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2)

참아, 버텨, 원래 그래

By 이대호 · 2024. 5. 26. · 웹에서 보기

대학생들 앞에 선 꼰대호

누군가가 조언을 구했을 때 ‘참아, 버텨, 원래 그래'라고 말하는 일이 많아졌더라고요. 꼰대의 언어라고 생각했던 말들입니다. 근데 제가 그렇게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자 위기감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저를 꼰대로 만들고 있을까요? 꼰대 되기 싫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꼰대 알람

계뿌클 동료에게 꼰대질 중인 이대호

얼마 전 사회초년생인 L이 고민 상담을 청해왔습니다. L의 고민은 ‘회사의 의사결정이 비합리적이어서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 잠재적인 가치와 실현 가능성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의 의중’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봤을 때 가망성도 없고, 완성도도 부족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납득이 안 간다고 합니다.


L은 여기가 첫 직장이나 다름이 없어 회사가 원래 이런 것인지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제게 묻기 전에 직장 경력이 많은 아빠한테 여쭤봤는데 “회사가 원래 그래, 그냥 다녀!"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저에게는 다른 대답을 기대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금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답했습니다. “음… 아마 많은 회사들이 그럴걸요?”


그리고 ‘꼰대 타임'을 시작했습니다. (큰 회사 안 다녀본 주제에) 큰 회사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크다느니 (그 업계 경험 없으면서) 업계가 정체기에 접어들어 뾰족수가 없으니 모험하기보다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안전하니 어쩔 수 없다느니 (재무제표도 안 보고) 비합리적 결정을 해도 버틸 만큼 튼튼하다는 뜻이니 열심히 다녔으면 좋겠다느니, 한참을 신나게 떠들었습니다

우리를 꼰대로 만드는 요인들

가끔은 크로플도 사주며 꼰대 노릇하는 이대호

L과의 통화 이후 위기감을 느낀 저는 ‘무엇이 나를 꼰대로 만드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 경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저의 꼰대력을 무력무력 기른다고 생각합니다.


  • 신나게 말해도 되는 상황
  • 형식적 권위 (나이, 직급 등)
  • 조언을 구하는 사람


신나게 말해도 되는 상황은 ‘강의'나 ‘발표' 같은 것입니다. 보통의 대화는 상대방과 대화 지분을 동등하게 가져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 반응을 살피며 관심 없는 주제 같으면 대화를 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강의, 발표는 덜 그래도 되더라고요. 반복되면 상대방 반응을 살피지 않고 말하는 데 익숙해집니다. 요즘 강의, 발표 기회가 늘고 있어 위험합니다.


나이, 직급 같은 형식적 권위가 쌓이는 것도 한 원인입니다. 형식 권위가 쌓일수록 말 안 되는 소리를 해도 대놓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 적어집니다. 그래서 자기 말을 교정할 기회가 점점 적어집니다. 동시에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늡니다. 꼰대를 ‘성의 없고 주제넘게 남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가르칠'(조언) 일이 많으면 꼰대가 될 기회도 늘어나는 셈입니다.

참꼰대의 길

고등학교 교실까지 찾아간 꼰대호

세 가지 요인의 공통점은 ‘(그로 인해)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결책은 피드백을 열심히 수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는 법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근데, 상대방 입장을 생각해야 하니까 친구에게 “맞아, 네 말이 옳아”를 반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어야 할까요? 그건 오히려 무책임한 것 같고 싫은데, 더 나은 방침은 없을까요?


정치학자 김영민은 ‘참꼰대'라는 개념을 제시해 이 문제를 돌파합니다. ‘참꼰대'란 성실하게 고민해서 정중하게 답변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경험에 빗대 지레짐작하기보단 상대방의 상황을 자세히 물어보고, 잘 모르는 부분은 엄밀하게 확인해서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인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정중하고 성실하게 답했으니, 받아들일지 말지는 상대 몫입니다.


‘참꼰대'의 개념에 빗대 L과의 대화를 복기해보자면, 결론이 달랐을 것 같진 않습니다. L에게 “그 회사가 이상하네, 빨리 다른 곳 알아보는 게 좋겠어. 너를 항상 응원해"라고 말하고 싶진 않거든요. 다만, L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조금 더 물어보고, 잘 모르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 “너를 항상 응원해"라는 말을 덧붙였어도 좋았겠네요.

사회 초년생 시절 자기가 꼰대 같아 보이는지 전전긍긍, 걱정 많은 선배가 있었는데요. 그때는 참, 왜 저렇게 유난일까 생각했으나, 그때 그 선배 나이가 되어보니까 알겠네요. 무서워! 무섭다고!


무서워? 참아, 버텨, 원래 그래 대호야.

ㅠㅠ... 꼰대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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