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베카 솔닛 전작 읽기’를 진행하고 있는 여성 독서 커뮤니티 들불에서

『야만의 꿈들』로부터 연상한 책들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짝 없는 여자와 도시』, 216쪽)

 

솔닛은 ‘걷기’에 누구보다 진심인 작가입니다. 걷기를 창조적이며 혁명적인 가능성을 발견하는 철학적 행위이자 세계를 탐험하는 새로운 경험으로 무척 각별하게 여겨왔습니다. 또 여러 저서에서 다양한 경험과 사례를 소개하며 걷기의 힘을 보여주는 작업을 지속해왔죠. 솔닛은 『야만의 꿈들』에서 우리가 땅에 내딛는 발걸음이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에 주목합니다. 추상적인 풍경을 구체화하고, 단절된 관계들을 연결 짓는 그물망으로서 ‘걷기’를 감각합니다.

 

“걷기는 (……) 땅을 인간의 삶이라는 장대한 여정과 주변의 도로와 오솔길과 연결 짓고, 더 나아가 그 땅을 밟은 모든 발자국이 입증하는 경험의 그물망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땅에 대한 권리를 요구한다.”(『야만의 꿈들』, 53쪽)

 

비비언 고닉 역시 걷기를 통해 도심 속 익명의 존재들과 몽상에 빠진 자신의 경계를 허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고닉은 외로움과 나이 듦 같은 삶의 여러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불확실한 미래를 상상하며 몽상에 빠져 걷곤 했는데요. 그렇게 몽상에 빠져 걷던 어느 날, 고닉은 불현듯 도시 속 익명의 목소리들에 의해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로 불려 오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의 삶을 침범하고 개입하며 얽히는 수많은 존재들이 고닉 스스로를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나’로 느끼게 만들고 있음을, 현재의 삶을 지속하도록 지지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솔닛이 걷기를 통해 연결감을 느낀 것처럼, 고닉 역시 거대한 하나로서의 ‘우리’를 걷기를 통해 감각한 것이죠.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왠지 오래 걷고 싶어졌어요. 걸으며 마주하는 사사로운 풍경들이 나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삭막한 도시가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여러분도 솔닛과 고닉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걷기’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고, 고립과 익명이 아닌 연결과 연대의 풍경으로 세계를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오늘 내 앞을 가로질러 간 모든 사람이 불현듯 떠오른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몸짓이 보이며, 나는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본다. 그들은 순식간에 나의 동행, 근사한 동행이 된다.”(『짝 없는 여자와 도시』, 221쪽)

솔닛은 직접행동 활동가들이 네바다 핵실험장이라는 광활하고 황폐한 무대를 가로질러 경계를 넘는 순간, 그들과 대립 중인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의 상호작용을 무용수들의 무용과 같은 움직임으로 이해합니다. 익숙한 방식으로, 온화하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항과 진압의 과정을 솔닛은 연속적인 몸짓으로 이해하죠. 체포된 활동가들은 플라스틱 수갑에 손이 묶인 채 감방에 머물게 되는데요. 손발이 묶인 그들은 제한된 장소 안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도모하며 자신의 신념을 ‘춤’으로 표현합니다. 이처럼 몸짓은 그들에게 신념과 욕망을 드러내고 자연과 어우러지기 위한 일종의 의식이자 경계를 넘어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한 발걸음입니다. 솔닛은 이들의 몸짓을 매의 고고한 날갯짓, 거북이의 신중한 걸음과 같은 움직임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몸짓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역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나는 (……) 여러 몸짓의 역사를 발견하고 싶고 네바다 핵실험장 같은 장소로 우리를 이끄는 수렴선을 보다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야만의 꿈들』, 58~59쪽)

 

조나단 버로우스의 『안무가의 핸드북』은 재료, 습관, 반복, 즉흥과 같이 ‘안무’와 관련한 키워드들로 구성된, 안무가를 위한 지침서입니다. 솔닛이 네바다 핵실험장이라는 거대한 영역을 ‘무대’로 상정하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비폭력적인 몸짓이 가지는 의미와 영향력으로 이해했듯, 이 책도 춤이라는 몸짓이 창조하는 영향력과 행위성의 출현에 주목합니다. 춤이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행위는 아니지만, 그 자체로 발산하는 힘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또 솔닛이 몸짓과 발걸음을 연결 지은 것처럼 버로우스 역시 안무를 하나의 장소에 도달하기 위한 발걸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파악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장소감이 만들어내는 각자의 서사를 ‘안무’라는 예술을 통해 완성합니다.

 

우리는 이들이 몸짓을 구체적인 행위로 의미화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우리 주변의 움직이는 존재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나는 어디로, 어떻게 움직였는가 자문하게 되죠. 어쩌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발걸음은 하나의 장소에 도달한다. 만약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신경을 쓴다면, 우리 역시 신경을 쓸 것이다.”(『안무가의 핸드북』, 203쪽)

이번 레터를 읽고 나니……
반비
banbi@minumsa.com
서울시 강남구 도산대로1길 62 강남출판문화센터 6층 02-515-2000
수신거부 Unsubscri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