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단어산책의 규연입니다.

안녕하세요, 규연입니다.
첫 번째 산책을 나설 준비가 되셨나요?
완벽하게 준비되기 전에는 시작하지 않는 성격 탓에 뉴스레터 발행을 미뤄왔던 만큼 첫 번째 단어 산책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처음인 만큼 나를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을 써야 할 것만 같기도 하고, 중요한 단어들을 먼저 다루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지만 요즘 제 머릿속에 가장 많이 떠오르는 단어인 장마로 첫 발을 내딛어 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날씨와 기분으로 이루어진 사람이라 생각할 만큼 그날의 날씨에 쉽게 영향을 받곤 합니다. 햇살이 쨍한 날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큼 힘이 넘치다가도 요즘처럼 일주일 내내 비 예보가 있는 날이면 온갖 상념에 젖어들어 세상 빗물을 혼자서 다 머금은 듯 축 쳐져 있기도 합니다. 이따금 배경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순식간에 주인공 자리를 빼앗아버리는 날씨는 많은 이들의 일상을 한꺼번에 바꿀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날씨는 전 세계인이 공유하는 몇 안 되는 공통 관심사이기도 한데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인사말 대신 날씨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모두가 마음 편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도 오늘은 처음의 막연함을 덜기 위해 날씨의 힘을 빌려보려 합니다. 조금은 긴 아이스 브레이킹이 되겠지만 이 글을 읽고 앞으로의 산책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지난주를 시작으로이번 여름에도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왔습니다다음 주 화요일까지 비구름으로 가득 차있는 일기예보를 하루에 몇 번이나 새로 고침해도 달라지는 것 없이 목금토일월화틀림없이 비가 올 작정인가 봅니다.
대한민국 전체 강수량의 약 30%를 차지하는 대표적 여름 날씨인 장마는 슬프게도 5의 계절이라 불릴 정도로 매년 계절의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높은 습도 때문에 마르지 않는 빨래습기를 잔뜩 머금고 눅눅해져버린 침구온통 비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에 햇빛이 든 게 언제였는지도 잊어버릴 만큼 어두컴컴한 요 며칠을 보내고 나니 기분은 빗방울처럼 자꾸 아래로아래로 떨어지고만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찾아본 사전에는 장마에 관련된 속담들이 여럿 실려 있었습니다그 중 재미있는 것이 몇 가지 있어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 장마에 오이 자라듯
좋은 기회나 환경을 만나 무럭무럭 잘 자라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장마 만난 미장쟁이
때를 잘못 만나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 

장마라는 똑같은 때를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는 쑥쑥 크고 미장쟁이는 굶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조금은 웃기면서도 안타깝습니다잠깐 내리는 비는 기분 좋게 반겨줄 수 있지만 끝낼 줄 모르고 눈치 없이 쏟아지는 장마는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제가 꼭 미장쟁이가 된 것 같습니다하지만 장마가 무서워 호박을 못 심는 상황은 만들지 않으려 합니다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속담만큼이나 오래된 말이 맴도는 요즘다음 주 화요일까지는 열심히 오이가 되어보려 합니다.

    • 장마가 무서워 호박을 못 심겠다
    다소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할 일은 하여야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장마' 속을 걸으며 마주친 단어들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좋아합니다. 작년 이맘때 '여름비'라는 소설을 처음 읽고 푹 빠지게 되었는데, 그 뒤로 소설, 인터뷰집, 산문집 등 한참을 그녀의 글만 읽었던 게 기억납니다. '이슥하다'라는 단어도 '여름밤 열 시 반'이라는 책 속에서 발견한 단어입니다.

    "밤은 아직 이슥하다막연한 의식 속에 왠지 해결이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번 장마 기간에는 소용돌이 치듯 몰아치는 감정과 아득하게 아름답고 슬픈 동화를 느낄 수 있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책을 추천드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이슥하다' 처럼 밤의 깊이를 표현하는 단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밤하늘에도 어두워지고 진해지는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희붐하다'는 밤과 새벽의 희미한 경계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고요하고 조심스럽게 아침을 향해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밤의 빛깔에 가까운 시간. 남아있는 어둠이 단어에서도 잔잔하게 느껴집니다.


    얼마 전 국민참여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에서 단어를 검색하다, '우중충하다'가 최근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 3위에 올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마로 하루 종일 새벽인 듯 흐릿한 날씨 때문일까요. 사람들의 대화 속에 등장하는 특정한 단어를 통해 그 시기의 풍경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 문득 재밌게 느껴졌습니다.


    '고요'라는 말은 자주 하지만 '적요'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  듯합니다.
    고요, 적요, 적적, 고적, 고즈넉. 조금씩 다른 분위기를 풍기지만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겹쳐지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적요'의 정의에 '적적하다'라는 말이 등장해 찾아보게 된 단어입니다. 조용하고 쓸쓸하고 심심한 것이 '적적하다'라면, 조용하고 쓸쓸하고 심심한 것에 고요함을 더한 것까지가 '적요'인 것일까요? 고요함에 들어 있는 조용함을 생각하면 '적적'과 '적요'의 차이는  더 모호해집니다. 아무리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단어를 포착해내려 노력해도 단어가 주는 미세한 느낌의 차이는 그저 그런 느낌, 이라는 말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오이가 되려고 노력해도('이게 무슨말이지?' 하셨다면! 맨 위의 '장마'를 읽어주세요!) 아직까지는 어쩔 수 없는 미장쟁이 쪽인 것 같습니다. 모아둔 단어들을 늘어놓고 보니 모두 잠잠하고 천천한 단어들 뿐이라 어쩐지 거짓말을 하다 들켜버린 기분이 되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자기 반성 시간을 가지고, 듣기만 해도 보송보송 기분이 좋아지는 단어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야 '욜랑욜랑'이라는 단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슥'한 밤이 '희붐'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우중충'하고 '적적'한 '장마'기간이지만 몸도 마음도 가볍게 '욜랑욜랑'하면서 제5의 계절을 잘 지내야겠습니다.

    산책을 나서기 전 신발끈을 한 번 더 단단히 묶는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첫 뉴스레터의 준비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많이 부족하고 서툴지만 조금씩 빈 칸을 메우고 디테일을 더해 매주 수요일의 산책 시간을 기대할 수 있게 꾸준히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시작은 앞으로의 과정에 추진력을 더하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첫 번째 단어 산책이 좋은 시작이었기를 바라며 저와 함께 산책을 나서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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