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첼 모랜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빈곤과 제대로 된 돌봄의 부재 속에서 자라다 열다섯 살에 거리 성매매에 유입됩니다. 『페이드 포』는 모랜이 그후 7년여의 시간 동안 겪은, ‘성매매를 지나온 여정’을 토대로 한 책입니다. 모랜은 이 책에서 성매매가 미치는 심리적 영향(성매매 여성뿐 아니라 구매자 남성에게도)을 낱낱이 기술하고, 성매매를 둘러싼 환상과 편견에 대해서 반박합니다. 아일랜드는 성매매의 구체적인 양태가 한국과 다르지만, 여성들이 성매매에 유입되는 원인이나 성매매가 남기는 신체적, 심리적인 영향은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페이드 포』와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두 책 모두, 사람들이 던지는 동일한 질문으로 책을 시작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바로 “어떻게 성매매를 하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두 저자들은 이 질문이 한마디로 답하기 불가능한 질문임을, 책 한 권 분량의 답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질문임을 보여줍니다. 두 책을 나란히 두고 도입부를 읽어나간다면, 성매매는 빈곤, 성차별, 성폭력, 사회적 자원의 불공평한 분배 모두와 연관을 맺고 있는 문제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성매매에서 내 자신을 보호했던 방법들 중 하나는 나와의 분리였다. 말 그대로 내 자신을 두 사람으로 분리한다. 진정한 나 그리고 상상의 나. 물론, 성매매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나를 아껴두고, 성구매자들로부터 거리 두기 위해 상상의 나를 만들어냈다. 구매자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뭐냐고 물으면(그보다 더 이상한 질문을 받았던 적도 있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 과일이나 말하겠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망고는 말하지 않았다. …… 구매자가 진정한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하게끔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은 실제로 성매매에 유입되어 있는 자시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페이드 포』 223~224쪽 💌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TMI: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동료들이 원고를 어떻게 읽는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이 책의 표지에는 망가진 팔찌가 중요한 오브제로 쓰였습니다. 디자이너가 표지 시안을 보여주었을 때 이 오브제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업소를 빠져나온 이후 새로운 일상에 적응하려 노력하지만 계속되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다시 업소로 돌아갈 것을 고민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는 대신, 업소에 있을 때 착용하던 부러진 팔찌를 팔아 돈을 만들기로 합니다. 아픈 과거를 다시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바꿔내는 대목이었는데, 디자이너는 이 대목을 인상 깊게 읽고 시각화한 것이었습니다. "아가씨들이 업소를 그만두고도 왜 다시 돌아오는지 아냐고 물었던 업주가 떠올랐다. 그 업주는 사람은 돈 없이는 못 산다고 했다. 한번 돈맛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시 돌아오게 된다고, 어린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부러진 팔찌가 없었다면 나는 다시 돌아가야만 했을까?"―『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342쪽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의 저자는 탈성매매 후에도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힌 트라우마의 신체화 증상과 해리 현상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직면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결국 나의 몸을 뚫고 올라왔고, 그래서 오랜 기간 몸을 아프게 한 것이었다. 내 몸은 나에게 계속 아프다고 말했지만, 나는 살아가기 급급했기에 내 마음 한 번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 성매매를 하면서 일면식도 없는 낯선 남자의 배에 깔려 허우적대는 내가 싫었고, 얼른 이 행위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영혼은 잠시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살고 싶어서였다.”―『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366쪽 하버드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는 트라우마가 인간에게 남기는 심리적 영향에서부터 치료까지, 트라우마의(‘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의학, 심리학, 역사학, 사회학을 두루 다루고 있는 종합서입니다. 허먼은 단지 풍부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트라우마 연구가 거쳐온, 또 진단 기준이 변화해온 역사적 과정을 짚음으로써 심리치료와 정신의학이 얼마나 정치적인 영역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허먼은 트라우마 연구가 매번 “정치적 운동과의 연대를 통하여 활성화되었”다고 말합니다. 19세기 후반 공화주의자들의 정치적 운동이 히스테리아 연구에, 반전 운동이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신경증’ 연구에, 페미니즘이 성폭력과 가정폭력의 외상에 대한 연구에 각각 미친 영향이 그 사례들입니다. 전쟁,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 등 외상은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폭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트라우마 치료에서 정치성은 결코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없음을, 이 책은 무수한 사례와 연구 결과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트라우마에 관해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단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면 이 책을 꼽고 싶습니다. “복합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는 지속적인 착취를 감내해 낸 이들이 받아 마땅한 인정의 척도가 승인되었다는 중요한 진전의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적확한 심리학적 연구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에 충실한 언어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생존자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시도이다. 생존자는 그 어떤 연구자보다도 속박의 영향력에 대하여 뼛속 깊이 이해하고 있다.”―『트라우마』 210쪽 ‘원조교제’ 하는 10대 여성들을 만나 석사 논문을, ‘조건’ 하는 10대 여성들을 인터뷰해 박사 논문을 쓴 저자가, 이 두 연구 결과 및 10대 여성들과 함께한 경험을 토대로 쓴 책입니다. 앞서 소개한 책들의 저자, 봄날과 레이첼 모랜 두 사람의 사례가 보여주듯 많은 여성은 10대에 성매매에 유입됩니다. 이 책은 2000년대 들어 ‘원조교제’, 이후에는 ‘조건만남’이라는 이름으로 가시화된 청소년 성매매 경험을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성매매에 유입되는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이들의 경험은 어떠한지, 왜 성매매를 그만두기가 어려워지는지, 저자는 10대 여성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섬세하게 살피고 갈무리해 전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후반의 연구를 토대로 2012년에 출간된 책이기에 현재의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10대 여성들이 섹슈얼리티와 관련해 받는 압력이 어떻게 달라져왔고 또 어떤 부분은 그대로인지 살펴 읽을 수 있는 훌륭한 자료입니다. 이 책이 특별한 점은, 책이 1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동시에 저자 자신의 성장담을 들려주고 있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연구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만을 취하지 않고, 연구자인 자신과 연구참여자인 ‘아이들’ 사이에서 생겨난 새로운 관계를, 아이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노동시장이 십대 여성에게 닫혀 있는 상황에서 십대 여성들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자원화하게 된다. 십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남성의 경제적 자원은 놀이, 데이트, 번개, 동거 등 다양한 관계 형태로 교환되면서 아이들이 그것을 성매매로 인식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사 성매매를 고착화시킨다."―『조금 다른 아이들, 조금 다른 이야기』 79쪽 이번 책타래 어떻게 보셨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