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돌아온 미리보기 코너! 여자를 사랑한 여자의 여자 이야기’라고 요약할 수 있는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가 그 주인공입니다. 한창 열심히 출간 작업 중이에요. 이번 주 금요일(26일)이 ‘레즈비언 가시화의 날’이기도 한 만큼, 찐-한 사랑 한가득 퍼담아 여자 이야기로 채운 이 책에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알라딘 북펀딩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출간을 앞둔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를 디자인한 🎨가내수공업자의 디자인 후기도 담았어요. 표지에는 엄청난 비하인드가 담겨 있다고 하는데요······! 함께 읽어볼까요?
“어서 오세요, 여자를 사랑한 여자의 여자 이야기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기자이자 각종 퀴어 콘텐츠를 마구잡이로 ‘먹어온’ 박주연의 ‘지독한’ 여자 사랑 이야기. 용기와 위안, 슬픔과 기쁨 등 온갖 감정과 함께 깨달음을 안겨준 미디어 속 여자들의 이야기가 한 권에 담겼다. 한 레즈비언의 희로애락과 함께하는 절절한 퀴어 영화/드라마 가이드북.
Free-view, Preview :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 
지은이 │박주연
내 인생을 채운 건 여자, 여자, 여자였다. 그들 덕분에 지금껏 살아오고 있다. 퀴어-페미-덕후라는 꽤 마이너한 정체성도 갖고 있다. 따라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세상도 무척 넓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으며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의 ‘케이팝을 퀴어링’, ‘퀴어돌 영업왕’에 출연하고 있다.

키스하는 여자들

: 〈갭 더 시리즈〉 쿤쌈과 몬


여자들의 사랑이라고 하면, 숭고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일이 많은 것 같다. 특히 2015년의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부터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거쳐, ‘#OO계_내_성폭력’ 고발과 ‘#Metoo’(미투 운동)으로 이어지는 과정 이후, ‘여성 연대’가 중요해진 영향도 있을 거다. 이성애 중심 가부장제 사회 아래 주입되어온 ‘남자 사랑’이 아니라, ‘여자를 사랑하자, 여자를 응원하고 지지하자, 여자들 간의 관계를 소중히 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고, 나 또한 당연히 동의하는 부분이지만, 때때로 그 사랑을 생각할 때 난 좀 더 찐득한 걸 떠올린다. 서로의 숨결이 너무 가까워 숨 막힐 정도로 찐득한, 결국 그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통해 뒤섞이는 장면을. 이러면 또 ‘역시 퀴어는 하나 같이 변태구먼’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사실 그렇게 생각해도 상관없긴 하다. 그렇지만 내가 봐온 이성애자들이야말로 허구한 날 남자와 여자가 나오면 엮어먹으려고 난리던데······ 하여튼 내가 이렇게 (말마따나) 변태가 된 이유엔 슬픈 사연이 있다(슬픈 사연 없는 퀴어의 삶, 언제 가능한가).

 

흔히 게이, 호모, 퀴어라고 하면 변태스러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일이 많은 것 같지만, 난 종종 의문이 든다. 대체 그 변태스러운 걸 어디서 본 걸까? 난 아주 오랫동안 동성끼리 키스하는 걸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치사하게 자기들끼리 봤던 걸까). 심지어 한국은 여전히 방송에서 동성 키스를 금기와 논란으로 여기고 있는 ‘놀라운’ 나라다. 2015년 JT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은, 여고생 둘의 키스신이 방송된 후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중징계인 ‘경고’ 제재를 받았다. ‘그땐 2015년이니까, 한국사회가 좀 더딘 면이 있어서 그래’라고 넘어가보자 했지만, 2023년 SBS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방영하면서 남성 둘의 키스신을 삭제하고 내보냈다. 심지어 이미 19세 미만 관람 불가 등급으로 편성된 방송이었다. 동성 키스는 비청소년이 봐도 모방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엄청난 위력이 있는 걸까? 아니 나도 종종 동성 키스 한번 해보라고 추천하곤 하지만(농담), 그걸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줄 몰랐네?

한국이 굉장히 뒤처진 상황이긴 하지만, 내가 주로 봤던 서구권 콘텐츠들도 퀴어의 성애적인 친밀성을 보여주는 데 있어선 꽤 소극적이었다. 쉽게 말해서, 이성애자 커플이라면 분명! 100프로! 키스할 장면인데, 동성애자/퀴어 커플은 그냥 포옹하거나 뜨거운 눈빛만 주고받고 넘어가거나 아니면 키스할 것처럼 서로 얼굴이 가까워지다가 갑자기 화면 전환!(아아아아아악!) 많은 퀴어 콘텐츠(퀴어 캐릭터가 조금이라도 등장하는 콘텐츠 포함)를 보다 그런 일을 많이 당해 억울함이 쌓였던 난 어느새 변태처럼 그런 장면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퀴어끼리 키스하는 게, 섹스하는 게 뭐 어때서!”라고 소리 지르며. 그런 나에게 어느날 어떤 여자들이 다가왔다. 〈갭 더 시리즈〉의 쿤쌈과 몬이었다.


〈갭 더 시리즈〉는 태국의 GLGirl's Love* 드라마로, 2022년 11월부터 태국 채널3와 유튜브를 통해 공개됐다. 늘 퀴어 콘텐츠를 찾아 헤매는 나에게, 〈갭 더 시리즈〉 방영은 구미가 당기는 소식이었지만 바로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고백하자면, 유튜브에서 1화를 재생해보긴 했는데, 조금 올드하게 느껴지는 연출과 어색한 연기에 오글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몇 분 만에 껐다. 하지만 그 뒤로 몇 번 SNS에 올라오는 짤들을 보며 다시 흥미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즈음, 친구가 영업을 시작했다. 1화부터 보는 게 재미없으면 “5화부터 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는 말이 심상치 않았다. 아, 뭔가 있구나. 5화부터 뭔가가 있구나!(퀴어가 이렇게 영업할 땐 정말 뭔가가 있는 거다. 믿어야 한다.)

 

(중략)

 

일단 둘의 관계는 회사 대표와 인턴,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굉장한 긴장감이 있었다. 쿤쌈은 몬에게 까칠하게 굴면서도 집착한다. 그게 일종의 관심 표현인 거다. 하지만 몬은 그런 사실을 알 리 없고 둘의 관계는 계속 꼬인다. 어쩌다 데이트 같은 식사를 하게 되는데, 뜬금없이 쿤쌈은 몬에게 “네가 내 코를 깨물면, 난 네 입술을 깨물게”라고 참신한 제안을 전한다. 저기요, 갑자기 뭘 깨문다고요?

처음엔 솔직히 조금 웃겼다. 아니, 너무 수작 부리는 게 보이잖아요! 허허. 저 친구 귀엽구먼 너스레를 떨었지만, 정작 ‘코 깨물기 입술 깨물기’ 장면이 등장했을 때는 ‘헙’하고 숨을 멈췄다. 그 뒤로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자꾸 반복됐다. 아니, 이렇게 유치한 장면을 좋다고 할 일인가? 너무 자존심이 상했지만, 좋은 걸 어떡해. 이래서 이성애자들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성애자들아, 그동안 놀려서 미안했다.

 

(책에서 계속됩니다.)


*GL은 걸즈러브(Girl's Love)의 줄임말로, 말 그대로 소녀/여자들 간의 사랑을 말한다. GL 콘텐츠는 이름에 ‘사랑’이 들어가 있는 만큼, 캐릭터 간의 사랑/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면 GL 콘텐츠는 레즈비언/퀴어 콘텐츠와 다른가? 네 그리고 아니오, 양쪽 다다. 사실 이것의 구분은 정확한 답이 있다기보다, 창작자와 소비자/향유자가 콘텐르를 어떻게 정체화하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갭 더 시리즈〉 같은 경우, 퀴어 콘텐츠가 아니라 GL 콘텐츠로 명명되고 있는데, 이는 이미 태국에서 BL(Boy's Love) 드라마가 크나큰 인기를 얻으며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친구? 연인? 그 경계의 여자

: 〈알고 있지만〉 솔과 지완


(중략)

내 첫사랑은 중학교 때다. 여중을 다녔던 난, 만우절 반 바꾸기를 통해 짝꿍이 된 언니에게 한눈에 반했다. 굉장히 우연한 (하지만 나에겐 운.명.적으로 느껴졌던) 그 만남을 통해 우린 친해졌다. 정말 거의 날마다 편지를 썼다. 아침이면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교문이 보이는 교실 창문에 매미처럼 들러붙어서 언니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당시 학교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젠 그 많은 편지에 무슨 이야길 그렇게 썼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보통의’ 소소한 이야기였을 테다.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쓰기도 하고, 시를 써주기도 했다. 그렇다, 그때 난 한껏 문학소녀였다. 그러다 (가끔, 정말 가끔) 답장을 받는 날이면,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지갑 속에 넣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 언제부터인가 슬그머니 ‘좋아한다’는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고, 상대도 날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 ‘좋아함’의 형태가 다르다는 건 내심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남자친구 이야길 꺼냈을 때도 상처받지 않은 척했다. 심지어 마음에도 없는 “나도 남자친구 생기면 좋겠다” 같은 말을 하며 우린 이렇게 친구인 게 좋은 거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그 사람과 공통점을 더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학원에서 만난 어떤 남자애를 좋아하는 척하기도 했다(연기력이라곤 전혀 없는 나인데도, 그땐 그렇게 연기가 잘됐다. 퀴어의 생존 능력이 이렇게 대단하다).

 

그 정도로 좋아했음에도, 우리 사이가 ‘친구 이상의 무언가’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으니까. 그냥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많아지길 바랄 뿐이었다. 고백 같은 건 정말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중학교 생활이 끝나고, 여고를 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매점에서 마주친 어떤 사람에게 관심이 갔고, 그 사람이 누군지 찾아냈다. 운이 좋았던 걸까? 같은 반 친구의 동아리 선배였다. 그 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친구’ 이상의 무언갈 상상하진 못했다. 당시 학교엔 몇 반의 누구와 몇 반의 누가 화장실에서 뽀뽀했다더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이 될 자신이 없었다. ‘친구’라는 이름은 나를 드러내지 않는 보호막이기도 했다.


2021년 JTBC에서 방송된 드라마 〈알고 있지만〉은 주인공 유나비(한소희 역)의 이성애 로맨스가 중심이다. 지겹도록 봐온 이성애 로맨스일지라도 유나비는 무척 매력적이었지만, 그 이야길 하려는 건 아니다. 유나비의 같은 과 동기인 윤솔(이호정 역)과 서지완(윤서아 역)의 서사는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이야기의 등장이었다. 

 

솔과 지완은 중고등학교 동창인 걸로도 모자라 대학도 같은 곳에 다니는 ‘찐친’이다. 주변 모두가 인정하는 찐친이지만, 둘 사이엔 사실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솔은 지완이 남자와 소개팅하는 게 신경쓰이고, 친구들끼리 모여 하는 술게임에서 자신에게 뽀뽀하려는 지완의 모습에 당황해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그러곤 밖이 춥다며 자기 점퍼를 지완에게 입힌다. 이런 솔의 모습을 본 나는 ‘나 이거 뭔지 알아!!!’를 외치며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솔은 분명 지완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감정은 예고 없이 툭툭 튀어나온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솔의 모습을 보는 게 썩 즐겁지만은 않았다. 미래가 예상되니까. ‘쟤는 왜 하필 찐친인 헤녀(헤테로섹슈얼/이성애자 여성)를 좋아하는 거야. 바보야!’ 내 속은 이렇게 타들어가는데, 솔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지완은 솔을 가까이서 바라보며 “근데 솔아, 너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이런 말을 하면서 ‘헤녀력’을 뽐낸다.

아, 뒷골 땅기는 헤녀력. 그것은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때론 내 속을 뒤집기까지도 하는 것이었다. 퀴어 친구들끼리 모여서 “헤녀의 ‘헤녀력’엔 한계가 없다”는 농담을 가끔 하곤 하는데, 사실 반은 진담이다(어쩌면 90퍼센트 정도일지도). 헤녀력이란 간단히 말해서 헤녀다움, 정말 헤녀만이 ‘할 수 있는/해낼 수 있는’ 건데, 지완이 솔한테 한 것처럼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포인트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장난처럼’ 스킨십을 막 하면서 “네가 남자였으면 너랑 사귀었을 텐데. 호호호”하는 것, 덜덜 떨면서 네가 좋다고 고백했는데 해맑게 웃으며 “나도 좋아”라고 바로 대답해버리는 것. 고백을 받아줄 생각도 없으면서 나보다 더 엄청난 소유욕과 질투심을 발휘하는 것. 여자 연예인, 스포츠 선수, 유명인 등에게 “언니 나랑 결혼해!”를 외치지만 정작 현실 속 성소수자의 삶이나 동성혼 법제화 운동 등엔 ‘1’도 관심 없는 것 등.

 

지완은 헤녀력을 좀 더 뽐내며 솔을 좋아하는 남자를 경계하고, 솔이 정말 그냥 만나는 남자조차 질투한다. 그 정점을 찍은 건 학과 친구들이 모여 엠티를 갔을 때다. 술에 취한 지완은 자신을 방으로 데려다준 솔에게 손을 잡아달라고 한다. 그러곤 솔을 바라보며 “난 네가 제일 좋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넌? 넌 누가 제일 좋아?”라고 묻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속으로 ‘아이고, 아이고’를 외쳤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지완은 애절한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나만 좋아해라. 제발 나만 좋아해.” 그 순간 내 심장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완이도 솔을 좋아하고있었다······!

 

이때부터 내 가슴은 급격하게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솔과 지완은 허위 매물*이 아니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 무엇보다 이들이 내가 한 번도 넘지 못했던 ‘친구’라는 장벽을 넘어가려고 하는 모습에 대리 만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엠티 사건 이후 솔과 지완은 조금씩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용기를 보이기 시작한다. 친구로서가 아닌 다른 감정의 끌림을. 그렇게 솔과 지완이 친구에서 연인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며, 정말 오랜만에 로맨스에 과몰입했다. 자신의 진짜 감정에서 도망치지 않고 숨지도 않는 솔과 지완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다. 이런 이야기를 좀 더 일찍 볼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동성인 친구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해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면, 때때론 솔과 지완처럼 친구에서 연인이 되는 일도 생긴다는 걸 알았다면. 그럼 나도 다른 상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해서 이뤄지지 않은 나의 짝사랑들이 영 슬프기만 하거나 헛된 것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사랑의 대상이 친구였기에, 그래서 우정의 흔적이 남을 수 있었다는 건 행운이다. 친구우정이라는 이름은 때론 슬프고, 또한 무척 혼란스러웠으며, 그래서 종종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들이 내게 건네주었던 것도 사랑이었을 거다. 사랑의 형태가 한 가지만은 아니라는 걸, 난 참 어렵게 배웠다.

 

(책에서 계속됩니다.)


*퀴어 팬덤에서 쓰이는 이 말은 표현 그대로 가짜, 실제로는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퀴어 커플로서의 서사가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닌 경우를 말한다.

갈팡질팡 북디자인: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디자인 후기
🎨 가내수공업자

돈을 주지 않으면 디자인을 하지 않는, 나처럼 게으른 디자이너는 해보고 싶은 디자인을 실제로 하기가 쉽지 않다. 맘에 드는 무언가를 발견해서 디자인에 적용해보고 싶어도 그에 맞는 콘텐츠가 없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장식적이고 과감한 레터링을 좋아하지만, 우리 출판사에 그에 맞는 책은 거의 없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꼭꼭 접어 마음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이때다 싶을 때 꺼내 써먹어야 한다.
한때 디자인 팀장의 덕목 중 하나는 소장자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놓은 책 중에 책표지를 자수로 디자인한 책이 있었다. 디자이너 Paul Buckley가 만든 Penguin Threads 시리즈인데 모두 너무너무 아름답다. 
Paul Buckley가 디자인한 Penguin Threads 시리즈 중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The Wind in the Willows)의 앞표지와 표지 펼침면
이 시리즈의 백미는 표지 안쪽에 자수의 뒷면을 인쇄해 놓은 것이다.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이토록 아름다운 디테일이라니….
디자이너 유진아의 작업에도 자수로 글자를 수놓아 디자인한 책표지가 있다.
제목의 ‘진심’이란 단어와 한 땀 한 땀 자수로 수놓은 글자가 잘 어울린다.
자수로 표지를 디자인한 책들을 보면서 언젠가 써먹어야지하고 마음에 꼭꼭 접어놓았는데 이번에 드디어 써먹을 책이 나타났다.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너무나 자수로 제목 글자를 만들기에 적합한 책이 아닌가. 어쩜 글자수도 3-3-3으로 글자가 큼지막하게 들어가기 좋게 뽑아주었으니, 자수가 잘 보이는 크기로 글자를 넣어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두근두근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파주의 군부대 주변에는 용사의집이라는 군인용품점이 있는데, 그곳에는 즉석에서 궁서체로 이름표를 수놓아주시는 장인들이 계시다. 인터넷에서 서치해보니 오바로크로 예쁜 그림과 동기들의 이름을 수놓은 전역모 만들기 장인도 계시더라. 그런데 나는 오바로크 장인들이 수놓아주시는 글자보다 자수 땀이 잘 보이는 큰 크기의 글자가 필요했다. 고민하다가 컴퓨터 자수를 해보기로 했다. 책표지에 들어갈 글자를 만들어서 데이터를 자수 집에 보내고 다음날 실물을 영접하였다. 글자가 수놓아진 결과물이 생각하던 것보다 깔끔하게 나온 것을 보니 마음이 뿌듯하다. 책이 나오면 문산 〈청도 컴퓨터 자수〉 사장님께 한 권 보내드려야겠다. 

자수 글자 원본(J글월-Bold 95pt)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표지

🎨 《양림동 소녀》 알라딘 북펀드 소식 🎨
24회 제주국제장애인인권영화제 대상(2023), 24회 가치봄영화제 인권상(2023), 10회 춘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심사위원상(2023) 등으로 주목받아온 영화 〈양림동 소녀〉(오재형, 임영희, 2022)의 주인공 ‘임영희’의 이야기가 책 《양림동 소녀: 나의 오월이 시작되는 곳》을 통해 또다시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1956년 보배의 섬 진도에서 태어나 광주 양림동에서 생애 가장 뜨겁고 아름다웠던 순간을 맞이했던 임영희 작가님은 56세의 나이에 급성뇌졸중으로 장애를 갖게 된 뒤 코로나 시대를 보내며 크레파스와 사인펜을 집어들었습니다. 그렇게 ‘그림의 의식’이 시작되었죠. 마비된 오른손 대신 서투른 왼손과 함께 만들어진 그림들은 삶의 굵직한 마디마디에 새겨진 곡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광주로 유학 간 이야기, 그곳에서 문학과 글에 대한 꿈을 키우는 이야기, 그 꿈의 터전이 된 양림동에서 사회운동과 문화운동을 시작하고 5‧18에 시민군으로 참여하게 된 이야기, 노년이 되어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이야기를 담담하고도 명랑히 풀어냅니다. 이 생애 속에서 우리는 임영희라는 한 사람의 삶과 함께, 그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는 강렬한 인장을 남긴 역사의 한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다가오는 5월, 들여다보면 한껏 마음이 일렁이는 그림들 속에 담긴 한 사람의 찬란한 생 속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지 함께 나눠보고 싶어요.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북펀드 마감일: 5월 1일)

오래 산 존재들은 예외 없이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하지만 군대가 제 나라의 시민에게 총칼을 겨누어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던 현장에서 바로 다음 날 ‘그것을 보게 된 것이 태어나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고 말할 만큼 서로를 보살피는 아름답고 신성한 공동체가 나타난 역설처럼 나를 매혹시키는 이야기도 없다. 한 사람 안에서 복잡하게 교차하는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고통과 희열, 죄책감과 책임감, 기쁨과 슬픔, 끝과 시작이 어떻게 고유한 무늬를 만들어내는지 임영희의 경이로운 생애가 보여준다.

―홍은전, 《전사들의 노래》 저자/기록활동가

진도 여자아이 임영희, 양림동 소녀 임영희, 5·18 시민군 임영희, 5·18 생존 피해자 임영희, 엄마 임영희, 아내 임영희, 시인 임영희, 장애인 임영희, 할머니 임영희, 화가 임영희. 임영희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오른손잡이인 그가 급성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고 나서다. 아들이 선물한 크레파스를 왼손에 잡고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던 그는 나를 그려보자 생각했다. 광주에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배를 타고 고향인 진도를 떠나는 그림을 시작으로, 67여 년의 생애를 그림으로 풀기 시작했다. 이 ‘그림으로 치르는 의식’은 봄날 오후 임영희가 건네는 사과 한 조각이다. 그의 왼손의 온기가 묻어 있는 크레파스다.
ㅡ김숨, 소설가

임영희는 고통을 증언하는 것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신의 삶을, 그리고 광주 시민들이 만들어낸 ‘신성한 공동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경험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나이 칠십을 바라보며 지은 《양림동 소녀》로 세계를 다시 열었다. 이곳에서 여성, 장애인, 국가폭력의 생존자로서, 다시 한번 ‘모든 이를 위한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가자고 권유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5·18민주화운동의 피해 생존자들과 함께한다.
ㅡ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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