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에세이: 운명의 문장🔮
반짝이는 순간들
나는 온몸으로 걷는다. 반짝이는 음을, 순간을, 모든 것을 기다리고, 또 흘려보내며.
나만의 Beautiful Moments를.
©Marcello Gamez by Unsplash
어떤 반짝임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는다. 삼십 년의 시간이 흘러도 여전한 모습으로.

처음 신는 구두는 왠지 좀 어색하다. 스물네 시간도 부족하다는 듯 땅바닥을 뛰어다닐 때 신던 운동화와는 다르다. 발을 좀 조이는 것도 같고, 디딜 때마다 주목을 받는 것도 같다. 나는 어깨가 잔뜩 부풀어 오른 흰색 드레스를 입고 얼굴에 하얀 분칠을 했다. 위로 쫙 당겨 묶은 머리는 흰색 레이스 머리끈으로 고정되어 있고, 입술에는 아주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한 드레스 자락이 사락사락 소리를 낸다. 귓불에 달아놓은 귀찌도 대롱거린다. 나는 한 발 한 발 당당하게 걷는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여섯 살이고, 이곳은 음악 학원 예술제 무대다.

피아노를 다섯 살 때 시작했다. 다들 대여섯 살 때 어린이집을, 일곱 살 때 유치원을 다니는 것이 일종의 규칙이었던 시기지만 나는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피아노 학원엘 갔다. 그러니까 그곳은 내가 공식적으로 처음 다닌 교육 기관이다. 커다란 사각 안경을 쓴 여자 원장님은 내 장래를 밝게 봤다. 물론 장래보다도 지금 당장 학원을 오종종 뛰어다니는 조그마한 여자애가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나는 또래 아이들과 선생님이 존재하는 공간에 처음 진입한 기념으로 피아노를 신명 나게 연주했다. 학원에 다닌 지 1년이 되었을 때, 나는 피아노부의 가장 어린 참가자로 예술제에 참가했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 무대의 피아노는 까맣고 아주 크다.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그랜드 피아노를 치는 날이기도 했다. 총총총 걸어가 의자에 앉는데, 높이 조절이 되지 않는 의자는 나에게 너무 높다. 의자에 앉자, 다리가 대롱대롱 허공에 뜬다. 그러니까 언니들처럼 멋지게 페달을 밟을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팔을 뻗어 건반 위에 손을 얹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이게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른 채.
©Daria Kraplak by Unsplash
띵-

음악은 시작되었다. 아주 조용한 연주홀에 작은 여자애가 만들어내는 피아노 소리가 울린다. 나는 좀 떨린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빠오는 숨을 잘 쉬어 넘긴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지만, 손가락이 건반을 짚으며 만들어내는 소리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 뚱땅뚱땅. 뚱땅뚱땅. 3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무사히 연주를 마친 뒤 다시 땅으로 뛰어내린다. 사람들을 보고 인사한다. 머리 위로 찬란한 조명이 비추고 있다. 박수 소리가 쏟아진다. 나는 이때 ‘반짝반짝’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이해했다. 모든 것이 반짝거렸다. 사람들의 미소가 반짝거렸고, 무대 조명이 반짝거렸고, 박수 소리가 반짝거렸다. 나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반짝이던 1996년의 초여름으로부터 나의 인생은 시작된다. 나는 곧 서울로 이사를 갔고, 이사를 가서 피아노 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을 졸랐고,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 상을 받았고, 피아노를 억지로 관뒀고, 공부에 몰두하다, 대학생이 되어 인디 음악을 만들었고, 결국은 작가가 되어 피아노에 대한 책을 썼다. 그리고 삼십 년이 흐른 2025년의 봄에 나는 다시 아주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게 된다.

삼십 대 중반이 된 나는 사탕 껍질같이 커다랗고 뭉툭한 드레스를 입기에는 너무 자랐다. 나는 약간의 울이 포함된 매끈한 회색 셋업을 입고 있다. 안에는 흰색 셔츠에 남색 넥타이를 맸다. 불편한 구두 대신 선택한 것은 검은 운동화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변해버렸지만, 나는 잊지 않기 위해 안경을 선택한다. 겉면은 금색으로, 안쪽 면은 은색으로 빛나는 투 브릿지 안경이다. 테두리의 위아래로 작은 장식이 여러 개 붙어 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빛을 반사할 것이다.

독자들이 하나둘 입장하여 자리를 채우는 동안 나는 친구들에게 집에 가야 될 것 같다는 말을 열 번쯤 한다. 이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돈과 시간과 믿음과 기분을 모두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이렇게 잘 만들어진 공연장에서 이렇게 좋은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를 얻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발바닥이 땅에 닿지도 않던 아이가 하나도 모르던 것을 이제는 알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삼십 년의 시간이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오로지 지금은 예정된 토크와 연주에만 집중하면 된다고 말한다. 용기를 내어 무대로 한 걸음씩 걸어가는 동안 나는 그 첫 번째 무대를 생각하고 있다. 하얀 분칠을 한 작은 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어느새 첫 번째 곡을 연주할 시간이 된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페달에 발을 올려둔다. 막상 피아노 앞에 앉으니, 심장이 쿵쿵쿵 뛰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쿵. 쿵. 쿵. 쿵. 그래도 나는 그때처럼 건반에 손을 뻗는다.

띵- 

음악은 시작된다. 깔끔하고 반짝이는 소리를 내기 위해 듣고 또 듣는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피아노의 해머가 금속 스트링을 때리고, 그 소리는 조용한 공간에 파문을 그리듯 울려 퍼진다. 3/4박자의 조금은 서글픈 곡이다. 곧이어 신에게 기도하는 듯한 장엄한 곡과 열정적인 탱고 협주가 이어진다. 나는 순간순간 마른침을 삼키며 음악에 집중한다. 정확한 연주와 감정 전달과 원하는 소리 중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기 위해 온 정신을 쏟는다. 이제 나는 들을 수 있지. 내가 뭘 치는지. 시간이 가르쳐 준 것 중에는 좋은 것도 있다.

음악이 끝나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박수를 친다. 나는 땅을 딛고 일어나 인사하며 웃는다. 독자들이 쑥스러워하는 나를 위해 일부러 더 격렬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그것을 타박하거나 민망해하지 않는다. 오로지 환하게 웃는 얼굴들이 있다. 고개 숙여 인사한다. 조명은 여전히 반짝이고, 박수도 반짝이고, 피아노도 반짝이고, 다 반짝인다. 모든 게 변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살아가는 것이 오로지 시간을 통과해 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 시간 중에 가끔 반짝이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 순간들은 우연히 만나는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런 순간이 아주 가끔 찾아와도 좋다. 그런 순간은 삶에 흩뿌려진 아주 작은 별사탕이나 스프링클 같은 것이니까. 나는 온몸으로 걷는다. 반짝이는 음을, 순간을, 모든 것을 기다리고, 또 흘려보내며. 나만의 Beautiful Moments를.
'본 콘텐츠는 스톤헨지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작가 김겨울 작가, 라디오 DJ.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을 운영하는 북튜버. MBC ‘라디오 북클럽 김겨울입니다’를 진행했다. 《책의 말들》 《겨울의 언어》 등을 썼으며 2024년 첫 번째 시집 《우화들》을 펴냈다.
하고 싶은 거 하세요

한 해의 절반이 흘러가고 있는 6월, 돌아보니 이런저런 일로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한 상반기였더라고요. 미래에 대한 고민만 앞선 저에게 누군가 “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는 말을 들려줬는데요. 당시에는 “나도 그냥 남들 하고 싶은 거 하고 싶어.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라며 볼멘소리를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오늘은 아리님에게 저의 운명의 문장이 되어준 “하고 싶은 거 하세요”라는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KEEP DREAMING

권진아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자칭 ‘꿈친자’(꿈에 미친 자)라는 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해 어른들과 어울리며 일하는 게 무척 버거웠다고 해요. 그 지난한 시간을 버티게 해준 건 언제나 ‘’이었죠. 콘서트가 열린 그날도 그녀는 꿈을 이루는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잠실실내체육관 첫 입성이라더니 그게 꿈이었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성공의 시선으로 누군가의 꿈을 으레 짐작했죠. 그 순간 제 눈앞에 파워 댄스를 추는 발라드 가수 권진아가 등장했습니다.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어요. ‘꿈이 꼭 거창한 게 아니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반짝이는 그 순간이 꿈이었지.’ 저의 짧은 생각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어요. 그 후로도 한동안 그날의 반짝이던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노홍철
‘홍철책빵’의 리뉴얼 소식을 듣고 후암동에 들렀어요. 압도적인 벽화들과 더불어 입구 문을 열자마자 보게 된 풍경은 거대한 관이었습니다. 방송인 노홍철은 나이를 먹으며 부고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내가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관에 누워 죽음의 순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해요. 천장의 한 면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세 가지. 할 수도 있었는데…. 했어야 했는데… 해야만 했는데…

카페를 나서며 “하고 싶은 거 하세요”라는 문구를 소리내어 읽어보았습니다.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운명의 문장이 아닐까 싶었어요.
취업, 결혼, 내 집 마련처럼 인생에 있어 중차대한 일도 많겠지만 가끔은 그냥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결국 행복하자고 사는 거니까요. 아리님에게도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문장이 있으신가요?
🍋담당자 노라 각종 아카이빙이 취미인 소비요정 마케터이자 엘르보이스 고인물. 일이 힘들 때마다 구독자 후기를 읽으며 힐링한다.

🔮타로 에세이: 운명의 문장🔮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들을 위한 이야기를 전해 온
뉴스레터 엘르보이스가 선보이는 삶에 대한 레퍼런스 그 모든 것.

"타로 에세이: 운명의 문장"
이번 서울국제도서전 2025에서는 ‘운명의 문장’이라는 주제로 삶을 위한 새로운 영감을 제안합니다. 정답이 없는 시대, 운명의 문장을 뽑아 당신의 레퍼런스를 완성해 보세요.
🔮타로 에세이 참여 방법🔮
STEP 1. 복채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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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5. 나만의 한 줄 에세이 쓰기
받은 에세이와 질문 카드를 참고해, 나만의 문장을 한 줄로 써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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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보이스 첫 에세이 문답집 출간!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천선란, 황선우, 김겨울.
 엘르보이스 여성 필진이 전하는 삶에 대한 가장 특별한 안내서. 서울국제도서전 현장에서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6. 18(수) - 6.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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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보고 '이 별에 필요한' 영화를 보았는데 따뜻하고 뭉클한 작품이었어요!

<선명하게 슬퍼하기> 책이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없는 것 같아 아쉽네요.

구르님 글 너무 좋았어요. 마음껏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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