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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309 세상의 모든 골목 | 변종모
 
 
 
 
 
 
 
 
 
 
 
 
 
곧 출간될 변종모 작가님의 『세상의 모든 골목』을 사전 연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골목 | 변종모


청춘이 꽃과 같고 인생의 찰나의 한때라면

훈자, 파키스탄 Hunza, Pakistan


다시 파키스탄 훈자Hunza였다. 두 번의 여름을 지낸 이곳에 다시 봄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아주 오래전부터였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배경이 되었던 마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어 하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아름답다는 이야기로 기억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그야말로 그림 같은 마을. 아니다, 이 마을에 하루라도 머물러 본 사람이라면 그림보다 아름다운 마을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림보다 아름다운 봄의 훈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꼬박 한 달간의 봄을 지냈다. 아니, 살았다.

  파키스탄의 최북단. 중국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북인도의 경계를 이루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마을 훈자. 삼월 말의 훈자는 봄이 아니다. 국가 간을 연결하는 도로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인 KKH(카라코람 하이웨이Karakoram Highway)를 관통하는 곳이니 봄도 더디게 올 것이다. 봄. 세상의 모든 따뜻한 감정들이 다 녹아 있는 그 단어를 되뇌며 나는 이곳에 도착했다. 그렇지만 훈자에는 희끗희끗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나는 이 눈발이 곧 꽃잎이 되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알고서 견디는 마음이 더욱 지루한 법.


이토록 꽃으로 일관된 세상이라니!


  어느 날 갑자기 오는 것들이 있다. 훈자의 봄도 그랬다. 이 세상을 관장하는 누군가의 결재를 받은 것처럼 훈자의 봄은 갑자기 찾아왔다. 어느 꽃 한 송이가 갑자기 꽃망울을 틔우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꽃들이 따라 피고 훈자는 새하얀 꽃의 세상으로 별안간 변한다. 한 번 시작된 개화의 아우성은 막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훈자에서 꽃은 막무가내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곳의 봄날이 더욱 짧게 느껴지는 이유가. 이곳에서의 추억이 계곡처럼 깊게 새겨지는 이유가.

  이토록 꽃으로 일관된 세상은 처음이었다. 이곳이 고향인 사람을 제외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문을 연 숙소도 몇 되지 않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식당 때문에 불편한 나날들이 많았지만, 꽃이 피기 시작한 때부터 이 모든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일 꽃 속에서 꽃의 나날을 보내다 보니 나도 꽃처럼 순해졌거나 조금 아름다워져서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천지가 꽃이다. 때로는 꽃 속에서 인사하는 사람이 꽃이었다가 흔들리는 꽃잎이 이웃집 아이의 얼굴 같기도 했다. 가장 흔한데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꽃이다. 봄의 훈자에 피는 꽃은 마을의 주 수입원이 되는 살구꽃이 대부분이었고 체리꽃과 사과꽃, 아몬드꽃과 배꽃들이 비슷한 시기에 피어 어우러졌다. 작은 꽃잎 하나하나가 튼실한 열매가 되는 날 또한 멀리 있지 않아서 사람들의 일상도 꽃의 속도에 맞춰 움직인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정은 자연의 변화에 맞춰져 있는 듯했다. 겨우내 묵었던 살림을 봄바람에 털어내는 동안에도 꽃잎은 지천으로 날렸고 농부들이 부지런히 밭을 일구는 동안에도 꽃밭은 더 흐드러졌다. 아이들은 꽃 속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노인들은 머리 위에 꽃잎을 이고 햇볕이 따뜻하게 드리우는 담벼락에서 세상을 잊은 듯 졸았다. 그 풍경을 보는 내 마음은 꽃의 내부처럼 밝았다.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평화가 날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지고 이어졌다.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난 삶을 산다는 것만으로도 천국이 되기도 하다니! 자연의 가장 깊고 내밀한 곳에 속한 삶. 이 척박한 산중이 세계 3대 장수마을 중 하나인 이유도 그게 전부가 아닐까. 대단한 음식도 없고 편리한 시설도 없으며 풍족한 것이라곤 오로지 자연이 주는 것뿐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제 몸을 스스로 움직여 땀 흘리고 사는 삶이 본연의 삶으로 알고 있다. 까마득히 솟아오른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이 땅을 적시며 흐른다. 시끄러운 소리라고는 고작해야 새들이나 염소들이 우는 소리가 전부인 고요한 마을. 정전이 되는 밤이면 별빛이 오히려 더 찬란하게 빛난다. 이곳의 누군가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도시로 나가기도 하겠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이곳만의 정서는 잊지 못할 것이다. 오직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나열할 수 있는 곳이 훈자이고, 그런 것들을 감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훈자라는 마을이다.

  사계절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말하며 품는 삶은 사람들의 표정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훈자에는 꽃잎 같은 아이들도 많지만, 아이의 얼굴처럼 맑고 밝은 얼굴을 가진 노인들도 많다. 그래서 이곳은 걷기만 해도 배움이 되고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해도 교훈이 된다. 훈자를 다녀간 많은 여행자들이 경치에 대해서 말하다가도 끝내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무래도 사람은 자신이 사는 곳을 닮는 것이 아닐까. 만약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여기, 해마다 꽃이 사태 지는 이곳이었으면 싶다.

꽃의 역할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


  깊은 산중의 봄은 길지가 않았다. 무차별적으로 다가오던 봄이 어느새 무참하게 떠나가고 있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가슴 속으로 금이 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등 뒤로 꽃이 지고 햇빛 찬란한 대낮에도 별빛처럼 새하얗게 흩날린다.

  꽃의 역할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골목에 뿌려지는 새하얀 살구 꽃잎을 밟으며 잠시 어머니 생각을 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 사과꽃이었는지 배꽃이었는지 무슨 꽃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에 어머니의 머리 위로 소복하게 내려앉았던 것이 분명한 그 꽃잎을 훈자의 할머니가 이고서 간다. 골목을 돌아 텃밭을 지나 저 멀리, 살구꽃은 설산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사라진다. 그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잠시 게으름을 피우다가, 그러다가 마당을 내려다보면 또 금방 눈처럼 쌓인 꽃잎들. 바람아 불지마라. 누구도 이 꽃잎을 흔들지 마라.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욕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 봄날을 그들과 함께 오래오래 지내다 보면 조금이나마 닮을 수 있을까. 날마다 홀로 걸었지만 단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던 골목들. 그대, 세상에 지쳐 더 이상 걷지 못하겠다 싶으면 이곳으로 와서 봄의 골목을 천천히 걸어보시라. 걷다 보면 느려질 수밖에 없는 골목들. 그대의 발목을 잡는 모든 것들이 그대를 아름답게 할 것이니.


  봄, 훈자의 골목을 걷는다면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세상은 또 왜 이리 아름다운지 알게 되리라. 골목을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알게 되리라. 청춘이 꽃과 같고 인생의 찰나의 한때라면, 이곳에서 청춘과 인생을 조금 더 길게 살아보시라. 꽃이 세상에서 가장 흔한 곳. 그래서 나도 꽃이 되는 곳. 훈자로 꽃을 밟으러 가자.

📌 훈자에 가고 싶다면

훈자의 살구꽃 피는 시기는 서울의 벚꽃 피는 시기와 비슷하다. 인도 홀리 축제가 끝나고 천천히 파키스탄 북쪽으로 이동한다면 두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맞이할 수 있겠다. 이때는 겨울의 끝이라 준비해야 할 것들이 조금 있다. 난방이 열악한 이곳의 사정에 맞춰 방한 준비는 필수다. 이른 봄은 여행자들의 방문이 뜸한 시기라 문을 연 식당도 먹거리도 많지 않다. 그래도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의 대부분은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이동하는 사람은 기본 스물네 시간 이상을 생각해야 하며, 길기트까지 비행기가 있으나 꼭 뜬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장 많이 준비해야 할 것이 시간이고 인내다. 바랄 것이 있다면 ‘행운’이다. 친절하고 순한 훈자마을 사람들 사이를 꽃밭을 걷듯 걷고 싶다면, 예의 바른 여행자의 마음가짐 또한 가장 먼저 챙겨야 할 덕목이다.

변종모 | 오래도록 여행자

쓴 책으로 당분간 나는 나와 함께 걷기로 했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같은 시간에 우린 어쩌면』 등이 있다. 지금은 길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유튜브 ⟨모처럼, 여행⟩(https://www.youtube.com/@maldive9)에서 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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