해온 그가, 이번엔 2024년 7월 22일 저녁 6시 5분에 다시 ‘첫방송’을 했습니다. 이번엔 오래 오래 진행했으면 좋겠네요.
김창완이 아침창에서 마지막 방송을 할 때, 그의 연주와 흐느끼는 울음이 화제가 됐었습니다. 평소 동네 아저씨처럼 소탈한 복장으로 출근하던 그가 그날엔 수트에 초록색 나비넥타이까지 맸었습니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같이 방송을 진행하면서 “아침창 가족의 영원한 집사이고 싶었다”고 담담하게 말했기에 우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다 후배 가수 잔나비와 스페셜 라이브 무대를 꾸리던 중 그의 노래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를 부르며 목이 메는 듯 하더니, 방송이 모두 끝나고 광고가 나갈 때 화면은 그의 우는 모습을 담았죠. 이 날 라디오 방송에는 그의 울음소리가 들어가지 않았었습니다. 애써 애써 참다가 온에어가 아주 끝난 때부터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죠. 그 당시 원래 라디오를 안 듣던 사람들도 기사를 통해 내용을 접하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표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한 세월이라는게 이렇게 저무는구나,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김창완의 한 팬으로서 저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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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 너무 거창하니 변곡점 정도로 이름 붙여볼까요. 마지막 방송 이후 ‘아침창’의 오프닝 멘트와 청취자의 고민에 대해 쓴 엽서 및 답변들을 담은 김창완의 책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가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게 왠 기적? 이라고 하실 수도 있으나 일단 들어보시죠.
사실 그 전부터 ‘김창완의 동그라미’ 이야기가 이곳 저곳에서 바이럴이 됐습니다. 직장생활로 스트레스를 받아 살이 쭉쭉 빠진다는 한 청취자의 고민에, 김창완은 동그라미들을 그렸습니다. 마흔 일곱 개를 삐뚤빼뚤 그리다가, 그 중 그럴싸한 동그라미 두 개를 꼽습니다. 그러곤 말하죠. “회사생활이란 것도 47일 근무중에 이틀이 동그라면 동그란 것입니다. 너무 매일 매일에 집착하지 마십시요. 그렇다고 위에 그린 동그라미를 네모라고 하겠습니까, 세모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다 찌그러진 동그라미들입니다. 우리의 일상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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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찌그러져도 동그라미입니다>, 웅진지식하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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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필요한 요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바가 있었겠지요. 저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게시물로 돌아다니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라디오 하차 이후 책과 함께 김창완은 갑자기 더욱 더 주목을 받게 됩니다. (펜타포트 락페스티벌에서도 여전히 헤드라이너고, 배우 활동도 왕성히 한 그가 주목을 받지 않은 적이 있었나 싶지만요.) 여기 저기에서 북토크나 강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공연을 하러 전국을 돌아다닙니다. 미국에 초청받아 ‘한국어 마을’ 건립 축하를 하기도 했고요. tvN에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라는 이름의 예능 프로의 진행을 맡기도 했죠. 그리고 무엇보다, 7월에 라디오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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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업계에 있다 보면 유명의 흐름이 잘 느껴집니다. 반짝일 수도 있고 다른 이의 기세로 묻혀버리는 때도 있지만 아 이 사람 흐름 탔다, 싶은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김창완 개인으로 봤을때 그의 브랜드 가치는 라디오 하차 이후 더 올라간듯 보입니다. 가수로서도 정점을 찍은 분이니 다시 전성기가 왔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라디오 애청자가 아니더라도 대중은 이제 그를 ‘동그라미 아저씨’라고 부르며 기대고 싶은 어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오피니언 리더’로 영향력도 스멀스멀 생긴 듯 합니다. 그런 그가 라디오로 다시 돌아오다니, 이건 라디오라는 매체에 있어서의 기적입니다. ‘스타’를 라디오에 모시기엔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기적이라고 믿고 싶고, 이걸 계기로 더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어주었으면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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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는 김창완의 새 프로그램 <6시 저녁바람 김창완입니다>의 첫 방송을 들었습니다. SBS 라디오 어플 ‘고릴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는데, 그를 환영하는 게시판의 수많은 글들을 보고 있으니 감정이 벅차오르더군요. 적지 않은 문자들이 ‘아저씨가 라디오 그만 두시고 많이 울었고, 삶의 일부분이 떨어져나간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다시 오신다니 살아갈 희망을 얻은 것 같아요’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라디오, 요즘 아무도 안 듣는 것 같아도 꽤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군집을 이루어 살고 있더군요. 이른바 ‘라디오 가족’. 이들은 서로의 이름과 얼굴도 모르지만 들여오는 사연들로 존재를 인식합니다. 일상 속에 스며들어 때론 옅게 웃고, 코가 시큰하고 그러겠지요. 면면도 참 정겹습니다. 가족들 저녁 차리면서 듣는 주부, 이직한 회사에서 야근하는 직장인, 막히는 퇴근 길에 화물을 실어 나르는 운전기사 등… 잠시나마 다른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녁바람> 첫방송을 들으며 고릴라 문자창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봤는데요,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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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청취자 A : 창완님 라디오는 저의 육아 동지였어요. 육아 시작하면서 듣기 시작했는데 이제 그 딸이 7살이 됐어요.
_청취자 B : 어머니 모시고 강화도 데이트했는데 어머니가 어찌나 잘 드시던지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같이 카페에 가서 예전 이야기 하시며 소녀처럼 웃으시고… 다음에 또 모시고 나들이 가야겠어요.
_청취자 C : 아저씨의 푸근하고 따뜻한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니 정말 기뻐요. 오늘 하루 있었던 우울한 일들이 모두 잊혀지네요. 다시 돌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_청취자 D : 창완아저씨 안녕하세요 중학교 2학년인데요 오늘 방학했어요. 기말고사 성적에 충격받은 엄마를 위해서 방학때는 열심히 공부해보려구요. 게임 안 하려고 컴퓨터는 안 키고 라디오 듣습니다. 방학동안 잘 듣겠습니다. 저도 아저씨도 화이팅하면 좋겠습니다.
_청취자 E : 저녁바람처럼 포근한 진행으로 다시 저희 곁으로 돌아와주셔서 감사해요. 창완 아저씨 덕분에 퇴근길 제 차안에도 저녁바람이 부네요ㅎㅎㅎ
_청취자 F : 학생때부터 35살이 넘은 지금까지 인생에 함께 하셨습니다. 내 인생 시작과 끝을 같이 하고싶습니다. 떠나지 마세요.. 창완이 형님, 내 마누라 다음으로 사랑합니다!
_청취자 G : 저는 저녁 8시까지 편의점 알바해요. 이젠 저녁 6시에 라디오 틀고 일 마무리 해야겠어요. 아저씨 우리 매일 저녁 같이 퇴근해요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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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는 이런 맛으로 듣는거죠. 항상 그 자리 그 시간에 있어줄거라는 믿음, 문밖에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열심히 살고 있구나 미소짓게 되는 따뜻함, 나의 생애주기를 함께하는 세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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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는 어떤 매체이길래 이토록 친밀감을 느끼게 할까요? 잠시 오래된 책 하나를 꺼내보았습니다. 캐나다의 철학자이자 미디어 비평가 마샬 맥루한은 저서 <미디어의 이해>에서 인간의 감각과 인식을 확장시키는 것을 모두 ‘미디어’로 칭했습니다. 이를테면 문자는 눈의 확장, 의복은 우리의 확장된 피부, 자동차는 다리의 확장이라고 보았습니다.
맥루한은 미디어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그 속에 담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로 발현된다고 했는데요, 전신(미디어)은 인쇄(미디어)된 말을 담고 있고, 인쇄(미디어)된 말은 손(미디어)으로 쓴 글을 담고 있으며, 또 손(미디어)으로 쓴 글(미디어)은 말을 담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담긴 미디어는 담은 미디어의 메시지이지만, 내용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디어 그 자체가 메시지로서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영화’를 예시로 들면,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넷플릭스를 통하여 보는 것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경험이 다릅니다. 혹은 TV 드라마에 어울리는 내용이 있고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에 어울리는 내용이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미디어가 메세지를 실어 나르는 듯 보이지만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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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도 훨씬 넘은 1964년에 나온 책이기에 여기엔 OTT도 없고 유튜브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는 말은 마치 가라앉고 있는 라디오라는 초 올드 미디어가 다시 떠오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처럼 다가왔달까요…? 라디오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이 있다는 확신처럼 느껴졌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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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작은 상자여, 내가 도망치면 나를 꽉 붙들어다오.
너의 진공관이 부서지지 않게.
집에서 배로, 배에서 기차로 옮겨라.
적들이 나에게 계속 말할 수 있도록
나의 침대 곁에서 나의 고통을 달래 주고
밤에는 마지막까지, 아침에는 제일 먼저,
그들의 승리를, 그리고 나의 근심을,
약속해 다로, 갑자기 벙어리가 되지는 않겠다고.
-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이트가 라디오에 대해 쓴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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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루한은 라디오가 사람들에게 개인 대 개인으로 상대할 때처럼 친근하게 다가가기 때문에 개인적인 경험을 선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디오가 잠재의식의 심층에서 ‘부족의 나팔’이나 ‘고대 북’의 울림처럼 공명한다고 말합니다. 라디오 매체의 본질 속에는 인간의 마음과 사회를 하나로 단일하게 반향하게 하는 힘이 있다네요. 멀리 떨어지고 잊혀졌던 심금을 울리는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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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의 메시지는 격렬하고 통일적인, 내파와 공명의 메시지다. 심오한 고대적 힘이며, 가장 먼 과거 그리고 오래도록 잊혀졌던 경험과 그들을 이어주는 시간의 연결고리다. 한 마디로 전통이란, 과과 전체를 현재로서 느끼는 감각이다. (중략) 문자 문화가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조장했다면, 라디오는 정반대로 깊은 부족적인 관여가 만들어 내는 혈족적 그물눈이라는 고대적 경험을 되살려 놓았기 때문에… (중략) 가장 강력한 특성을 가진 고대 부족의 망령을 불러냈던 것이다.”
- 마샬 맥루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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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라디오는 인류를 다시 ‘부족화’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앞서 보여드렸던 디제이와 청취자 간의 끈끈한 우정, 직접적으로 닿아있지 않아도 가족이라고 느끼는 청취자 집단이 마치 촌락을 형성한 듯 보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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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가 친밀감만 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무용함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오랜만에 왔으니 욕심껏 책 한 권 더 주저리 주저리 소개하고 갈게요.) 일본의 현대미술가 아카세가와 겐페이가 1987년에 쓴 <초예술 토머슨>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무 요상한 이름 조합이죠? 초예술은 뭐고 토머슨은 누구람… 이 책은 아무 쓸모가 없거나 원래 기능을 상실했지만 어쩌다 그 자리에 있게 된 것들을 조명합니다. (이 책도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되었네요. 프로그램 <책하고 놀자>에서 김혼비 작가가 소개해 듣고 바로 구매했습니다.)
아래의 사진을 보십시오. 아카세가와가 도쿄 요쓰야 인근에서 발견한 ‘순수 계단’입니다. 이 계단을 오르고 내려갈 수 있지만 그 목적지가 없습니다. 원래 가운데 문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 문이 없어서 쓸모가 사라졌는데도 여기 가만히 있습니다. 더 신기한 점은 망가진 곳이 깔끔하게 수리되어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 이 쓸모 없는걸 철거하지도 않고 살뜰하게 살피고 있다는 뜻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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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래의 사진은 시멘트로 발라져 버린 한때의 문입니다. 요상하게도 손잡이 부분을 떼지도 않고 남아있습니다. 실제로 잘 돌려진다는데… 저 문을 열 수도 없지만 왜인지 이세계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호기심 반 공포심 반 기분이 듭니다. 스즈메의 문단속의 비밀문인 것 같기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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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렇게 도시의 농담 같은 것들을 담아냅니다. "예술이 예술가가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라면, 초예술이라 이름 붙인 까닭은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라고 아카세가와는 설명합니다.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서 아름답다, 의도가 없으니 작가도 없다. 하지만 관찰자가 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이건 초예술이다, 뭐 이런거죠. 마치 순수문학이 있는 것처럼, 오직 순수하게 오르내리기만 할 수 있는 ‘순수계단’이 있다고 예술성을 부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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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bukaru
이 사람이 개리 토머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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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일본 프로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 타자로 활동하는 외국인 용병 선수가 있었습니다. 높은 연봉이었음에도 매일 헛스윙만 날려서 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 했죠. 그래서 아카세가와는 ‘분명 제대로 된 몸체는 있었는데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기능이 없는’ 토머슨 선수를 ‘돈까지 들여가면서 정성스럽게 보존’하는 모습이 ‘살아있는 초예술’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약간의 악질인 아카세가와는 이후 ‘부동산에 부착되어 아름답게 보존되는 무용의 장물’을 찾아다니며 ‘초예술 토마손 제1호’, ‘초예술 토마손 제2호’ 등으로 이름 붙여 수집하기 시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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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우리가 했던 걱정은 토머슨 선수가 다음 시즌에 자이언츠에서 해임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처럼 살아 있는 초예술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분. 무용의 계단, 무용의 창구나 무용의 문 같은 거리의 초예술은 토머슨 선수처럼 언제 이 세상에서 해임될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더는 이 눈으로 직접 초예술을 확인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일본 문화는 도대체 어떻게 될지….
(다음 장)
우려했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다. 자이언츠의 토머슨 선수가 철거되어 버려졌다. 야구방망이에 공이 닿지 않는다는 겨우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1982년 게리 토머슨 선수는 자이언츠에서 철거되어 미국으로 폐기되었다. 분해도 어쩔 수 없다. 야구방망이에 공이 닿지 않았으니까. 세상의 이치다. 초예술은 언제나 그런 운명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소리를 높여서 말해야 한다. 초예술 관측에 서둘러야 한다고 말이다. 독자들은 그저 넋 놓고 이 글을 읽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제2의 토머슨 물건이 생산제 사회의 어둠 속에 매장되는 중이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려지고 있다는 말이다.
- 아카세가와 겐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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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길게 얘기한 이유는 당신이 ‘무용함’에 얼마나 흥미를 느끼는지 궁금해서였어요. 결국은 라디오를 홍보하러 나온 자리니까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미디어가 되고 청각으로 한정된 라디오는 지금까지 침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아무도 관심없는 무용의 '토머슨'과 같아졌을지도 몰라요. 세상 발전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 경제 지식을 요약해주는 유튜브가 아닌 것, 1.5배속으로 볼 수 있는 OTT 드라마가 아닌 것, 내 월급에 크게 도움될 것 같지 않지만... 찾게 되는 안정감이 있지 않나요? 모두 느끼고 있잖아요. 맞춤형 알고리즘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결국 끝없는 지루함의 굴레이자 독소처럼 쌓이는 도파민 중독과 피로라는 것을.
디톡스의 한 방법으로 라디오 청취를 권합니다. 조건도 확실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만 들을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제대로 못 듣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다시듣기에는 노래가 안 나옵니다) 빨리감기도 못 합니다. 스킵하거나 원하는 부분만 듣는 것도 안 됩니다. 그냥 시간에 몸을 맡기고 힘을 쫙 빼면 됩니다. 라디오는 아스팔트 바닥 틈에 핀 들꽃처럼 우연한 행운의 덫이에요. 당신이 여기에 걸려들어서 미주알 고주알 오늘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아주 쓸모 없는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 순간의 아름다움과 덧없지만 따뜻한 몽글몽글함을 느껴보시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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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FRIDAY>의 코멘트
김창완 아저씨의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마지막 방송입니다. '가장 많이 다시 본 장면'이 아저씨 눈물 장면이네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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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Zoe • 구현모 • 찬비 • 나나 • 오리진 • 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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