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름+, 열 일곱 번째 이야기

일상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방법론: 10월의 제주에서 만난 세 가지 풍경

일상을 조금은 다정하게!

몇 년 전 서울의 어느 책방에서 봤던 사진집이 있습니다.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가격이 부담스러워 결국 사지 못했어요. 그런데 잊을 만하면 그 사진집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그렇게 특별한 사진들은 아니었어요. 사진작가가 날마다 자신의 아침 식사를 찍은 사진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제게는 특별했습니다. 꼭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같았거든요.


제 하루는 대부분 비슷한 시간에 시작하고 끝납니다. 밥 먹는 시간도 비슷하고, 일하거나 쉬는 곳도 대부분 집 거실의 테이블 앞입니다. 테이블을 어지럽히는 패턴도 비슷하고, 스르륵 잠들었다 눈을 떠 처음 마주하는 풍경도 같습니다. 침실 창가, 화분과 그림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창가로 들어오는 빛의 양은 날마다 조금씩 달라요. 오후에 볕이 드는 작업실 창가에는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모양도 매번 다르고요. 늘 같은 줄 알았던, 때로는 지겹기까지 한 일상도 뷰파인더를 통해 기록해두면 기막히게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 그때 책방에서 만난 ‘브랙퍼스트’라는 사진집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이유입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흐르고, 잊은 줄 알았던 사진집을 동네 필름현상소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탐나는전(제주 지역화폐)’을 충전해서 구입했어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나 비슷하게 굴러가는 하루라는 이유로 살뜰히 살피지 않았던 일상을 조금은 다정하게 바라보기로요. 우리, 그렇게 해보기로 해요.


이번 뉴스레터에는 그렇게 다정한 눈으로 바라본 세 가지 풍경을 담았습니다. 제주를 떠나 다시 만나기 어려울 줄 알았던 사람과의 반가운 재회,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찍으며 일상의 순간들을 남기는 동네 사진 공간들, 그리고 인터뷰를 하러 갔다가 삼춘들과 저녁까지 함께 먹고 돌아온 북촌리의 어느 하루입니다. 어쩌면 무심코 지나쳤을지도 모를, 하지만 오래 마음에 남은 이야기들을 전합니다.

Niall McDiarmid의 사진집 <Breakfast>  
필름카메라로 찍은 아침 햇살  

🔢 사름+ 열 일 번째 이야기 순서

  •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제주로 돌아온 오주혜PD
  • 우리동네 로컬 브랜드 : 픽투피어와 순간노트, 제주에서 만난 두 사진 공간
  • 우리 몬딱 소중해: 북촌리 문영월·박영숙 삼춘과 보낸 저녁
1.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제주로 돌아온 오주혜PD

제주에 살다 보면 정든 사람이 섬을 떠나는 일을 종종 겪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도 제주를 떠나면 자연스럽게 멀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반가운 소식 하나를 들었습니다. 2023년 무렵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떠났던 오주혜 작가님이 제주교통방송 TBN에 PD로 입사해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주혜 작가님과의 첫 만남은 아주 짧았습니다. 제가 TBN 작가 일을 그만둘 때 후임으로 오셔서 인수인계를 하며 단 하루 마주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날의 인상이 좋아 이후 인플래닝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당시 글 쓰는 일을 막 시작했다고 했는데, 글솜씨가 꽤 안정적이었고 무엇보다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이후 사름 매거진을 비롯해 여러 일을 함께했습니다.


수줍고 차분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엉뚱한 면도 있었습니다. 일찍 출발하고도 길을 헤매다 약속 시간 즈음 허겁지겁 나타나기도 하고, 비행기 착륙 무렵 옆자리 승객이 갑자기 토하는 바람에 뜻밖의 봉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일하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웃곤 했습니다.


제주를 떠난 뒤에도 가끔 연락을 나눴습니다. SNS를 통해 재즈 피아노에 도전하고, 방송작가와 기자로 일하며 새로운 경험을 쌓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2023년 제 책이 출간됐을 때 연락을 나누다가 독립책방을 열고 싶은 꿈이 생겼다는 말에 또 한번 놀라기도 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서로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지켜볼 수 있다는 건 SNS의 좋은 점 가운데 하나겠지요. 그렇게 주혜 작가님과의 인연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해, 주혜 작가님은 입사 시험에 합격해 방송작가가 아닌 PD로 제주에 돌아왔습니다. TBN에서도 합격자 명단에 익숙한 이름이 있어 과거 함께 일했던 그 오주혜 작가가 맞는지 직접 전화로 확인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주혜 작가님과 제가 TBN에서 함께 일했던 정림 PD님, 주혜 작가님과 함께 입사한 동기 PD님까지 넷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몇 년 만의 만남이었지만 어색할 틈 없이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같은 곳에서 일하다 각자의 길로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제주에서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반가웠습니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종종 만날 수 있겠지요. 제주에서는 떠나는 사람도 많지만,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2. 우리동네 로컬 브랜드

필름사진이 남아 있는 곳

: 픽투피어와 순간노트, 제주에서 만난 두 사진 공간


얼마 전 아쉬운 소식 하나를 들었습니다. 함덕에서 자주 찾던 필름현상소 ‘제주필름’ 사장님 가족이 조만간 인도로 이사를 가실 예정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직 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고 현상소도 여전히 운영 중이지만, 몇 달에 한두 롤씩 필름을 맡기고 하루 만에 현상된 사진을 받아보던 일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제게 사장님은 제주시에도 ‘픽투피어’라는 현상소가 있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알고 보니 예전에 라디오에서 인터뷰했던 사진작가님이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서귀포에서 ‘스틸네가티브클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셨는데, 이제는 제주시에서 필름현상소와 카페, 사진 작업실을 함께 운영하고 계셨습니다. 이곳에서도 당일 현상이 가능하고, 사진을 기다리는 동안 이곳에서 판매하는 사진집을 구경하며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도 진행한다고 합니다. 조만간 사름 매거진에서도 조금 더 자세히 소개하고 싶은 공간입니다.

또 하나 소개하고 싶은 사진관은 서귀포시 남원읍 신흥2리의 ‘순간노트’입니다. 요즘 마을 기록 작업으로 자주 오가는 동네에서 알게 된 곳입니다. 사진작가인 남편과 아내가 함께 운영하는데, 아내분은 재봉틀로 직접 노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사진과 손으로 만든 노트라니, 순간노트라는 이름에도 잘 어울립니다. 사진작가님은 핫셀블라드라는 중형 필름카메라로 작업합니다. 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궁금해 얼마 전 부모님이 제주에 오셨을 때 이곳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도 오래전부터 필름카메라를 사용해왔습니다. 2006년 밴쿠버에서 중고 카메라를 구입해 남미 배낭여행까지 함께했고, 한동안 보관만 하다가 2019년 제주에서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디지털이 세상의 기본값이 된 지 오래고, 이제는 실제로 가지 않은 장소에 있는 내 모습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세상입니다. 이런 시대에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필름값도 비싸고 현상비도 만만치 않지만, 여전히 필름카메라를 사용합니다. 바로 결과를 확인할 수 없고, 찍은 사진을 보기 위해 며칠을 기다리기도 하지요. 그래도 직접 보고 경험한 순간을 내 손으로 찍어 남기는 일이 좋습니다. 편리한 방법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그런 경험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제주필름 사장님은 남편의 해외 파견이 끝나면 다시 제주로 돌아올 계획이라며, 현상 기계도 잘 보관해두었다가 다시 사용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때에도 필름을 사고, 사진을 찍고, 현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픽투피어와 순간노트처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진을 이어가는 우리 동네 공간들도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랍니다.

픽투피어 내부
순간노트에서 사진을 찍는 부모님
3. 우리 몬딱 소중해
인터뷰가 끝난 뒤에 시작된 이야기

: 북촌리 문영월·박영숙 삼춘과 보낸 저녁


지난달 해녀박물관 ‘불턱 토크쇼’에서 만난 문영월 삼춘을 기억하시나요? 북촌리에서 오랫동안 물질을 해온 분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새로운 마을 기록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다시 영월 삼춘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북촌리의 세대별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북촌리에 세 번을 찾아갔습니다. 첫 번째는 영월 삼춘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 위해, 두 번째는 마을의 옛 모습을 기억할 만한 사진을 함께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세 번째는 삼춘이 소개해주신 박영숙 삼춘을 만나러 갔습니다. 삼춘들은 바다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면 귤을 따러 가기 때문에 해질녘이 되어서야 시간이 났습니다. 덕분에 북촌리에서의 인터뷰는 늘 저녁 6시 무렵에 시작됐습니다.


사실 마을의 옛 생활과 풍경을 묻는 인터뷰가 생각처럼 술술 풀리지는 않았습니다. 삼춘들은 그저 살아내느라 바빴지, 오래전 일을 자세히 기억하지는 못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도 대체로 짧았습니다. 그렇다고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계속 캐물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질문지를 잠시 내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삼춘들의 말문이 가장 길게 열린 건 다름 아닌 일일드라마 이야기였습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의 사연을 두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동네 소식으로 넘어갔습니다. 비 오던 새벽 큰 사고를 당한 이웃의 아들이 이제 겨우 다시 걷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까지. 누가 어떻게 지내는지, 누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삼춘들은 서로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웃의 걱정도 자기 일처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영숙 삼춘이 불쑥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집에 오랜만에 왔으니 밥 먹고 가라게.”

“저는 오늘 처음 왔는데요. 오랜만이긴 하죠.”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다가 결국 저녁을 함께 먹었습니다. 영숙 삼춘이 시켜주신 잡채밥을 저도 함께 먹고, 영월 삼춘은 볶음밥을 드셨습니다. 처음 방문한 집에서 삼춘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취재자가 아니라 북촌리 이웃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일 때문에 찾아간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의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 질문지를 만들고, 인터뷰하고, 사진을 찾는 일이었죠. 그런데 세 번의 방문 끝에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건 질문지에 없던 이야기와 함께 먹은 저녁 한 끼였습니다. 지금 하는 이 일들이 어쩌면 일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영월 그리고 박영숙 해녀 삼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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