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1

가장 짧은 문장으로 가장 긴 여운을 주는 詩! 시는 ‘영혼의 비타민’이자 ‘마음을 울리는 악기’입니다. 영감의 원천, 아이디어의 보고이기도 합니다. 눈 밝은 CEO는 시에서 ‘생각의 창’을 발견합니다. 한국경제 논설위원인 고두현 시인이 금요일 아침마다 ‘영혼의 비타민’을 배달합니다.
고두현 시인(한경 논설위원 / kdh@hankyung.com)


겨울밤
눈보라가 휘몰아쳤지.
세상 끝에서 끝까지 휩쓸었지.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여름날 날벌레 떼가
날개 치며 불꽃으로 달려들듯
밖에서는 눈송이들이 창을 두드리며
날아들고 있었네.
 
눈보라는 유리창 위에
둥근 원과 화살들을 만들었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 비친 천장에는
일그러진 그림자들
엇갈린 팔과 엇갈린 다리처럼
운명이 얽혔네.
 
그리고 장화 두 짝
바닥에 투둑 떨어지고
촛농이 눈물 되어 촛대서
옷 위로 방울져 떨어졌네.
 
그리고 모든 것은 눈안개 속에
희뿌옇게 사라져 갔고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틈새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 날리고
유혹의 불꽃은
천사처럼 두 날개를 추켜올렸지.
십자가 형상으로.
 
눈보라는 2월 내내 휘몰아쳤지.
그리고 쉬임없이
식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 러시아 시인이자 소설가.  

 소설과 영화로 유명한 『닥터 지바고』를 그대로 압축해놓은 듯하죠? 
 이 시 ‘겨울밤’의 배경은 암흑 속의 러시아 혁명기입니다. ‘눈보라’는 시베리아까지 휘몰아친 혁명의 소용돌이를 상징하지요. ‘촛불’은 시대의 광풍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개인의 삶을 의미합니다.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엇갈리는 ‘운명의 그림자’는 소설 주인공인 유리와 라라를 닮았습니다.

 당국 압박에 노벨상도 거부해야 했던…
 비운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삶도 그랬지요. 그의 본업은 소설가라기보다는 시인이었습니다. 『닥터 지바고』는 그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죠. 혁명기 젊은이의 방황과 고독, 사랑을 서사적으로 그린 이 소설로 그는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지만, 소련 당국의 압박으로 수상을 거부해야 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톨스토이의 『부활』 등 소설에 삽화를 그린 유명 화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죠. 어릴 때 음악가를 지망한 그는 철학으로 방향을 틀어 모스크바대를 졸업하고 독일 마르부르크대로 유학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러 간 그곳에서 시인 릴케를 만나 오래 교류했지요. 나중에는 자전소설 『안전통행증』을 릴케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귀국한 뒤에 촉망받는 순수 예술파 시인으로 성장했지만, 혁명정부 눈에는 달갑게 보이지 않았지요. 1933~1943년에 쓴 작품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거리가 있어서 출판하지도 못했습니다.

 ‘반동 작품’으로 퇴짜 맞았던 세계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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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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