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 너 뭐 돼?[풀칠 97호]

안녕하세요 풀칠러님. 이번 주 풀칠 마감 당번 파주입니다. 느지막이 퇴근을 하고 나니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네요. 그렇지만 내일도 출근해야 합니다. 돈, 벌어야죠.

회사에서 '아휴, 일하기 싫어 죽겠네'를 목뒤로 삼키며 주변을 돌아보면 새삼 놀랄 때가 많습니다. 동료들의 프로페셔널함을 바로 옆에서 목격할 수 있으니까요. 여러 프로젝트를 종횡무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때로는 부러움과 존경심을 품게 되기도 합니다.

이번 풀칠 97호의 주제는 ‘롤모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롤모델이 있나요? 그렇다면 그 롤모델의 어떤 모습을 동경하시나요?

무수히 많은 나의 흑역사 중 하나는 스물의 봄이다. 대학교에 갓 입학했던 시절 그 당시 흩뿌려둔 굴욕의 순간이야 무궁무진하지만, 가장 깊은 수치심을 느끼는 건 아무에게나 ‘롤모델’이라고 지껄였던 일이다.

당시의 나는 상대에게 목이 달려있기만 하다면 누구든 ‘제 롤모델이에요’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 물론 그 말에 진심이 담겨있기는 했다. 스무살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학창시절 학교 책상에 앉아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익히지 못했지만, 나와 같은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은 달랐다. 춤이든 노래든 하다못해 남을 웃기는 재능이든 내가 가지지 못한 무엇인가를 다들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그 낯선 환경에서 나를 제외한 모두가 대단하게 보이기만 했다. 등교할 때마다 꼭 걸리버 세상에 제 발로 들어서야 하는 난장이의 심정이 되던 나날도 있었다.

K-수험생이라면 다들 야자를 하고 책상에 앉아있었을 텐데. 어디서들 이제 막 데뷔한 아이돌의 춤을 외우고 노래 같은 건 어디서 배워와서 기깔나게들 하는 건지… 저마다 멋진 장기 하나씩을 갖추고 있는 그들이 마치 연예인처럼 느껴졌다. 물론 시야도 좁고 열등감 덩어리인 스물의 내가 제멋대로 모두를 무대 위로 세웠던 것이었지만. 여하튼 그 무리 안에서 모지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자주 찾아왔다.

주변 사람들을 향해 롤모델이라 부르지 않게 된 건 그로부터 계절이 몇 번이나 지나고 나서다. 대가리가 조금 큰 뒤로 나의 롤모델은 주변 사람이 아닌 유명인, 혹은 직업인이 됐다. 그때 마침 사회 전반에 ‘멘토’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유행하던 때였기에. 변명하자면 사회가 멘토 하나쯤은 만들어 두기를 무지막지하게 종용했고, 나는 그 요구에 기가 막히게 응했던 거다.

그때부터 나의 롤모델은 말 잘하는 연예인부터 만물박사 같은 평론가, 세상살이에 통달한 철학자까지 셀 수도 없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을 롤모델로 삼으면서 체감한 건 우주만큼 먼 능력의 간극일 뿐이었다. 되려 절망감만 가득 얻은 채로 롤모델을 한 주마다 하나씩, 마치 도장 깨기 하듯 갈아치우기를 반복했다.

나의 롤모델 추적기는 사실 얼마 전까지도 이어졌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동경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잦았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의 직장만 하더라도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테트리스 블록처럼 끊도 없이 쏟아지는 일감에도 요동 없이 착착 해치우는 유능한 선배부터 급박한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해답을 찾아내는 팀장님. 거기에 나이와 무관하게 존경심을 품게 되는 일잘러 팀원들도 있다.

나는 그들의 유려한 일처리 능력에, 때로는 능숙한 대화스킬에 절절하게 부러움을 느꼈다. 농도 짙은 부러움이 가시고 나면 이내 씁쓸함이 찾아온다. 이렇게 부러워만 해서 무슨 소용이냐고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고.

롤모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건 아마도 이 시점이었던 거 같다. 타인에게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좁지만 아늑한 나의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바로 그 순간. 남들이 잘하는 것을 괜히 탐내기보다는 내가 그나마 잘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벽돌 삼아 나만의 성을 쌓아올리는 일. 그 과정에서 못난 질투심을 품던 과거로부터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었다.

한편으로 아무리 부러워해봤자 롤모델처럼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불가능한 것에 구태여 힘을 쓰지 않으려 한다. 대신 덜어진 그 수고만큼 나에게 조금 더 정성을 들이려고 한다. 당장 일이 어설플지는 몰라도 일에 여전히 재미를 느낀다는 것. 다소 마이너할지는 몰라도 나만의 분명한 취향이 있다는 것. 내가 사랑하고 자부하는 것들을 내가 구축한 세계 안에 쫌쫌따리 채워 넣으면서 이제는 예전만큼 남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동료들이 끝장나게 멋진 것과는 별개로 나는 그들이 되고 싶지 않다.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란 걸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 나의 롤모델은 바로 나다. 물론 누운 채로 한껏 게으름을 피우는 놈팽이 모드의 나를 롤모델 삼겠다는 건 아니고. 내가 바라는 롤모델은 밀린 집안일을 두고 보지 않고 당장 해치우는, 다가오는 업무를 능숙하지는 않더라도 성실하게 해치우려는 늠름한 어른의 모습을 한 나다.

물론 오늘도 어색한 식탁 위에서 허튼 말을 내뱉거나 허겁지겁 마감하며 내가 지향하는 롤모델이 되는 데에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내일은 조금 더 의지를 굳게 다질 거라고, 근미래의 나는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매오 : 망치를 든 사람에겐 모든 것이 못처럼 보이듯, 모든 사람이 롤모델로 보였다는 건 그만큼 파주 님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게다가 그렇게 많았던 롤모델의 수가 줄어들다 못해 이제는 스스로가 유일한 롤모델이라니.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이는 과정에서 파주님 또한 자신만의 영역을 뾰족하게 세우셨군요. 이젠 뒤를 한번 살펴보시죠. 파주님을 롤모델로 삼은, 과거의 파주님 같은 사람들이 분명히 보일 것입니다.

야망백수 : 저는 요즘 남을 길잡이 삼는 데엔 영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롤모델이든 반면교사든 결국 성장을 위한 레토릭일 텐데, 저는 이미 성체가 된 지 10년이 다 되어가거든요. 다 큰 어른이 성장에 목마른 아이처럼 굴다간 탈이 나지 않겠어요?

언젠가 읽은 문장이 생각나네요. “인류는 세상의 공동책임자다.” 닫힌 성장판을 끌고 달리다 지칠 때마다 이 말을 되새깁니다. 속 편한 무죄의 영역에서 남을 선망하거나 업신여기는 일은 이젠 멈춰야겠습니다. 남은 남대로 내버려 두고, 내 행동과 세상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어요. 덜 진취적이고 더 사려 깊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습니다.

마감도비 : 2010년대 초에 롤모델 유행 같은 게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청년들의 롤모델, 시대의 선생님, 사회의 웃어른 등등.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 조언을 해주는 풍경이 많았던 거 같아요. 책이든 예능이든. 뭐가 뭔지 모르던 대학생 시절에는 그런 얘기들을 다 듣고 따라야 하는 줄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물론 도움이 된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주 추상적이거나 단편적이어서 저에게 두고두고 도움이 되었던 조언은 없는 거 같아요.

그렇잖아요? 사람의 상황이라는 게 천차만별이어서 누군가에겐 적절한 조언이 누군가에겐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죠. 결국 사람의 성장은 조언의 내용보다는 조언을 구하는, 그러니까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본인의 의지에 달린 거 같아요.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는다는 것도 더 나은 나를 바라는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요. 지금 주변을 돌아보면 그 때 롤모델이니 뭐니 했던 사람들보다 제 친구들이 오히려 더 유연하고 책임감 강한 어른이 된 걸요. 파주님도 그 중 한 사람이고요. 스스로를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말로 어른이 되어버렸네요.

BY.야망백수

▲ 역할의 행방

by. 파주

“나도 쟤처럼 넓은 둥지에 태어났다면
쟤처럼 비싼 깃털이 남아돈다면
쟤처럼 힘센 날개를 달아본다면
훨훨 날아갈 줄 알았어 그러나 나는 나

최애 가수 선우정아님이 무려 10년 전에 발매한 <뱁새>라는 곡의 가사입니다. 정말이지 '자격지심'이라는 단어를 정말 지대로 표현한 노래아닌가요? 한때는 저도 세상의 수많은 황새들을 보며 질투심을 품기도 하고 모방한 적도 많은데요. 뭐, 지금은 그러려니 합니다. 지금 와서 부유한 집안, 훨칠한 키나 총명한 머리를 부러워 한데도 어쩔 도리가 있나 싶거든요.

그리고 말이죠. 저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요. 뱁새는 사실 잘나지 않아도 됩니다. 보세요, 겁나게 귀엽거든요.

풀칠러A

저도 스타트업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어서 오늘 편을 특별히 흥미롭게 읽었어요. 역시..! 풀칠 필진분들 평범한 직장인이라기엔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두 분이 에디터셨군요!🤗 에디터 직무에 관한 고찰이 결국 제가 앞으로 고민해야할 문제이기도 해서 오늘 에세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과 위로가 되었어요. 고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야망백수

반갑습니다 풀칠러님. 제가 앉아있는 자리에 에디터라고 적혀있긴 합니다만, 저는 솔직히 제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하이파이브 한 번…(짝)🤗

에디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정보는 편집을 할 수 있지만 삶은 편집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어차피 자를 수도 버릴 수도 강조할 수도 없다면 모든 페이지를 최대한 맛있게 읽는 게 최선 아닐까 싶습니다. TMI가 넘치는 다채로운 하루 보내셨길 바래요.

풀칠러B

프로란 '그냥 하는 것' 이 말이 아주 와닿네요 ㅎㅎㅎㅎ 물론 큰 목표의식이 있는 것도 좋지만 일단 그냥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예전에 김연아 선수시절 인터뷰에서 연습할 때 무슨 생각을 하냐고 인터뷰를 했었는데 '그냥' 한다는 답변이 문득 생각이 나요. 지금 저도 회사를 일단 그냥 다니고 있지만 매일 매일 이렇게 성실하게 하는 자체가 '프로'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주

공부든 일이든 ‘정말 뒤지게 하기 싫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는데요.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사활을 걸고 업무를 해내더라고요. 언젠가 한번은 성실하게 일하는 동료에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참고 일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비결이 정말로 궁금했거든요. 그 동료가 정확하게 동일한 답변을 하더라고요. ‘저도 하기 싫죠. 그냥 해야죠 뭐. 별 수 있나요?” 저는 아직 프로가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풀칠러C

문장과 글이 너무너무 너무너무 너무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던 오늘 뉴스레터!!!! 내가 수행하는 기능은 글이라기보다 마감이다, 마지막 문단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ㅠㅠ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다

야망백수

헉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제 기능을 한 것 같네요. 평온하고 넉넉한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

풀칠러D

30대시절엔 자랑스럽게 나는 프로라고 얘기했지만, 진정한 프로란 퇴직때까지 일을 돈벌이를 계속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50대입니다. 그때는 프로를 책임감있게 목표를 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목표는 왜 그런지를 궁금해하지 않았던 노비의 시절...?

아매오

일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의 무엇이든지, 더 많은 시간과 경험은 쌓이면 쌓일수록 ‘꾸준함에 대한 경외’로 자연스레 바뀌어 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현재는 단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긴 타임라인의 단단한 일부이자 이음새라고 믿어요. 대신 이런 다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목표는 왜 그런지를 궁금해”하자!

풀칠러E

프로라…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아직 끝내지 못한 업무를 이어가고 있는 나도 ‘프로’일까요?

저 역시 에디터.. 혹은 에디터에 가까운 일로 밥벌이를 하고 있는지라 오늘의 풀칠이 많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좀 미적지근해도 ‘좋아합니다. 이번엔 진짜라구요’라고 말할 수는 있게 되었네요. 이 정도면 프로 인정? 꿉꿉해진 날씨 덕분에 평소보다 긴 하루입니다. 저의 조각배의 항해는 어쩌면 내일까지 이어질 것 같습니다.

마감도비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좋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무서운 법이겠죠. 좋아하면 점점 잘하게 되니까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이 있지만 이미 즐기고 있는 사람은 피할 필요도 없죠. 약간 금강불괴 같은 느낌? 풀칠러님은 오늘도 쿨한 프로의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내일도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