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스키에 진심입니다 |  고현

매드맨과 온더록스

2014년 무렵이니 벌써 9년 전 일이다. 여행 잡지사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편집부의 막내 에디터였던 당시의 나는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에디터 일을 시작한 지 3년 차가 되었지만, 도무지 취재와 기사 작성 실력이 늘지 않아 편집부의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했고, 쳇바퀴처럼 찾아오는 잡지 마감 루틴에 정신적, 체력적 그로기 상태였다. 몇 년 후에 번아웃이니 퇴사생이니 욜로 같은 키워드가 세상을 휩쓸며 너도나도 퇴사 바람이 불었지만, 이제 막 결혼까지 저질러 버린 당시의 나에게 퇴사는 용기를 쥐어짜고 압박도 감내해야 하는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그 시절 내게 한줄기 위로가 되었던 미국 드라마 시리즈가 있었는데, 바로 매드맨이다. 1960년대 뉴욕 매디슨 애버뉴의 광고 업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는 (‘매드맨’이 광고에 미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매디슨의 광고쟁이를 의미하는 단어임을 알게 됐다) 그야말로 매혹 덩어리 그 자체였다. 고증을 거쳐 구현한 시대적 배경, 특히 당시의 빈티지 광고 포스터와 패션, 음악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무엇보다 주인공 돈 드레이크는 나의 무수한 결핍을 채워주는 선망의 존재였다. 선 굵게 잘생긴 외모부터 변수가 많은 광고 업계에서 최고의 카피와 이미지를 뽑아내며 승승장구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처럼 다가오기도 했지만, 당시 나를 사로잡던 직업적 번뇌로부터 조금은 해방감을 맛보게 해줬다. 그런 반면 말단 비서에서 카피라이터로 차근차근 성장해 나가는 페기 올슨에게선 묘한 동질감도 느낄 수 있었다.


매드맨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안겨준 요소는 역시 위스키다. 돈 드레이퍼는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위스키를 마셔댄다.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근무 중에 위스키를 끊임없이 마시는데, 결국 나중에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어쨌든 그가 얼음 잔에 무심하게 위스키를 따르는 모습을 볼 때면 위스키가 성공한 사람의 증표인 것처럼 깊이 각인을 시켰다. 돈 드레이퍼가 마시는 위스키는 대개 캐내디언 클럽 같은 클래식한 라이 혹은 버번이 주를 이뤘고, 그가 바에서 주문하는 칵테일은 어김없이 올드 패션드였다.

드라마를 감상할 당시의 나는 위스키에 관해서라면 거의 완벽하게 백지상태였다. 버번과 라이, 스카치위스키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올드 패션드 칵테일이 버번을 베이스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조차 나중에 알았다. 그럼에도 그 시절 바에 갈 일이 생기면 메뉴판을 대충 훑고 늘 그랬던 것마냥 올드 패션드를 주문했다. 돈 드레이퍼가 마시던 올드 패션드는 내게 성공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마법 같은 호사였다. 버번 특유의 부드러운 바닐라 향과 각설탕의 단 맛 그리고 앙고스트라 비터 특유의 씁쓸한 풍미가 교차하는 올드 패션드는 직업적 진퇴양난에 빠진 나에게 달콤쌉사름한 위로가 되었다.


<매드맨>의 배경이 된 196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과 함께 경제적으로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미국의 위스키 업계는 1920년대 금주법으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캐나다 위스키 산업에게 기회가 되었다. 밀주가 성행하던 그 시절, 호밀을 주재료로 사용한 캐나다의 품질 좋은 라이 위스키는 미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금주법이 해지된 이후에도 애주가들에게 단단한 신뢰감을 쌓았다. 1960년대 트렌드의 최전선을 이끄는 돈 드레이퍼의 사무실에 캐나디안 클럽 위스키 병이 놓여 있는 이유도 이런 역사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매드맨>에 등장하는 위스키의 한 축을 이루는 버번은 1960년대를 거쳐 좀 더 세밀하게 브랜딩이 되면서 미국 위스키의 대표 주자가 됐다. 옥수수를 주재료로 사용하고, 새 오크에 숙성을 시켜야 하며, 첨가물을 넣지 않아야 하는 깐깐한 규칙도 이 때 정립되었다. 스카치위스키에 비해 도수가 높고 숙성연도가 짧은 버번위스키는 보통 얼음 잔에 넣은 온더록스로 음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돈 드레이크처럼 각얼음을 잔에 채우고 얼음의 절반에 이르지 않도록 위스키를 따라야 버번의 진득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매드맨>을 보며 지난한 막내 에디터 시절을 견딘 나는 이후 같은 잡지사에서 2020년까지 일을 했고, 현재는 프리랜서 에디터의 길을 걷고 있다. 근래에는 서울에 몇 개의 지점을 두고 운영하는 공유오피스를 사무실 삼아 틈틈이 출근하는 중이다. 이용한 시간만큼 결제가 되는 시스템이라 집이나 작업실에서 일을 하기가 애매할 때면 공유오피스로 향한다. 이곳의 메리트 중 하나는 오후 3시부터 1시간 동안 알코올이 들어간 음료를 제공하는 리큐어 타임. 도수 낮은 칵테일이 주를 이루는데 때로 버번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얼음 잔에 버번을 따라 넣고 잠시 그 시절을 회상해본다. 돈 드레이크가 사무실에서 즐겨 마시던 위스키의 맛이 몹시도 궁금했던 그 시절. 과연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성장했을까? 적어도 그때만큼 돈 드레이크를 선망하지 않게 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버번의 맛도 제법 구별할 줄 알게 되었고. 🔖

고현은 낮에 글을 쓰고 밤에 위스키의 세계로 안내하는 공간 운영자다. 작업실이자 위스키 시음실로 사용하는 무용;소(@mooyong_so)에서 위스키와 취향을 매개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시도하고 있다.

📄 작가의 생각, 기획자의 마음 |  최갑수

마감이 없다면, 마감을 만듭니다

저는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글을 씁니다. 글이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뉴스레터 얼론 어라운드입니다. 뉴스레터를 처음 시작할 구독자들에게메일 아침 8 제가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하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세상에나, 매일 아침이라니!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까지 무사히 약속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지난주 목요일 보내드린 레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마감이 없다면 내가 마감을 만든다. 제가 작가로 일하는 방식입니다라고요. 맞습니다. 저는 자신을 마감이라는 연못에 밀어서 빠트려 버립니다. 풍덩. 연못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팔과 다리를 힘껏 저어야겠죠.


글쓰기 강의를 하면 많은 분들이 제게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요?” 하고 묻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아니 일주일 동안 글을 얼마나 썼죠?” 그들은 머뭇거리며 대답합니다. “사실 글을 써본 적이 별로 없어요.” 저는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일단 써 봅시다. 잘 쓰는 건 그다음 문제니까요.”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말장난 같지만, 일단 써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를 자발적으로 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다른 사람이 시키거나, 누군가로부터 의뢰가 들어와야 비로소 움직이죠. 글쓰기를 비롯해 뭔가를 창조한다는 건 아주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죠. 그래서 더더욱 하기가 주저되는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등을 떠밀기 전에는 문을 나서지 않습니다. 아, 돈을 주면 힘차게 문을 열 때도 있습니다만.


쓰고 싶지만 쓸 곳이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금처럼 자신의 글을 보여줄 장소가 많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블로그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뉴스레터가 있잖아요. 브런치도 있네요. 없다면 만들고 거기에 선언하세요. “저는 매주 수요일 오후 3시에 여행 에세이를 올리겠습니다!” 이렇게요. 당신이 글을 쓰기 위해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건 ‘마감’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당신에게 원고를 청탁하지 않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한테 여행에 관한 글을 청탁하는 편집자는 많았지만, ‘작가로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매주 글을 써 주세요’하고 청탁서를 보내는 편집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는 마감이 없으면 글을 못 쓰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편집자가 ‘3월 5일 오후 6시까지 원고지 20매를 써주세욧!’ 해야 3월 5일 오후 6시까지 겨우 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마감의 연못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버리기로 결정한 겁니다. 뉴스레터를 만들고 구독자를 모았죠. ‘매일 아침 8시, 에세이를 보내드립니다.’


그렇게 조금씩 쓰다 보면 당신의 글을 보는 사람이 생겨날 겁니다. 잘 쓰는 건 그때 생각해보자고요.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혼자서 보는 글은 글이 아닙니다. 글을 ‘잘’ 쓰고 싶어요 라는 말에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글을 읽은 누군가로부터 ‘글이 너무 좋아요!’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겁니다. 작가라는 존재의 가장 밑바닥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마감을 만들고, 선언하고, 쓰세요. 이 방법이 글을 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3매의 글을 쓰고 싶다면, 매일 3매의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세요. 음식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면 매주 목요일 음식에 관한 10매의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세요. 쓰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쓰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소파에서 일어났다면, 나가서 무얼할까 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쓰세요. 왜냐하면 아무도 안 읽으니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최갑수는 작가지만 요즘에는 기획 일을 더 자주 한다. 새벽 3시부터 오전 8시까지는 작가로 살고,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기획자로 산다. 그의 일과 일상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ssuchoi를 들여다 보자.

📎 Words | 질투에 관하여

약간의 질투는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기기 위해 더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니까요. 하지만 큰 질투는 자신을 갉아먹습니다. 과한 상상이 질투를 만드는 것 같아요. 살아 보니 내가 질투했던 그들이 나보다 대단한 존재가 아니더라고요. 다만 그럴 것이라고 상상했을 뿐이죠. 그들 역시 아프고 외롭더라고요. 우리는 모두 똑같이 불쌍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질투에 사용할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훨씬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적의는 한기와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적당하게 와 닿으면 상쾌할뿐더러 건강을 유지하는데도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적의를 질투로 바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 alone&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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