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골목 | 변종모
청춘이 꽃과 같고 인생의 찰나의 한때라면
훈자, 파키스탄 Hunza, Pakistan
다시 파키스탄 훈자Hunza였다. 두 번의 여름을 지낸 이곳에 다시 봄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로 기억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그야말로 그림 같은 마을. 아니다, 이 마을에 하루라도 머물러 본 사람이라면 그림보다 아름다운 마을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림보다 아름다운 봄의 훈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꼬박 한 달간의 봄을 지냈다. 아니, 살았다.
파키스탄의 최북단. 중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북인도의 경계를 이루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을 훈자. 삼월 말의 훈자는 봄이 아니다. 국가 간을 연결하는 도로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인 KKH(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를 관통하는 곳이니 봄도 더디게 올 것이다. 봄. 세상의 모든 따뜻한 감정들이 다 녹아 있는 그 단어를 되뇌며 나는 이곳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훈자에는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나는 이 눈발이 곧 꽃잎이 되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알고서 견디는 마음이 더욱 지루한 법.
이토록 꽃으로 일관된 세상이라니!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들이 있다. 훈자의 봄도 그랬다. 이 세상을 관장하는 누군가의 결재를 받은 것처럼 훈자의 봄은 갑자기 찾아왔다. 어느 꽃 한 송이가 갑자기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꽃들이 따라 피고 훈자는 새하얀 꽃의 세상으로 별안간 변한다. 한 번 시작된 개화의 아우성은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훈자에서 꽃은 막무가내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곳의 봄날이 더욱 짧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곳에서의 추억이 계곡처럼 깊게 새겨지는 이유가.
이토록 꽃으로 일관된 세상은 처음이었다. 이곳이 고향인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문을 연 숙소도 몇 되지 않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식당 때문에 불편한 나날들이 많았지만, 꽃이 피기 시작한 때부터 이 모든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일 꽃 속에서 꽃의 나날을 보내다 보니 나도 꽃처럼 순해졌거나 조금 아름다워져서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천지가 꽃이다. 때로는 꽃 속에서 인사하는 사람이 꽃이었다가 흔들리는 꽃잎이 이웃집 아이의 얼굴 같기도 했다. 가장 흔한데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꽃이다. 봄의 훈자에 피는 꽃은 마을의 주 수입원이 되는 살구꽃이 대부분이었고 체리꽃과 사과꽃, 아몬드꽃과 배꽃들이 비슷한 시기에 피어 어우러졌다.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튼실한 열매가 되는 날 또한 멀리 있지 않아서 사람들의 일상도 꽃의 속도에 맞춰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