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만 깊은 여운, 가을

가을은 사계절 중에서도 가장 짧은 계절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방학 겨울방학과 더불어 봄방학도 있지만 유일하게 가을방학만 없습니다.

어느 순간 사계절 중에 여름과 겨울만 남고 봄가을은 간절기처럼 지나가고 있습니다. 물이 천천히 끓어올랐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것처럼 그나마 봄은 기온이 서서히 오르는 동안 충분히 봄 햇살을 만끽할 수 있지만, 가을은 이제 정취만 남기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입니다. 영글었던 오곡을 수확하는 동안 낙엽이 지고, 작열하는 햇살로 달아올랐던 몸과 마음은 이제 파릇파릇한 색들과 이별하는 시간입니다. 짧은 만큼 더없이 소중하고 그래서 더욱 쓸쓸하게 다가와 'get sentimental in the fall' '가을 탄다'는 말을 하게 되나 봅니다.

푸르기만 했던 산하는 오색으로 물들고, 서서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풍요와 고독의 상징이 된 계절. 짧은 만큼 알차고 소중하게 만끽하는 방법으로 우리 선조들은 이맘때를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선선한 가을에 등잔 아래에서 책을 읽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말이죠.

사랑, 고독, 감사, 이별, 그리움, 자연의 경이로움, 행복 등 다채로운 감정을 깊은 여운과 함께 담아낸 이 가을에 어울릴 멋진 책들을 소개합니다.

제 2의 존 버닝햄이라고 불리는 영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샘 어셔 Sam Usher의 그림책 가운데 사계절을 연상시키는 날씨 이야기 네 편 《Sun》, 《Rain》, 《Storm》, 《Snow》를 엮어서 박스세트로 출간한 《Seasons》입니다.

아이는 밖으로 나가서 뛰어놀고 싶은데 햇살이 강렬해서, 비가 와서, 태풍이 와서 그리고 눈이 내려서 나가 놀 수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냥 집에서 편히 쉬는 게 제일 좋은 거라고 하고요. 그러나 아동의 ‘동‘이 童이 아니라 움직일 動이라는 진담 섞인 농담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날씨 따위는 전혀 방해물이 아니거든요.

샘 어셔는 이런 아이의 마음을 가슴에 스며드는 일러스트와 유머로 담아내고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받는 작품 네 편을 모아 엮은 박스세트가 《Seasons》입니다.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샘 어셔를 두고 제 2의 존 버닝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해됩니다. 그림과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꽤나 비슷한 면이 느껴지거든요. 

14x20cm의 자그마한 판형 하드커버 네 권이 박스에 예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아이와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이끌어 내는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질문을 어떻게 던져야 아이가 흥미를 가지고 대화를 하게 될까요? 

Bernard Waber의 《Ask Me》에서는 그 방법을 딸이 알려주네요. 산책을 하던 아빠와 딸이 있어요. 딸이 아빠에게 묻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 물어달라고요. 그리곤 개도 좋아하고, 고양이도 좋아하고, 거북이도 좋아하고, 기러기도 좋아한다고 대답합니다. 아빠는 다시 물어요. 하늘을 날고 있는 기러기가 좋은지, 물 위에 떠 있는 기러기가 좋은지 말이죠. 그렇게 감성이 가득한 대화를 주고받다보면 아이와의 친밀감은 한껏 높아집니다.

Bernard Waber는 이런 감성이 가득한 이야기를 써놓고 일러스트를 기다렸지만 끝내 완성을 보진 못하고 타계했습니다. 대신 그의 딸이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일러스트가 훌륭합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랑이 가득한 일러스트를 그린 사람은 Suzy Lee인데요.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는 한국인이라 더욱 우리나라 독자들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다가서지 않나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