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언제 결혼을 결심하셨나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혼인을 앞둔 사람, 혹은 기혼자들에게는 미리 써져 있는 하나의 대본처럼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보통 이 질문은 묻는 사람에 따라 답변이 달라지기 마련인데, 이유는 묻는 이에 따라 그 의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개 이 질문은 세 부류의 사람들에게 받게 됩니다. 하나는 결혼을 동경하는 젊은이들, 다른 하나는 본인의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결심을 재차 확인하고 싶은 이들, 그리고 마지막은 배우자입니다. 앞의 두 부류의 질문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으나, 마지막 부류에게 질문을 받게 되는 날을 위해서라도 한 번 쯤은 고민해두는 편이 좋습니다.
아, 물론 이 질문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내 삶이 너무 외로울 것 같다고 언제 생각하셨나요?' 와 같은 다소 생존주의적인 물음과는 결이 다른 낭만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평생 혼자 살면 심심하잖아', '이렇게 혼자 늙어 가다가는 고독사를 면치 못할 것 같더라고'와 같은 대답은 특히 마지막 부류에게는 적절하지 못한 답변입니다. 상대방과 만나는 순간 중 어느 순간에 '이 사람이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다' 라는 확신이 들었는지와 같은 다소 로맨틱하면서도 서사가 있는 답변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기혼자들은 이 질문을 서로에게 묻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결혼을 결심한 순간이란 것은 대개 명료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부분의 기혼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어느 시점을 낚아 채, '그 순간이 바로 그 때였다!'고 외칠 수는 있으나, '지금 나는 결혼을 결심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면서 상대방과 함께 하긴 쉽지 않지요. 그래서 기혼자들은 구태여 서로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예의인 것입니다. 답을 알고 있는 이들에게는 질문을 받지 않지만, 답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질문을 받는 이 불공평한 세상의 구조에서 평소에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준비해 놓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제게도 답변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첫 질문은 후배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 질문을 하는 세 부류 중 약간 변형 된 '결혼을 동경하지만 일찍 하고 싶지는 않은' 이 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서른 하나에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본인 생각에 한창 잘 놀던 제가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거나 이르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선배, 선배는 왜 그렇게 일찍 결혼을 결심한거예요?' 그 당시 들었던 질문을 글로 옮겨 적어보니 다소 의도가 가득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들지만, 마침 당시의 저는 미리 대본을 준비하지 못한 초보 예비 신랑이었기에 그의 의도는 알아채지 못하고 당황하며 대답하기 바빴습니다.
'아, 그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생각 했다. 함께 하면 편하고 좋다. 그래서 평생 함께하고 싶었다' 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왔습니다. 후배의 표정이 묘하게 부식해갑니다. 아, 그런데 이걸로는 충분하지 않구나. 지금 내가 겨울에 눈 내리는 소리를 하고 있구나. 하지만 마땅하게 준비한 대답이 없었기에 그대로 대화를 마쳤고,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남겨둔 채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도대체 언제일까, 나는 언제 결혼을 결심한 것일까. 정말 그런 순간은 없는 것 아닐까. 왜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물어보는 걸까. 법적으로 그런 질문은 금지를 해야하는게 아닐까.'
저는 그때 종종 여자친구(현 아내)의 집에서 머물렀었습니다. 후배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온 여자친구의 집엔,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는 구)여친이 앉아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저의 잦은 기거로 인해 어쩌다 섞인 제 양말도 있었고, 함께 입으려고 샀지만 아직 개시하지 못한 잠옷도 있었습니다. 홀로 빨래를 개고 있는 모습이 뭔가 미안해 부리나케 들어가 함께 빨래를 개기 시작했습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빨래를 같이 갠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손을 뻗어 익숙한 방식으로 양말을 정리했고, 남아있는 그녀의 양말도 정리하기 위해 손을 뻗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양말을 갠 모습은 저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돌돌 말아 대충 꾸겨 넣은 나의 정리법과 달리, 그녀의 것은 다소 가지런했습니다. 누가 봐도 발목이 덜 늘어날 것처럼 섬세하고도 깔끔하게 개여있는 문명의 자태를 뽐내고 있는 그녀의 양말은, 순간적으로 나의 정리방식이 더 하등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들게 할 정도였습니다. 본능적으로 '혼남'을 직감한 그때(그땐 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가 웃으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너는 양말을 그렇게 개는구나. 양말이 좀 늘어나겠지만 부피가 작아서 정리하기엔 그게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이제 우리 같이 살면 누구 하나의 방식으로 통일해야하니, 어떤게 더 좋은지 한 번 보자."
가만히 있어도 혼나지 않는 삶. 내 서툰 행동에도 존중이 있는 삶.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보지 않고 기다려 주는 삶. 아마도 그 삶은 제가 꿈꿔왔던 삶이었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구나. 내가 말과 문장으로 남기지 못했던 결혼의 이유. 이 사람이어야만 결혼을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 하루만 일찍 빨래를 할 걸! 그럼 정말 멋있는 대답을 그 후배녀석에게 남기고 올 수 있었을텐데. 그리하여 그 날, 이미 결심했던 결혼을 다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같은 질문을 받을 때 마다 '양말'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양말을 개는 그녀의 모습에 반했다. 너희는 그렇게 다정하고 가지런한 양말 정리를 본 적 없을것이다. 나는 혼나지 않았다!' 그럼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애써 찾은 답의 주제가 되는 단어가 '양말'이란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 쭈물 하는 것 보다는 이게 낫지 않겠냐고 아내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내는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어줬지만, 그럼에도 양말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이상하니 가급적 밖에선 이 질문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제게는 양말이 진심의 순간이었는걸요.
어제도 양말을 갰습니다. 이제는 나의 방식을 온전히 잃어버린, 그제야 비로소 온전해진 양말을 계속해서 접어낼 수 있는 문명인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갰던 세련된 방식이 더 좋은지, 내가 갰던 야생의 방식이 더 좋았는지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개고 있는 이 양말의 모습이 나의 서툰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 사람에 대한 헌사라는 것. 다른 사람들은 쉽게 갖지 못한 질문의 대답을 영원히 갖게 해준, 그리하여 내가 그녀와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잊기 않게 해준 하나의 이정표라는 것입니다.
아, 참고로. 집에서 빨래를 잘 개면 예쁨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