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가장 만족스러웠던 쇼핑 있어? 나는 나이스웨더에서 청량한 고무장갑을 샀어. 집안일 중 가장 싫어하는 분야는 단연 주방쪽인데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를 산 이후로는 설거지가 당당히 1위를 차지했어. 하지만 설거지는 일상적으로 자주 벌어지는 일이잖아. 그래서 싱크대 앞에 서는 게 이보단 덜 괴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오렌지색을 사고 싶었는데 품절이더라고. 매일매일이 지루하고 하기싫은 것 투성이라면 이렇게 작은 소비의 도움을 빌려봐. 내 친구가 그랬어. 행복은 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행복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말고 자주 즐거운 순간을 만들어보자.

이번 주엔 다소 흥분된 단어들로 뉴스레터를 채우게 될 것 같아. 미쳤다는 말밖에 안나와. 왜냐하면 미쳤기 때문에.. 바로 HBO 드라마 [왓치맨]이야. 2009년 개봉한 잭 스나이더 감독 <왓치맨>으로부터 34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 DC 코믹스 원작 만화의 세계관을 확장한 시리즈인데, 그래픽 노블로서는 유일하게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 이후 최고의 영문 소설에 선정될 정도의 작품성을 지니고 있어 두터운 팬덤을 자랑해. 단순 히어로물로 오해하면 안된다는 뜻이야. 영화가 ‘왓치맨(watchmen)은 누가 감시(watch)하는가’를 다뤘다면, 드라마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메세지를 확장했다고 봐야해. 드라마를 보려면 아무래도 기본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서 영화를 관람하는게 좋아. 영화는 왓챠, 티빙, U+모바일tv에서, 드라마는 웨이브에서 볼 수 있어. 


초능력을 타고났거나 후천적으로 초능력이 생겨서 히어로로 살아갈 운명을 짊어진 히어로들과 달리 왓치맨은 스스로 히어로가 되기를 선택한 보통의 사람들이야. 원자 사고로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된 ‘닥터 맨해튼’을 제외하고 말이야. DC 코믹스 원작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눈치 챘겠지만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들의 쾌감 넘치는 액션물과는 거리가 멀어. 히어로로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정체성 탐구보다도 더 나아가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의 정의 구현이란 권한은 누가 줄 수 있는지, 그들은 과연 정의롭다 할 수 있는지 선악의 개념이 모호한 인간성에 집중해서 뚜렷하게 심판할 수 없는 왓치맨들의 행동을 관찰하는 게 바로 영화 <왓치맨>이야. 드라마는 영화 엔딩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 이후로 트라우마 위에 세워진 평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가상의 역사와 흑인 대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털사를 배경으로 인종문제를 중요한 서사의 한 축으로 가져와. 

털사 경찰은 백인 우월주의 집단인 제7기병대의 습격을 받아 다수가 살해당하는 ‘백야’ 사건 이후,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다녀. ‘나이트 시스터’로 활동하는 비밀경찰 안젤라 역시 ‘백야’ 때 총을 맞고 가까스로 살아나서 공식적으로는 경찰 은퇴를 한 상태야. 당시 제7기병대를 소탕했다고 여겨왔는데, 몇 년이 지나고 제7기병대원에게 흑인 경찰이 살해당하면서 모든 사건은 다시 시작하게 돼. 안젤라는 이 사건을 시작으로 자신과 가까웠던 동료의 의문사를 다시 한번 겪으며 제7기병대의 음모라 확신해. 하지만 범인을 색출하는데에 혈안이 된 그녀 앞에 자신이 범인이라고 우기는 103살의 의문의 할아버지, FBI가 되어 돌아온 전 ‘실크 스펙터’ 로리 블레이크, ‘오지만디아스’ 에이드리언 바이트의 회사를 사들이고 털사에 거대한 과학단지를 보유한 레이디 트리유 등 낯선 인물들이 나타나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 그 사건의 한 가운데에 서서 진실에 다가가게 돼.


흥미로웠던 건 경찰 외에도 '로어셰크'를 추종하는 듯 디자인을 본딴 제7기병대의 마스크, 자경단원의 마스크 등 가면 뒤에 숨어 서로 다른 신념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한 선상에서 바라보는 시선이야. 초반엔 시대의 흐름에 맞게 인종차별을 화두에 내세우는 이야기인가 싶었는데, 후반부로 갈 수록 마스크를 매개로 인간의 공통된 욕망과 감정에 대해 질문하는 듯 느껴졌어. 제7기병대와 왓치맨의 마스크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인지, 보통의 히어로물에서는 감히 묻지 않으니까. 마스크 뒤의 감정이 분노에서 공포였음이 밝혀지는 과정이 전체적인 서사 속에서 무척 설득력 있어. 스포가 될 것 같아 사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람과 사건들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독자적으로 흘러가던 이야기들이 합쳐지며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는 정말 희열이 느껴질 정도야. 


친절한 스토리텔링은 아니야. 드라마 초반은 뭔가 내가 놓친 정보가 있나? 라는 감상이 지배하겠지만 그걸 조금만 견디고 보다보면 중후반부부터 모든 떡밥이 회수 되면서 매 순간 대박.. 미쳤다.. 헐.. 이런 원초적 단어들을 외치게 될거야. 보면서 저건 왜 그런거지? 라고 생각되는 모든 부분이 거의 다 밝혀지거든. 그런 지점을 일부러 기획하고 긴장감을 이어가며 이유를 알려주는 작품은 드물잖아. 오히려 이야기의 빈 공간이 드러나는 부분일 때가 많지. 보면서 이렇게 실시간으로 전율이 오는 각본은 너무 오랜만이라 정말 벅찬 감동을 느꼈어. 2009~2010년 쯤부터 영화 <왓치맨> 봐야한다고 일년에 한번씩은 꼭 말하는 친구가 있는데(레카소의 파친코 프로젝트 패턴 디자인을 한 디자이너.tmi), 그 친구가 이 드라마도 추천해줬어. 그 친구 있는 방향으로 절 올리며 마칠게. 참고로 영화 <왓치맨>은 161분이야. 나 러닝타임 짧은거 좋아하는 거 알지? 그렇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어.

소소한 관람포인트1. <프로메테우스> 각본가

2020년 에미상에서 무려 11관왕을 했어. 제작자이자 각본가 데이먼 린델로프는 <프로메테우스>와 [로스트]의 각본가이기도해. 그러고 보면 <프로메테우스>와 비슷한 분위기, 비슷한 가치관이 엿보이는 것 같아. 다소 무겁지만 대서사시 스타일을 좋아한다면 [왓치맨]도 좋아할거야.

소소한 관람포인트2. 꼭 알아야 할 정보
사실 영화 <왓치맨>의 후속편이라기보단, 그 이후의 세계관 위에서 이어지는 별개의 이야기라고 보는게 더 적절해. 그래서 원작의 세계관과 캐릭터만 이해하면 영화는 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난 안보고 시도했더니 좀 힘들더라고. 그래도 영화의 러닝타임이 부담된다면 <왓치맨>에서 로어셰크, 로리 블레이크, 닥터 맨해튼, 오지만디아스의 서사를 알고 가면 돼. <왓치맨> 엔딩도..ㅎ 그냥 영화 봐주라

소소한 관람포인트3. 로어 셰크 마스크

제7기병대의 마스크의 모티브가 된 로어셰크의 마스크는 로르샤흐 테스트에서 따왔다고 해. 그래서 원작팬들은 드라마에서 로어셰크가 백인 우월주의 집단의 심볼이 되었다는 것에 무척 불만이 많은 모양이야. 다만 원작에서 극우신문을 읽고 있었다는 등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어. 이에 대해서는 찬반 논쟁이 이어지고 있어.
레이지 카우 소사이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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