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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스키에 진심입니다 |  고현

삿뽀로와 블랙 니카

도시의 랜드마크는 대개 건축물이나 조형물인 경우가 많지만, 때로 광고판이 그 역할을 대신할 때가 있다. 대표적인 게 오사카의 글리코상. 두 팔 벌려 골인하는 마라토너 캐릭터를 형상화한 제과 회사 글리코의 이 네온사인은 1935년 이래 오사카의 마스코트처럼 자리매김하며 관광객의 필수 인증샷 스폿이 됐다. 랜드마크 광고판을 하나 더 보태자면 삿포로의 니카상을 빼놓을 수 없겠다. 삿포로 최대 번화가인 스스키노 사거리에 불 밝힌 화려한 네온사인 중 유독 시선을 끄는 할아버지 광고판 말이다.


나 역시 처음 삿포로를 찾았을 때 니카상 광고를 열심히 사진으로 남겼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새긴 술잔을 든 할아버지 자체가 포토제닉했고, 눈으로 뒤덮인 삿포로의 겨울과 묘하게 잘 어울리는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위스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때라, 니카가 일본 위스키의 양대 산맥이란 사실조차 몰랐다. 공항 면세점에서 니카상이 새겨진 위스키가 저렴한 가격으로 팔고 있길래 기념품 삼아 1병 구입했을 뿐.


당시 내가 산 위스키는 블랙 니카 스페셜. 가격이 워낙 저렴해(15,000원 이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꽤 맛있게 마셨다. 첫 잔은 니트로 마시고 이후에는 얼음을 넣은 온더록이나 하이볼을 만들어 마시면서 순식간에 1병을 비웠다. 병은 버리지 않고 장식장 한구석에 진열해 뒀다. 검정 사각 병의 디자인 자체가 다른 위스키 병들과 다른 미감으로 느껴지는 데다, 흐뭇한 표정의 니카상을 바라보면 삿포로 여행의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훗날 니카상의 정확한 이름이 ‘킹 오브 블렌더스’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스코틀랜드의 전통 복식을 한 위스키의 왕 왼손에는 몰트 위스키의 주재료인 보리가, 오른손에는 위스키 잔이 쥐어져 있다. 니카는 ‘일본 위스키의 대부’라 추앙 받는 타케츠루 마사타카가 세운 위스키 브랜드다. 대대로 사케 양조장을 운영해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우연한 기회로 스코틀랜드 유학을 떠났고, 위스키의 본고장에서 증류소 마스터까지 맡을 만큼 스카치위스키에 흠뻑 몰입된 삶을 이어갔다. 1920년 스코틀랜드인 아내와 함께 일본으로 귀국한 다카츠루는 주류 회사 산토리의 권유로 일본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야마자키를 세우게 된다. 증류소 설비 전반의 설계를 도맡은 그는 산토리와 의견 대립으로 차츰 사이가 틀어졌고, 1934년 홋카이도 요이치로 건너가 직접 니카라는 이름을 내건 증류소를 설립했다. 일본 위스키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산토리와 니카 위스키는 결국 모두 다케츠루 마사타카의 손길을 거친 셈이다.  


위스키에 부쩍 관심이 생긴 이후 삿포로를 한 번 더 찾은 적이 있다. 영상 촬영을 겸한 출장이라 일정이 꽤 빡빡했는데, 출국 전날 저녁 즈음 살짝 짬이 났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니카상 광고판이 있는 스스키노 사거리로 향했다. 광고판 너머에는 니카에서 운영하는 이름도 직관적인 ‘니카 바’가 자리하고 있기에. 그곳에는 니카에서 생산하는 위스키를 종류별로 시음해 볼 수 있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약 1시간 30분 걸리는 니카의 요이치 증류소를 방문하기 힘든 나와 같은 사람에게 니카 바는 최선의 선택지인 것이다. 바에서 니카의 블렌디드 위스키와 요이치 싱글몰트 위스키 15년을 1잔씩 주문했다. 산토리의 야마자키가 부드럽고 화사한 풍미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면, 니카의 요이치는 좀 더 스카치 위스키의 본연에 가깝도록 거칠고 매캐한 향이 풍긴다. 야마자키에 비해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요이치에 좀 더 끌린다. 


산토리든 니카든 요즘 일본 위스키는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권위 있는 위스키 평론가와 어워즈에서 일본 위스키가 꾸준히 거론되며 마니아층을 만들어 냈고, NHK에서 다카츠루 마사타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 <맛상>을 방영한 이후 일본 자국 내 위스키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 하는 상황에 이르자 몇 년 전 10만 원에 사둔 일본 위스키가 순식간에 100만 원을 호가하는 고급 위스키의 반열에 올라버리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흔히 위스키의 엔트리급이라 평가받는 12년 숙성 위스키조차 이제는 쉽게 만나기 힘들고, 15년 이상 숙성 위스키는 수십 배 이상의 가격표를 달고 암암리에 거래되는 실정. 산토리와 니카는 궁여지책으로 숙성연도를 표기하지 않는 ‘NAS(No age statement)’ 버전의 위스키를 내놓기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엄청난 인기와 함께 원액을 차츰 고갈시키는 중이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면세점에서 일본 위스키를 1병 골랐다. 당시만 해도 요즘보다는 공급 형편이 나은 상황이라 선택지가 꽤 넓은 편이었는데, 하필 내가 고른 위스키는 블랙 니카 스페셜. 처음 마셨을 때의 좋은 기억으로 별생각 없이 골랐는데(가격도 여전히 15,000원 정도), 그 녀석은 니카에서 산토리 가쿠빈에 대항해 만든 보급형 위스키라 일본 위스키의 품귀 현상과 무관했다. 한국에 정식 수입되지 않아 일본에서만 구입 가능한 희소성 정도만 있을 뿐.


나는 두 번째 블랙 니카 스페셜은 개봉하지 않은 채 작업실 한쪽에 진열해 두었다. 혹시라도 이 녀석이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어나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뛰길 기대하는 걸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게 확실하다. 그저 가끔씩 위스키를 들고 있는 니카상과 눈이 마주칠 때면 이제는 만날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 요이치 15년의 맛을 한 번씩 떠올려 본다. 그러곤 생각한다. 그때 난 왜 면세점에서 요이치 15년을 사두지 않은 걸까. ✉️

고현은 낮에 글을 쓰고 밤에 위스키의 세계로 안내하는 공간 운영자다. 작업실이자 위스키 시음실로 사용하는 무용;소(@mooyongso)에서 위스키와 취향을 매개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 작가의 생각, 기획자의 마음 |  최갑수

강진에서

강진에 왔다. 농가에서 민박을 하고, 스물다섯 가지 반찬이 올라간 상을 받고, 갑오징어 회를 먹었다. 보리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책을 했다. 멀리 고금도가 보였다. 월출산이 보이는 찻집에서 햇차를 마시고 점심을 먹은 후 호텔로 돌아와 잠시 낮잠을 잤다. 해 질 무렵 읍내로 나가 술을 마셨다. 숙소로 돌아오며 좋은 하루였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새벽이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말고 손톱을 깎는다. 손톱을 깎으며 술에서 깬다. 이게 여행이고, 이게 생이다. 여행은 신비롭지 않고, 생은 찬란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데 이십 년이 걸렸다. 이젠 국밥을 먹을 때 따로 먹지 않고 밥을 말아 먹는다. 그게 국밥이라는 걸 아는  데 삼십 년이 걸렸다. 그리고 인생의 진실이 단 한 문장 속에 있다는 걸 아는 데 오십 년이 걸렸다.


여행을 하며 손톱이 자라고, 여행을 하며 사랑을 잊고, 여행을 하며 늙어가는 어느 인생이 창밖을 보고 있다.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지만 애써 찾지 않기로 한다. 어떤 최선은 잊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잘려 나간 손톱을 티슈로 싸서 휴지통에 버린다. 어느 날, 좋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

최갑수는 작가다. 쓴 책으로 『어제보다 나은 사람』 『음식은 맛있고 인생은 깊어갑니다』 등이 있다. 그의 일과 일상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ssuchoi를 들여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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