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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ip | 여행을 하는 것은


여행을 하는 것은 시시각각으로 태어났다 죽었다 하는 것이다. 아마 그는 자기 정신의 가장 어슴푸레한 구석에서 이 변화하는 지평과 인간의 삶을 견주어 보았으리라. 인생의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우리들 앞에서 사라져 간다. 어둠과 빛이 교차한다. 밝음 후에는 어둠이 온다. 사람은 보고, 서둘고, 손을 뻗쳐 지나가는 것을 잡는다. 사건 하나하나가 길의 굽이다. 그리고 사람은 순식간에 늙는다.

- 빅토르 위고, 레미제라블』 중에서

📄 1일 3매 |  최갑수

함덕에서 보낸 사흘

함덕에서 보낸 사흘 동안, 글을 썼다. 일을 했다. 아침 8시면 숙소 근처 바다가 보이는 카페로 가 노트북을 열었다. 지난주 다녀온 강진에 관한 여행 원고를 썼고, 3월에 여행한 후쿠오카의 이자카야에 관한 글을 썼다. 그리고 매일 새벽마다 레터를 보냈다.


글을 쓰다 가끔 고개를 들면 바다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해변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나는 뻣뻣해진 목을 돌리고, 왼팔로 쇠약해진 오른쪽 어깨를 주물렀다. 빗방울이 묻은 창밖을 보고 있으면, 노를 잃어버린 배 위에 걸터앉아 물살의 흐름만 어쩔 수 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염없었다.


써야 할 원고를 다 쓰고는 샌드위치를 먹거나 국수를 먹었고 해변을 산책했다. 비는 계속해 내렸지만, 그렇다고 우산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비는 내 얼굴에 빗금을 몇 개를 황급히 긋고는 사라졌다.


바다 끝 일렁이는 수평선 위에는 짙은 먹구름이 떠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얼굴처럼 보였다. 그 먹구름 아래에서 나는 어떤 존재가 나를 읽고 있다는 생각을 문득문득 하기도 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펼쳐진 책이 아닐까. 술과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살지만 술과 여행이 이젠 지겨워진 어떤 삶에 관한 책. 그 얼굴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떠 있었는데…….


해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슬그머니 저녁이 되었고, 상가에 하나둘씩 불이 켜졌다. 내가 탄 배는 흘러, 흘러가 어느 기슭에 닿을 것인가. 기다란 장대를 가진 노인이 기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슭에 닿으려는 순간, 내가 탄 배를 다시 물살 속으로 힘껏 밀어 넣지는 않을까.


숙소로 돌아가는 길, 후배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 글 잘 읽었어요. 고마워 라고 짧게 답장을 보냈지만 어제 어떤 글을 썼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글을 잘 쓴다는 건,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돈을 많이 번다는 건, 좋은 인생을 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란다. 우리에겐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거든.


함덕에서 보낸 사흘, 여행과 일을 오가는 동안 비는 내렸고, 파도는 어제와 똑같은 포즈로 밀려왔다. 장대를 든 노인은 깜빡 잠이 들고, 어느 날 운 좋게 닿은 강기슭에는 조그만 술집 하나가 있어 따뜻한 술 한잔 마실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거면 충분하련만. 내일 돌아가는구나. 나는 빗금이 그어진 얼굴로 점멸하는 술집 간판 아래를 오래도록 서성였다. ✉️

최갑수는 시인이자 여행작가자 편집자다. 쓴 책으로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그의 인스타그램 @ssuchoi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 혼자라는 즐거움 |  류진

사과 한 알이라는 ‘멍’상

발리에 왔다. 혼자서. 반년 동안 고대하던 여행인데 출국 직전 변덕이 끓어올랐다. 난생처음으로 여행 중단 욕구가 치밀었다. ‘가지 말까?’ 흔들리는 마음. 환불 불가를 조건으로 건 특가 호텔에 예약한 탓에 가지 않으면 생으로 내다 버리게 될 내 피 같은 돈이 아까웠다. “발리라니. 좋겠다.” 하며 부러운 마음 투척한 친구들의 눈빛, 할머니와 엄마 아빠가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준 용돈(=사랑)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 가기 싫어 밍기적거리다 결국 이륙 직전 탑승 게이트에서 ‘파이널 콜’을 외칠 때 겨우 비행기에 올랐다.

 

웬일로 앞자리를 얻는 데 성공해서 ‘그나마 좀 낫군...’ 했는데 어째 기분이 좀 이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머리가 붙은 채로 태어난 샴쌍둥이처럼 서로의 어깨에서 좀처럼 귀를 떼지 않는 신혼 여행객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아…….


70시간 같은 7시간 동안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열 번쯤 했다. 여행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광인으로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마음이다. 옥시토신 분비가 최고조 상태인 ‘갓 결혼한 커플’ 틈바구니에서 조금(은 무슨. 많이!) 외롭긴 했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도착하면 괜찮아지겠지. 날이 밝으면 이 출처를 알 수 없는 우울감과 불안감이 좀 사그라들겠지. 자정 넘어 도착한 호텔에서 수영 후 먹으려고 챙겨 간 컵라면으로 센티멘털한 마음을 겨우 달래고 억지로 눈을 붙였다.

 

열대 섬의 강렬한 아침 볕이 간밤에 살짝 열어 둔 암막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새 떠드는 소리에 눈을 떴고, 야자수가 창밖으로 일렁이는 풍경을 보기 위해 팅팅 부은 몸을 일으켰다. 이 장면 앞에 서려고 여기까지 왔으니 더 자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이겨내야지. 발코니로 나가 어제 물과 함께 사둔 사과를 꺼내 우걱우걱, 정성스럽게 씹어 먹었다. 사과 한 알을 다 먹는 동안 사과 맛과 저작근 운동에 집중하느라 핸드폰을 한 번도 안 만졌다. 그 덕에 고작 사과 한 알 먹는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사과 씹는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웠나? 같은 쓰잘머리 없는 생각이나 하면서 내내 시선을 흰머리와 갈색 몸을 가진 이름 모를 텃새에, 윤슬이 반짝이는 수영장에,  그 안에서 아침부터 극성맞게 떠들며 물놀이하는 애들의 천진한 얼굴, 그리고 야자잎이 휘엉청 흔들리는 허공에 던졌다.

 

혼자 오니 이런 게 좋구나. 사과 씹는 소리를 BGM 삼아 한참 멍을 때려도 되는 거.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보는 거.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나를 완전히 던지는 거. 산통 깨는 잡음을 내며 나의 귀하디귀한 ‘멍상’을 방해하는 존재가 없는 거. “야. 뭐 하고 있어. 빨리 나갈 준비 해야지.” 채근하는 목소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거. 오늘 뭐 할지 아무 계획도 없는 상태지만 그래도 괜찮은 거. 이럴 거면 뭐 하러 발리까지 왔어? 집에서 멍때리지.’ 하고 핀잔 날릴 인간이 없다는 거. 어제까진 ‘내가 다시는 혼자 휴양지 오나 봐라.’ ‘늙나? 왜 이렇게 불안하지?’ 따위의 생각들로 뇌가 분주했는데. 아침에 누린 잠깐인데 영겁 같았던 ‘멍’ 덕에 그 생각이 쏙 들어갔다.

 

와이파이가 잘 터지지 않는 숙소를 벗어나 호텔 근처, 발리 산 커피콩을 직접 볶는다는 카페를 찾아 나섰다. 불행히도 첫 일정은 일. 서울에서 끝마치지 못하고 온 일이 아귀를 쩍 벌리고 있는 탓에 아침 아홉시부터 오후 네시까지 노트북 앞을 떠나지 못했다. 창밖으로 남들 노는 장면이 자꾸 시선에 들어 고통스러웠지만, 인내심을 발휘했다. 우여곡절 끝에 ‘오늘 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일’을 다 마치고 이제 밖으로 나간다. 발리식 백반이라는 ‘나시 짬뿌르’ 맛집을 구글맵에 찍어둔 것 말곤 여전히 아무 계획도 없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지, 뭐. ‘혼자 하는 여행이 대체  뭐가 그렇게 좋지?’ 하고 자문했을 때 내놓을 수 있는 답이나 좀 찾으면서. 언제 또 남들은 짝이랑, 가족이랑, 친구랑 함께 오는 휴양지에서 혼자 궁상떨어 보겠어? 머무는 동안 내가 찾아낼 답이 뭔진 모르겠지만 주책맞게 자꾸만 울렁대는 마음. 사실 귀국까지 열 하룻밤이나 남아서, 그게 제일 떨린다. ✉️

류진은 패션 잡지와 여행 잡지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다가 내 시간을 내 뜻대로 쓰고 싶어서 프리 워커가 됐다. 그게 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후엔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삶을 잘 꾸리기 위해 더 많이 보고, 읽고, 겪고, 쓰고, 부딪히며 산다.  @nomad_ry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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