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서는 아직도 아이들이 자라요
오늘은 가족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막막하더라고요. 살아왔던 공간에서부터 출발하기로 합니다. 어느 가족의 역사는 곧 그들이 살았던 집의 역사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서요. 


어렴풋한 느낌, 몇몇 장면이 아니라 확실한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는 첫 번째 집이라면 8살부터 13살까지 살았던 중계동 목화아파트다. 목화아파트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먼저 월곡 시민아파트 이야기를 해야 한다. 할머니는 90년대 중반까지 월곡 시민아파트에 살았다. 당시는 서울 곳곳에 있던 시민아파트를 철거하던 때였는데 월곡 시민아파트는 한참 전에 철거가 되었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낡은 건물이었다. 층마다 공용 화장실이 있고 집집마다 연탄으로 개별 난방을 하던 곳. 가끔 할머니 집에 가면 다섯 식구가 (둘은 아기였는데도) 빼곡하게 둘러앉기도 빠듯한, 원룸 정도 크기였던 것 같다. 시멘트로 모양을 잡아 만든 계단은 너무 높고 가팔라서 아빠랑 엄마가 나랑 동생을 하나씩 안고 오르내려야 했다. 그래도 아파트 앞마당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이 꽤 있었는데 걔네도 하나둘씩 다 이사를 가고, 할머니가 거의 마지막까지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로 층층이 쌓아올린 판자촌. 그게 내가 기억하는 시민아파트의 모습이다. 시민아파트의 탄생 이유 같은 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결국 내 기억이 맞았지 뭐.

아무튼 월곡 시민아파트는 재건축되었다. 할머니는 거기를 허물면서 생긴 입주권 같은 것을 우리 가족에게 주었다. 철거와 재건축에는 딱 6년이 걸렸다. 월곡 시민아파트에 살던 일부는 약속이나 한 듯이 중계동 목화아파트로 이사했다. 목화아파트가 시영아파트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때 나는 미취학 아동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어른들의 사정은 모른다. 이 이야기는 전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하는 추측들이다.) 할머니의 월곡 시민아파트에 놀러갔을 때 몇 번 함께 어울려 놀았던 이웃들을 목화아파트 주차장이나 놀이터에서 마주쳤다. 물론 엄마가 그들과 인사를 나누는 걸 보고 알았다. 또 그 이웃들은 재건축이 끝난 뒤 시민아파트 자리에 지어진 ‘샹그레빌 아파트’로 함께 이사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는 중계동, 중고등학교는 청량리에서 나왔지만 초중고를 다 함께 졸업한 동창이 있다.


중요한 건 나에게 초중고 동창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중계동 목화아파트다. 내가 나온 초등학교는 사방이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금 기억나는 단지만 꼽아봐도 2단지 무지개아파트, 3단지 목련아파트, 4단지 목화아파트, 9단지 사슴아파트, 현대아파트, 건영아파트가 있었으니까. 요즘 어린이들은 ‘휴먼시아 거지’니 ‘엘에이치 사는 애’니 하면서 아파트를 따진다던데 내가 어릴 때도 그랬다. 대놓고 거지라고 놀리지는 않았지만 어떤 아이가 매번 숙제를 안 해오거나 옷을 잘 안 갈아입거나 준비물을 안 챙겨오면 “쟤 4단지(혹은 9단지)잖아” 했다. <상계동 아이들>이라는 책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이 책을 읽었는데 <참나무 선생님>을 좋아했던 취향에 딱 맞았지만 우리 교실에 진짜 ‘상계동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후감은 안 썼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상계동, 중계동, 하계동은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자수성가 중산층 젊은 부부로 채워졌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그때 엄마의 공포는 나와 동생이 ‘4단지 애’ 취급을 당하는 거였다. 어린 눈에도 보일 만큼 전전긍긍했다. 맞벌이 때문에 집을 비운 사이 우리가 나쁜 친구들에게 물들까 봐, 4단지 상가를 맴돌며 성추행을 일삼는 노인들한테 나쁜 짓을 당할까 봐, 학교에 준비물과 숙제를 잘 챙겨가지 못할까 봐, 추레한 모습으로 등교해서 “쟤 4단지잖아” 하는 말을 들을까 봐. 수많은 걱정 중 몇 개는 현실이 되었지만 많은 애들이 그렇듯 나와 동생은 그럭저럭 자랐다. 오히려 엄마의 전전긍긍 때문에 평균적인 초등학생보다 훨씬 깔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초등학생 때만큼 많은 새 옷을 입었던 적이 없다.

엄마는 그때 돈을 많이 벌었다. IMF로 실직한 남편을 대신해 - 애초에 취직이라는 것을 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을 때일 듯한데 - 화장품 방문판매에 뛰어들었는데, 달마다 최고 실적을 기록하고 승진을 거듭했다. 상계 백병원 쪽 미도파 백화점 사거리 뒷골목에 있던 그 사무실은 달콤한 기초 화장품 냄새와 화장품 창고와 아줌마들의 커다란 웃음소리로 가득했었는데. 10년이 안 되는 시간 사이 엄마는 상무인지 전무까지 승진했지만 그런 회사가 다 그렇듯 직책에 비해 수익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집이 지금 부자가 아닌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쨌든 엄마는 그때 번 돈을 나랑 동생한테 다 썼다. 주말마다 우리를 데리고 스카이락 - 스카이락에서 팔았던 뚝배기(?)에 담긴 콘 크림 수프를 다시 먹을 수 있다면! - 에 갔고 뉴코아 백화점, 미도파 백화점, 2001 아울렛, 건영옴니백화점에서 새 옷을 잔뜩 사 입혔다. 나는 단 한번도 숙제와 준비물을 빼먹지 않는 것으로 엄마의 전전긍긍에 보답했다. 우리의 팀 플레이는 “너 현대아파트 사는 줄 알았어!” 라는 또래들의 감탄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월곡 시민아파트의 재건축이 끝났다. 부끄러울 만큼 화려한 ‘샹그레빌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1, 2, 3동은 성북구인데 우리가 입주한 4동만 동대문구여서 나는 한참 멀리 떨어진 청량리 깡통시장 앞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 폭력이 심하고 애들이 자살을 너무 많이 해서 한 명만 더 죽으면 폐교된다는 소문이 도는 곳이었다. 아직도 네이버에 그 학교 이름을 치면 그 학교에 배정되어버렸다며 어떻게든 전학 수속을 밟을 수 없냐는 질문이 줄을 잇는다. 그 학교는 학급 구성원 모두가 ‘4단지 아니면 9단지 애들’인 곳이었다. 반면 ‘샹그레빌 아파트’는 태어나서 처음 살아보는, 그때까지 내 기준 가장 부자인 대전 큰이모 집만큼이나 넓고 깨끗한 방 세 개짜리 아파트였는데, 나는 거기서 자고 일어나 매일 월곡 시민아파트랑 똑같이 어두컴컴하고 냄새나는 학교로 등교했다.

중계동 목화아파트에 살던 초등학교 때는 자주 혼자였다. 학교가 끝나고, 동생은 학원에 간 사이 어둑한 집안에 혼자 앉아 있을 때가 많았다. 텔레비전도 안 보고 컴퓨터는 아직 없고 학급문고나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이미 다 읽어치운 오후.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커다란 책꽂이 옆 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여러 생각들을 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20평짜리 복도식 아파트에 혼자 덜렁 담겨 있던 그 시간만은 엄청 길고도 생생하다. 그때 중계동에서, 아무도 없는 임대시영아파트의 빈 집에서 각자 잘 큰 애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혼자인 게 덜컥 겁이 날 때면 주차장에 나와서 편을 갈라 탱탱볼로 피구를 하고 이어달리기를 하던 민지, 슬기, 건희 들은.


  
이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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