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캠핑이 좋아서 20 | 박찬은
해발 500m에서 즐긴 ‘나는 자연인이다’ 캠핑
아무리 회원들만 출입하는 비밀 캠장이라 해도 이렇게 찾아가기 힘들다! 아 맞지, 여긴 ‘인제 가면 언제 오나’의 그 ‘인제’였지. 해발 500미터 원대리에 위치한 ‘디지털 디톡스’ 농원 캠핑장을 찾아왔다 길을 잃었다. 데이터와 전화가 안 터지는 걸 보면 디톡스를 넘어선 ‘오지’가 확실했다. 급한 대로 숲길 아래를 향해 소리치며 일행을 찾아본다. “어디야? 내 목소리 들려?” 대답 없이 메아리만 돌아온다. 안테나가 뜨는 곳을 찾아 핸드폰을 치켜들고 있던 나는 유턴도 불가능한 좁은 산길을 덜덜 떨며 1킬로미터 가까이 후진을 한 뒤에야 캠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농원 정문을 들어서 관리실에서 멀어지니 휴대폰은 아예 불통으로 바뀐다.
회원들로부터 추천받아, 규칙에 동의하는 이만 받는 이곳은 한 귀농귀촌 운동가이자 생태운동가인 캠장이 수백만 평의 국유림 속에 한 땀 한 땀 만들어 놓은 팜핑(Farm+camping, 농촌 체험을 하면서 캠핑하는 것)’장이다. 보통 사이트당 사용료가 5~7만 원에 달하는 일반 캠핑장과는 달리 입장료 및 농산물 수확 체험료로 1만 5,000원을 내면 직접 수확한 농산물로 ‘팜 파티(Farm-party)’를 즐길 뿐 아니라 독립된 사이트에서 캠핑을 즐길 수 있다. 현대식 화장실과 전기 시설 대신 바가지로 드럼통에 받아놓은 빗물로 샤워하지만, ‘부시크래프트(bushcraft,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아웃도어를 즐기는 레포츠)’ 캠핑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진정 ‘쎈’ 캠핑을 해보고 싶은 이들의 버킷 리스트이기도 한 곳.
해발 500m에선 디지털도 강제 디톡스
오프로드 경기가 열릴 정도로 험한 임도를 헤매며 너덜너덜해진 자동차 바닥처럼 내 멘탈도 너덜너덜해졌다. 그러나 숨 쉴 틈도 없이 오리엔테이션과 농산물 수확 체험이 이어진다. 이곳을 첫 방문하는 캠퍼들은 일단 의무적으로 캠장님의 OT에 참석한 후, 농산물 수확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농원이 바쁠 땐 현수막 달기나 가구 나르기 등 ‘10분 일손 돕기’도 필수. 신병교육대에 막 입소한 사람들처럼 다소곳이 손을 모은 우리 앞에 캠장님이 '피바다 조교'처럼 등장했다. 그는 특전사로 10여 년 가까이 일한 직업군인.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게 된다.
“시끄럽게 마시고 먹기만 하다 가는 캠퍼들은 강퇴입니다. 여긴 전체가 자연생태휴양농원으로 잔디 위 차 바퀴 자국을 남기거나 무단 화로대 사용 및 장작 패기로 잔디를 훼손하면 강퇴예요. 샴푸와 세제 쓰시면 안 되고, 동물이 못 먹는 음식물 쓰레기는 퇴비장에 버려주세요.”
이미 온라인 카페에서부터 서슬 퍼런 붉은 볼드체 글씨체로 10개 규칙에 ‘서약’하라는 다소 경직된 분위기를 접한 뒤였다. 각종 금지 사항과 회원 강등 및 탈퇴, 강제 퇴거 등 캠퍼들을 주눅 들게 하는 살벌한 경고 메시지와 길어지는 한여름 OT에 순간 캠핑의 동력을 잃었음을 고백한다. 쉬러 와서 이 무슨 ‘강철부대’인가. 음식물 쓰레기를 한 조각이라도 잘못 버리면 <테이큰> 속 리암 니슨처럼 날 추적할 것 같은 원장님을 뒤로 하고 감자 밭으로 향했다. 나, 혹시 새우잡이 배 탄 건가?
작게 한숨을 쉬며 호미로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런데 왠걸, 이거 왜 재미있냐. 땅 속에서 호미로 동글동글한 감자를 캐내는 것이 왠지 좁은 콧구멍 사이로 오래된 코딱지 파내듯 통쾌함을 선사한다. 검은 비닐봉지를 덮고 엄폐 중이던 알감자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처연하게 몸을 내어 주었고 난 침낭 말 듯 빈 비닐 봉지를 돌돌 말아나갔다. “똑똑” 소리를 내며 손톱 끝으로 깻잎을 따는 소리, 딸 때마다 휘청대는 방울토마토 덩굴의 탄력은 또 어떤가. 도시 마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큼지막한 오이와 호박, 가지를 계곡 물에 씻으니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제야 캠장님이 왜 직접 농산물을 수확해 보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난 북유럽 어딘가의 산장에서 직접 수제 요거트를 해먹는 여자처럼 익숙하게 호박 전을 부쳤다. 피폐한 도시생활을 접고 자연 속에서 안식을 얻은 <킨포크> 속 명상가처럼 핸드폰 따위는 어디 처박혔는지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