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레카소 인스타그램에 개봉영화 리뷰를 올려야겠다 생각했는데 아직 극장 한번도 못간 거 실화인가..? 사실 난 특별한 일 아니면 출근 외 약속은 토요일에만 잡을 수 있거든. 무조건 하루는 집에서 쉬어야 하는 사람이라 극장 가기가 쉽지가 않네. 봐야하는 영화가 수 없이 개봉하고 종영하며 부채감이 커져가는 중 씨네필의 축제기간인 아카데미 시즌이 다가왔어. 벌써 주요 극장에서는 아카데미 기획전 예매가 열렸더라고. 후보작 중 기 개봉작은 다시보고 <가여운 것들><패스트 라이브즈><퍼펙트 데이즈> 등 2024년 기대작 프리미어도 볼 수 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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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호시스
이번주는 나의 지난 설 연휴를 책임졌던 애플tv [슬로 호시스]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들고왔어. 한국식 표기 덕에 제목이 바로 와닿지 않을 수 있는데 Slow Horses, 느린 말이란 영국 정보보안국 국내 담당인 MI5에서 좌천된 사람들이 모인 ‘슬라우 하우스(Slough house)’의 실패한 요원들을 일컫는 말이야. 슬라우 하우스에 가느니 차라리 요원을 그만두겠다고 할 정도로 치욕스러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무슨 사연을 가진 걸까. [슬로 호시스]는 기본적으로 첩보물의 장르적 특성을 따르지만 국가로부터 무능을 공인받은 집단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스파이와 실패한 작전의 책임을 슬라우 하우스에 뒤집어 씌우려는 본부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익숙한 장르를 비틀었어. 커리어의 최저점에 선 인물들이 기득권을 뒤집는 짜릿함, 루저들의 어이 없는 실수에서 비롯된 엇박같은 웃음과 함께 첩보 스릴러의 긴장감을 충실하게 끌고가는 각본의 힘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완성도 높은 작품이야. 영국 추리작가협회의 골드 대거상을 수상한 믹 헤론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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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적 언더독
[슬로 호시스]를 통속적으로 말하면 언더독의 반란이야. 다만 인디펜던트 정신을 택한 주체적 언더독이 아니라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주류 사회에서 낙오된 타의적 언더독이라는 점이 분명한 차이지. 그래서 반란도 완전하지 못해. 각 시즌은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완결성을 갖지만, 시즌에 걸쳐서는 슬라우 하우스 요원들의 과거사와 관계성을 통한 인물의 변화를 담아내고 있어. 초중반 다소 불친절하게 던져지는 수많은 정보들에 처음엔 당황스러울 수 있어. 그러나 장담컨데 고유의 속도에 맞춰 겹겹이 쌓아올린 서사의 끝에 이른다면 이 모든 여정의 완벽함에 감탄할 수 밖에 없을거야. 각 시즌의 마지막화에서 그동안 뿌렸던 복선들을 완벽하게 회수하거든. [슬로 호시스]의 뚜렷한 캐릭터 기반의 상호작용과 사회 풍자적 사건 설계는 장르불문 압도적인 밀도를 지니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어. 뛰어난 각본가이자 감독인 마틴 맥도나의 영화 <쓰리 빌보드>가 떠오르기도 했어. 소재는 전혀 다르지만 절대 웃을 수 없는 사건의 한 복판에서 어설픈 사람들의 충돌이 빚어낸 기묘한 코미디 감성이 유사하다고 느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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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올드만
[슬로 호시스]의 독특한 유머와 슬라우 하우스를 지탱하는 축은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슬라우 하우스 팀장 잭슨 램이라는 인물인데, 숨 쉬듯 그의 요원들을 경멸하는 시니컬함의 생동감이 중독적이었어. 그는 지독한 방귀를 아무데서나 뀌어대고 제대로 씻지 않아 냄새나고 숨쉬는 것보다 자주 담배와 술을 달고 있는 혐오스러움의 결정체에 무려 낙오의 인장이 박힌 슬라우 하우스의 팀장인 셈인데 MI5 본부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반전 과거를 지니고 있어. 본부가 아무리 슬라우 하우스를 이용하려 해도 이 만만치 않은 지독한 잭슨 램은 여우처럼 함정과 음모를 파헤치고 유유히 사라지는 역할인거지. 연기력은 당연하고 게리 올드만이라는 배우가 지닌 이미지와 이 인물의 만남은 탁월했다고 봐. 게리 올드만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초기 대표작은 <시드와 낸시>의 시드, <JFK>의 리 하비 오스왈드, <드라큐라>의 드라큐라, <레옹>의 스탠스 등 바른 얼굴과는 거리가 먼 뒤틀린 인물인 경우가 많아. 하나의 캐릭터로 규정되지 않았던 게리 올드만 덕에 [슬로 호시스]에서의 잭슨 램도 인물의 속내를 알기 전까진 그와 시청자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전형성과 거리가 먼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들은 루저지만 나의 루저”라는 잭슨 램의 대사가 슬라우 하우스를 설명하는 한마디가 될거야. 시즌이 거듭될 수록 이 고약한 늙은 요원의 빈정거림에 푹 빠져버린 게 나만은 아닌지 ‘램 머리는 언제 감나요’, ‘코트 제발 빨아줘’, ‘입냄새가 화면을 뚫고 나와요’ 등 시청자들의 애정어린 원성이 자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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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과 개인
[슬로 호시스]에서 MI5는 분명한 부패 권력으로 그려져. MI5 최초 여성 국장과 부국장, MI5와 정권 사이의 기싸움 속에서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되는 다수의 이익이 있다는 논리 하에 모든 요원들은 사실상 작은 체스 말에 불과해. 그들의 부패를 숨기기 위해서 몇 명의 목숨은 가볍게 묻을 수 있는 MI5는 사실상 거대한 마피아 조직같기도 해. 잭슨 램은 그 판 안에서 놀아나고 싶지 않아 슬라우 하우스를 선택한거고. 더이상 동료의 죽음마다 동요하지 않고, 상대의 좋은 제안을 믿지 않고,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으며 살아남은 그가 얼마나 많은 상처와 환멸을 속에 묻어두었는지 표현한 적은 없어. ‘나의 루저’가 위협받는다면 지체 없이 나서는 그의 모습에 뭉클할 뿐. 그럼에도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익을 교환하는 부국장 다이애나 타버너(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와 잭슨 램의 관계는 흥미로워. 언제든 뒷통수를 칠 수 있고 서로를 믿지 않음이 분명한데 그들은 한 배를 탄 동료처럼 보일 때도 있거든. 이미 절대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기묘한 동행을 이상하게 응원하게 돼. 시즌3의 결말을 보면 시즌4는 이제와는 다른 판이 펼쳐질 것 같아. 첩보물을 즐기지 않는 나조차도 완전히 빠졌을 정도로 재미있었어. 너무 무거워 보여 약 1년간 시청을 미뤘었는데 이제야 본 걸 후회하고 있거든. 시즌별 6회밖에 되지 않으니 도 꼭 도전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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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1
시즌4가 방영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시즌5가 벌써 제작을 확정지었다는 소식이야. 게리 올드만이 은퇴 의사를 밝힌 와중 그의 은퇴를 최대한 미룰 수 있도록 [슬로 호시스]가 끝 없이 이어지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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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2
박찬욱 감독이 각본이나 연출로 참여하고 싶다고 언급한 드라마로 유명해. 박찬욱 감독은 스파이 스릴러 작가 존 르 카레 원작의 [리틀 드러머 걸]을 드라마화 했었는데, 존 르 카레가 다시 살아난 것 같다며 극찬했어. 이를 들은 게리 올드만은 박찬욱 감독이 원한다면 [슬로 호시스]측도 의향이 있다고 밝혔어. 놀라운 콜라보가 혹시 성사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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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포인트03
평소 드라마 오프닝 보는거 좋아하는 데 [슬로 하우스]의 오프닝 곡이 유난히 맴돌아서 찾아보니 믹 재거가 만들었다고 해. 제목부터 드라마에 딱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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