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ords |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젊은 시절 무모하게 도전한 적이 많았습니다. 물론 실패한 적이 많았죠. 그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실패한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겁니다. 다음엔 이렇게 해봐야겠다 하고 생각했죠.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처음부터 걸음마를 시작한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를 경험하고,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성공하는 거죠. 지금 후회가 되는 건, 그때 실패했던 것들이 아니라,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단 해보자, 뭐라도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일단 시도해 봅니다. 안되면 그뿐이니까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니까요.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바라봅니다. 결핍과 실패의 날들 속에 서 있네요. 그 지친 어깨가 더 나은 나를 만들고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어느새 아침이 밝아옵니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꼭 보듬어 안아 줍니다. 3월이 되었고, 봄이 왔습니다.

🍳 오늘의 요리 |  최갑수

단호박 샐러드 샌드위치, 내 마음에 노란 점 하나 찍는 일

가스레인지 위에 항상 올려져 있는 것이 있는데, 바로 찜기다. 직경 28cm의 커다란 스테인리스 찜기는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조리도구다. 젊은 시절엔 프라이팬을 가장 많이 사용했지만, 중년이 된 지금은 찜기를 자주 사용한다. 이젠 콩기름, 현미유, 카놀라유가 부담스럽다. 음식을 만들 때, 먹을 때도 속이 편한가를 먼저 생각하는 나이가 됐다.


평소에 많이 먹는 편은 아니다(술은 빼고). 평소 집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밖에서 외식할 때만 먹는다. 대신 일요일에 쇠고기를 챙겨 먹는다. 금요일에는 연어회를 먹고, 토요일에는 파스타를 만든다. 평소에는 주로 채소를 먹는데, 많이 먹는 건 양배추와 당근, 단호박, 양파다. 양배추는 된장국에 넣거나 찐다. 당근은 채를 잔뜩 썰어 보관 용기에 담아 두고 국에도 넣고, 샐러드에도 넣는다. 두껍게 썰어 찐다. 단호박도 찐다.


새벽에 일어나 에스프레소에 초콜릿을 먹고 레터를 보낸 후 현미밥과 국, 채소 반찬 한두 가지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한다. 그리고 도시락을 싼다. 도시락은 찐 당근과 찐 단호박 각각 반 개씩. 그리고 찐 계란 두 개. 이건 다 만드는 데 딱 15분이 걸린다. 찜기에 물을 붓고 김이 피어오르면 당근과 단호박, 계란을 찜기에 넣으면 된다. 찜기가 열심히 김을 뿜어내는 동안 아침 식사를 한다. 식사를 마치고 접시를 씻은 후, 도시락에 찐 계란과 당근, 단호박을 넣고 사무실로 향한다.


사무실에서는 바쁘다. 해야 할 일이 쌓여있다. 혼자 일하니 혼자 다 처리해야 한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여유가 있었는데, 일이 몸에 익으니 바빠졌다. 해야 할 일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이 없는 사람은 정말 일이 없거나, 일을 미루고 있거나, 일을 못 하는 사람 중 하나다.


이 일 저 일 하다 보면 점심 챙겨 먹을 시간이 없다. 게다가 내 작업실이 있는 파주 출판단지 부근에는 밥 먹을 만한 곳이 마땅치가 않다.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상당히 귀찮은 일이다. 언젠가 힘든 건 참지만 귀찮은 건 못 참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 대충 먹는데, 단백질 바만 먹다가 이게 아니다 싶어 도시락을 싸다니기 시작했다.

도시락으론 주로 찐 채소와 계란을 싸가는데, 가끔 단호박 샐러드 샌드위치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나가는 날엔 그냥 찐 계란을 싸가는 날보다 ‘뭔가 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을 하는 데는 이런 느낌이 중요하다.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설 때의 기분이 하루를 좌우할 때가 많다. 매일 싸가는 도시락 메뉴 하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누군가 등을 살짝 밀어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단호박은 늦여름이 제철이지만, 요즘은 뭐 제철이 따로 없다. 사계절 난다. 나는 주로 쿠O에서 미니 단호박을 산다. 손질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먼저, 베이킹소다로 단호박을 씻어 비닐봉지에 넣고 전자레인지에 2분간 돌린다. 이러면 껍질이 물러져 자르기가 편하다. 전자레인지에서 꺼낸 단호박은 꼭지를 떼고 8~10등분 해서 찜기에 넣고 찐다. 계란 5개도 같이 넣는다. 타이머는 7분(단호박)과 12분(계란 완숙). 요즘엔 단호박을 전자레인지에 많이 찌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찜기가 좋다. 전자레인지라는 녀석, 사용하기엔 편하지만 뭔가 잔꾀를 부리는 녀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 카톡이나 메일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보다 전화 통화가 편하고, 아이패드보다는 몰스킨이나 리갈 패드가 낫고, 뜨거운 김을 씩씩하게 뿜으며 열심히 일하는 찜기가 더 믿음직스럽다.


찜기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양파를 다진다. 양파는 미리 식초 물에 담가 매운맛을 빼줘야 한다. 사과를 넣어주면 좋지만, 귀찮아서 패스. 찐 단호박과 달걀, 양파 다진 것을 볼에 넣고 포크로 으쌰으쌰 으깬다. 이때 마요네즈 한 숟가락을 넣는다. 소금과 후추도 살짝. 나는 단호박 껍질도 다져 넣는 편이다.


오늘 새벽 6시, 늦잠을 자 부랴부랴 이 글을 쓰고 있는데, R 셰프가 카톡으로 슬라이스 오이를 넣으라고 한다.  “형님, 요즘 대세는 오이 샌드위치에요. 슬라이스 오이를 올리고 그 위에 크림치즈. 영국 여왕도 즐겨 먹었다고 합니다.” 안 돼. 오이는 김밥에는 되지만, 샌드위치에는 안 돼. 음, 그러고 보니 나는 오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R아, 다음에 네가 맛있게 하나 만들어줘봐봐.


자 이제, 식빵 위에 루콜라 페스토를 살짝 바르고 단호박 샐러드를 골고루 넉넉하게 펴서 바른다. 그 위에 양파 슬라이스를 토핑. 그런 다음 식빵을 조용히 덮어주면 완성이다. 단호박 샌드위치는 으쌰으쌰 두 번만으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다.


점심시간이다. 샌드위치를 꺼내 모니터를 바라보며 먹는다. 안약도 넣는다. 맛은 잘 모르겠다. 그냥 먹을 만한 단호박 샐러드 샌드위치다. 점심은 점심일 뿐이다. 점심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기보다는 허전한 속을 채우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점심이란 원래 아침과 저녁 사이 간단하게 먹는 끼니다. 글자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듯 조금 먹는 음식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스님들이 새벽이나 저녁 공양 전에 뱃속에 점 하나 찍을 정도로 간단히 먹는 음식’을 말한다. 뎬신(點心)이라 부른다. 제대로 된 점심은 우판(午飯)이라 한다.

후다닥 샌드위치를 해치웠다.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하냐고 안쓰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일할 때는 좀 몰아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워라밸’ 같은 건 없다. 일단 전력을 다해 보자. 평생 동안 전력을 다하라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할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래야 할 때라는 것이다. 나중에 할 후회가 뻔히 보이니 한가롭게 있을 틈이 없다. 지나 보니, 그때가 아니었으면 하지 못 할 일이 많았다는 걸 알았다.


단호박 샐러드 샌드위치를 만들어 사무실에 나올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 1권이 팔리지 않으면 10권이 팔리지 않는다. 10권이 팔 수 없는데 어떻게 100권을 팔 수 있을까. 이게 비즈니스의 진심이다. 요리사 R이 내가 이번에 만든 책 『돈과 나와 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리사에게 진심은 돈이다. 돈과 꿈을 같은 높이에 두어야 한다’라고. 나는 가식이 단 1g도 들어 있지 않은 이 말이 너무 좋다. 이 말은 작가가 영혼을 다해 좋은 작품을 써보겠다는 것과 단 1mm도 다르지 않다. 자, 마음에 노란 점 하나를 찍고 다시 키보드 앞으로. ✉️

최갑수는 시인이자 작가다. 시집 『단 한 번의 사랑』과 에세이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어제보다 나은 사람』 등을 펴냈다. 그의 일과 일상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ssuchoi를 들여다 보자.

📎 Clip | 부산 중앙동 노포 3곳


📌 여행잡지 『트래비』가 부산 중앙동 노포 3곳을 추천했습니다. 부산으로 여행가실 분들은 참조.

중앙모밀 (051-246-8686)
65년을 넘긴 식당이다. 모밀국수, 특오뎅우동, 새우튀김우동, 반반 초밥(유부&김)이 추천 메뉴. 유부초밥과 김초밥, 반반 초밥은 4,000원이다. 1인당 7,000~1만원이면 면 요리 하나와 초밥을 즐길 수 있는 셈이다. 모밀국수는 두 판이 나와 양이 꽤 넉넉하다. 달콤하면서 멸치 향이 나는 국물에 겨자를 풀고 면을 듬뿍 담가 먹으면 술술 넘어간다. 찰기가 있는 편이라 씹는 맛이 좋은 것도 특징이다.
중앙식당 (051-246-1129)
횟밥을 낸다. 횟밥은 회를 메인으로 하는 백반이다. 데친 오징어, 가자미구이를 포함해 여러 반찬이 나오고 여기에 숙성 광어회와 밥, 국이 더해진다. 찰진 식감의 광어회와 고슬고슬 윤기 나는 쌀밥의 조합도 으뜸이다. 1972년부터 영업을 시작했으니 50년을 막 넘겼다. 광어회, 생대구탕, 대구양념구이, 회비빔밥, 생뽈 등의 메뉴도 있다. 
뚱보집 (051-246-7466)
매콤한 향이 일품인 주꾸미구이와 보쌈을 필두로 장어구이, 두부정식, 록빈, 콩나물밥이 준비돼 있다. 가격도 비교적 착한 편. 주꾸미와 보쌈 등 대표 음식이 1만8,000원이다. 안주 하나로 소주 1~2병은 비울 수 있으니 꽤 괜찮다. 연탄 향 솔솔 나면서 매콤달콤한 양념이 매력적인 주꾸미구이가 일품. 새우빈대떡인 '록빈'도 먹어보자. 양파와 새우 등이 들어가고 튀기듯이 지져서 그런지 고소한 맛이 강하다. 1982년부터 영업을 했으니 어느덧 40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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