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의 생각, 기획자의 마음 |  최갑수

노곤함 또는 여유의 감각

책 한 권을 끝냈다. 책이 나오기 전 1주, 책이 나오고 나서 2주 정도는 정신없이 바쁘다. 책이 나오기 전 미리 보도자료와 카드 뉴스 등 각종 홍보자료를 만들어 놓아야 하고 인쇄 감리 후 책이 나오면 각 서점 배본과 MD 미팅을 해야 한다. 언론 릴리즈, 서평 이벤트와 작가와의 만남, 사인본 배송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더군다나 나는 1인 출판사라 이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


서점 출고를 마치고 맞는 첫 토요일. 오전 늦게 사무실에 나왔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휴일에 사무실에 나오는 편이다. 아마 직원이라면 “아휴, 휴일에 사무실엘 왜 가요?”하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나는 1인 기업(이렇게 써놓고 보니 뭔가 거창하지만 그냥 가게 수준입니다)의 대표이다 보니 사무실과 집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일과 생활을 두부 자르듯 정확하게 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나와 있으면 뭔가 묘한 여유가 느껴진다. 창으로 들어와 회의 탁자를 비추는 햇살의 질감도 다르다. 텅 빈 사무실에서 클래식 FM을 크게 틀어놓고 커피를 마시며 어슬렁거리고 있노라면, 뭐라고 할까……, 긴장과 여유 사이의 중간쯤 되는 감각이라고 할까? 노곤하면서도 달콤한 피로감이라고 할까? 복합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어 좋다.


휴일의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바빠서 미루어 두었던 잡다한 정리다. 책을 내기 위해 작가, 거래처와 주고받았던 메일에 태그를 달아 저장하고, 붉은 사인펜 자국으로 가득한 교정지를 버리고 다음 책 교정지를 그 자리에 갖다 둔다. 내가 써야 할 에세이의 리스트를 에버노트에 백업하고, 노션에 다음 책 관련 스케줄과 기획한 아이템을 리스트업한다. 수첩에 적어두었던 아이템과 메모도 노션으로 옮긴다. 워크플로위의 To do list에 줄을 긋고 지울 것은 지운다. 컴퓨터 바탕화면은 한 줄로 정리한다.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잘라 먹으며 이런저런 일을 한다.


정리가 대충 끝나간다. 라디오에서는 랑랑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나는 랑랑의 모차르트를 들으며 오늘 저녁에는 어떤 요리를 할까 하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이번 주 금요일 자 레터 ‘오늘의 요리’에 쓸 수 있는 뭔가면 더 좋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는 정리를 잘, 그리고 자주 하는 편이지만, 정리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책에서 끝없이 오탈자가 나오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내가 편집증적으로 정리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여기에 이것이, 저기엔 저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둘 정도로만 한다. 맞다. 나는 '어디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정리를 하는 것이다.


정리라는 것이 언뜻 생각하면 귀찮기만 한 일이지만 ‘의미’를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나는 왜 정리를 하는가, 보통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보기 싫으니까, 누가 시키니까 정리를 한다. 하지만 어떤 일도 의미가 없으면 공허하다. 일에는 분명 이유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게 정리란 내가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에 빨리 찾을 수 있도록 재배치하는 일이다.


랑랑은 퇴장하고 이젠 백건우 선생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몸에는 약간의 노곤함이 희미한 전류처럼 머물고 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녹턴을 듣는다. 기분 좋은 감각이다. 여행을 막 다녀와서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다. 말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노곤함이라는 여유’라고 부른다. 이건 뭔가를 해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분이다.


자, 이제 일어서자. 손바닥을 탁탁 털며 말끔해진 데스크를 바라본다. 창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다. 오늘 저녁은 가쓰오부시 계란말이와 기린 맥주로 정했다. 양파와 당근을 듬뿍 넣어야지. ✉️

최갑수는 작가지만 요즘에는 기획 일을 더 자주 한다. 새벽 3시부터 오전 8시까지는 작가로 살고,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기획자로 산다. 그의 일과 일상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ssuchoi를 들여다 보자.

🥃 위스키에 진심입니다 |  고현

부산과 모티

언제부터인가 부산을 떠올릴 때면 좀 설렌다. 바다가 가깝고, 맛있는 별미가 무궁무진하며, 무엇보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술집이 있으니까. 부산으로 떠날 일이 생기면 그 술집을 가기 위해 일부러 동선을 짜내곤 한다. 그곳은 부산 원도심, 수정동의 외딴 산복도로 중턱에 자리한다. 일제강점기 때 도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부산 각지의 산자락에 판자촌을 형성했는데, 해방 이후 그 산간 마을을 연결한 길을 산복도로라 통칭해 부른다. 그중 수정동의 산복도로는 그야말로 지그재그 급경사 구간의 연속이라 도보로 찾아가는 건 애당초 단념하는 게 상책, 버스나 택시로 이동해야 한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붉은 벽돌의 4층 구옥 건물이 기다린다. 빨간 현관문에는 경상도 방언으로 모퉁이를 의미하는 ‘모티’라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초인종을 누르면 곧 현관문이 덜컹 열린다. 계단을 따라 어둑한 지하로 내려가면 바 6자리와 테이블 2개로 이뤄진 단출한 술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요즘 유행하는 모던한 인테리어로 힘을 준 바와는 거리가 멀다. ‘걱정하지 말고 설레여라’라는 주술 같은 문구가 내걸린 벽장에는 위스키와 코냑 등 희귀한 올드 보틀이 가득하고, 술과 관련된 잡다한 수집품이 질서 없이 늘어져 있어 마치 누군가의 사적인 아지트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 실제 이곳을 홀로 운영하는 조태진 마스터는 서울에서의 오랜 직장 생활을 정리하고 우연히 발견한 이곳을 아지트 삼아 지인들과 위스키 모임을 열다가 바를 시작했다고. 

내가 모티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건, 2018년 가을 무렵이었다. 김종관 영화감독과 동행하는 부산 취재 때였다. 평소 위스키를 좋아한다는 그의 취향을 사전 미팅 때 알고 나서 부산의 위스키 바를 물색하던 중 찾아낸 곳이었다. 문제는 취재 일정의 첫 장소였다는 점. 사전 스케치 촬영을 위해 사진가와 먼저 부산에 내려온 나는 늦은 밤, 부산역에 막 도착한 감독님과 인사를 나누고 서둘러 낯선 산복도로의 주택가로 그를 이끌었다. 아직 어색한 공기가 바의 실내를 채운 가운데, 조태진 마스터가 추천하는 위스키를 홀짝이며 촬영을 겸한 취재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내어준 위스키는 산토리와 니카의 올드 위스키.

“일본의 오래된 위스키는 각기 다른 매력이 있어요. 산토리가 일본인의 취향에 맞춰왔다면, 니카는 우직하게 스코틀랜드식 위스키를 구현해냈죠.”

마스터가 왼손에 장갑을 끼고, 스포이드로 물 1방울을 툭 떨어뜨려 풍미를 더한 위스키 한 잔에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다음은 스모키한 피트 향이 코끝을 강하게 자극하는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싱글 몰트위스키와 대면할 차례.

“킬호만은 아일레이에 문을 연 마지막 증류소였어요. 요즘은 크래프트 싱글몰트 위스키로 수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죠.”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잔을 채우고 덜어내길 반복하는 시간. 그렇게 수정동의 지하 바를 메운 서늘한 공기는 조금씩 따스하게 데워졌고 이후 김종관 감독과의 취재도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됐다.


모티에서는 별도의 메뉴판은 없고 마스터가 일일이 손님의 취향을 묻는 방식으로 주문이 이뤄진다. 가령 이전에 마셨던 인상적인 술을 대면 그와 유사하거나 혹은 새롭게 도전해볼 만한 위스키나 코냑을 내어주는 식이다. 덕분에 매번 모티에 갈 때마다 모험하듯 새로운 위스키와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마스터가 위스키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조곤조곤 풀어주는 덕분에 술 한잔과 함께 잠시 위스키가 탄생한 증류소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도 누릴 수 있다.


모티의 불문율 같은 규칙이 하나 있다면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는 것. 술을 알아가고 즐기는 것이 주목적인 곳이기에 마스터는 눈치껏 손님의 주량을 감안해 주문량을 조절한다. 한 번은 부산에 사는 친구와 자갈치시장에서 양곱창을 먹고 모티를 찾은 적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회포를 푸느라 소주를 제법 마신 날이었다. 얼굴이 붉고, 말도 더듬더듬 느려진 우리의 상태를 살피던 마스터는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위스키를 즐기기에 좋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내가 애정하는 장소는 그런 만큼 그곳의 룰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최근에는 아내와 함께 떠난 부산 여행 때 모티를 찾았다. 꽤 오랜만의 방문이었음에도 마스터는 여전히 나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세심하게 추천해준 위스키와 코냑을 3잔 정도 마시고 기분 좋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마스터가 대뜸 묻는다.

“혹시 괜찮으시면 살롱에서 한 잔 더 안 하실래요?”


마감 정리를 하던 그는 마지막 손님이던 우리와 옆자리의 부부에게 불쑥 제안을 했고, 그렇게 즉석에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모티의 1층은 박물관에 가깝도록 조태진 마스터의 진귀한 애장품으로 가득한 응접실로 꾸며져 있다. 이날처럼 단골이나 지인들과 종종 술자리를 갖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운 좋게도 마스터의 즉석 술자리에 초대를 받은 셈이다. 위스키 애호가라면 정신이 번쩍 들 법한 조니워커 블루 올드보틀을 잔에 가득 따라주던 마스터는 이런 이야기도 덤덤하게 덧붙인다.

“희귀한 위스키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무덤까지 가져갈 건 아니잖아요. 저는 이렇게 인연이 생긴 소중한 분들과 같이 즐기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해요.”


모티에서 유쾌하게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이면 부산 남항으로 향하곤 한다. 뱃사람 외에 외지인의 발길이 거의 드문 항구 일대에는 빛 바랜 간판의 노포 식당이 몇몇 있다. 그중 남포식당은 모티의 마스터의 추천으로 알게 된 곳이다.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홀로 운영하는 단촐한 식당인 이곳의 메뉴는 오로지 복국 하나다. 조미료를 일절 가미하지 않고 미나리로 향을 보탠 슴슴하고 단정한 복국 한그릇. 이를 깨끗하게 비워내는 게 언제부터인가 나만의 부산 여행 공식이 됐다. ✉️

고현은 낮에 글을 쓰고 밤에 위스키의 세계로 안내하는 공간 운영자다. 작업실이자 위스키 시음실로 사용하는 무용;소(@mooyong_so)에서 위스키와 취향을 매개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 Clip | 언제 가도 좋은 도쿄의 카페 6

사진은 『GQ』 웹사이트에서 캡처

_ 『GQ』에서 도쿄의 카페를 추천했습니다.
_ 도쿄 여행을 계획하고 계신 분들은 참조하면 좋을 것 같아요.
_ 저는 3번과 5번이 가보고 싶습니다.   

1) 긴자 카페 드 람브르(Café de l’Ambre) 에이징 커피를 맛 볼 수 있는 곳. 커피 애호가들 사이에서 도쿄에 가면 꼭 가봐야할 카페 1순위. 커피 장인 세키구치 이치로상의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곳. 거의 100세의 커피 장인이 운영하는 카페. 규모는 작지만 내공이 느껴지며, 커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2) 우에노 카야바 커피 kayaba coffee 도쿄의 오래된 민가를 리모델링한 카페. 다타미방에 초대 받은 기분으로 오붓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 풍미 넘치는 타마고 산도와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단 도심에서 거리가 멀고, 가는 길이 오르막이기 때문에 타마고 산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방문을 고심해볼 것.  

3) 긴자 카페 파울리스타 Cafe Paulista 긴자 핫초메에 위치한 카페로 105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현존하고 있는 일본식 찻집(킷사텐) 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자주 방문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카페. 킷사텐답게 흡연석이 마련 되어있다. 1층은 흡연이 가능한 구역이고 2층은 금연석이다. 긴자 시내가 내려다보여 커피를 마시며 멍 때리기에 좋다. 각종 토스트와 몽블랑, 케이크도 일품.  

4) 시부야 차테이 하토우 茶亭 羽藤 블루보틀 창업자에게 영감을 준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시부야 도심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래된 카페가 주는 분위기가 마치 아지트에 들어간 기분이 들게한다. 흡연석과 비흡연석이 구분되어있지 않다. 빈티지하지만 아름다운 잔이 쌓여있는 벽면, 아름다운 조명과 오브제로 장식된 내부. 그리고 친절한 바리스타들이 내려주는 커피는 여행의 피로도 다 없애준다.  

5) 시부야 라이온 Lion 시부야의 오래된 뒷골목에 자리한 엘피 카페 겸 바 라이온. 2층으로 이뤄져있는 이 공간의 압도적인 인테리어는 샹들리에와 커다란 빈티지 스피커가 완성한다. 수 천장의 엘피와 카세트테이프, 레코드로 즐비하며 혼자 음악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커피나 음료의 맛은 딱 기본을 하는 맛이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묘미는 음료의 맛을 배가 시키는 다채로운 선곡의 힘. 신청곡도 가능하다. 백 년 전, 혹은 수 십년 전 어느 시대로 돌아간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이 곳을 추천한다. 

6) 긴자 ❘ Café 1894 ❘ 영국인 조지아 콜돌이 1894년 설계한 은행 건물을 최대한 비슷하게 복원하여 카페와 뮤지엄(미쓰비시1호관미술관)으로 만들어 놓은 곳. 도쿄의 여러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도 등장해 이미 유명한 곳. 워낙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예약을 하고 가는 게 좋다. 이용 시간이 90분으로 제한 되어있으며, 밤에는 바로도 영업한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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