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태완을 위해 다시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와 인권연구소 김사강입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2006년에 만난 중학생 꼬마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강태완입니다. 태완은 다섯 살 때 엄마를 따라 몽골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미등록 이주아동이었습니다. 몽골 이름 Taivan 대신 태완으로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고 이주와 인권연구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건 태완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어가 모국어이고, 한국을 우리나라라고 배우며 자란 태완 같은 아이들이 체류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언제라도 쫓겨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이 현실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연구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기 위해서 싸우는, 연구하는 활동가, 활동하는 연구자가 되었습니다.

 

2021년 7월, 스물아홉 청년이 된 태완은 몽골로 자진출국했습니다. 법무부가 자진출국 신고를 하고 본국에 돌아가는 미등록 이주민들에게 다시 입국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태완이 몽골에 가기 직전, 저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의 노력 끝에 법무부가 미등록 이주아동 구제대책을 발표했습니다. 국내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에게 체류자격을 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완은 국내 출생이 아니라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불안해하며 태완은 몽골로 떠났습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태완은 2022년 3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단기체류 비자를 받고 들어왔기 때문에 어서 빨리 안정적인 체류자격으로 변경해야 했습니다. 태완이 몽골에 있는 동안 저희는 법무부에 구제대책의 대상 요건을 완화해 달라고 요구했고, 결국 구제대책은 국내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주아동들에게도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경기도에 있는 한 대학의 전자공학과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상태였던 태완도 구제대책을 신청했고, 마침내 유학(D-2) 체류자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온 지 25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등록증을 받고 기뻐하던 태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태완은 올해 3월 전북 김제에 있는 전기 특장차 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전북 김제로 간 이유는 법무부가 지역특화형 비자 사업이라는, 인구소멸 지역에서 취업하는 외국인에게 거주(F-2) 체류자격을 부여하는 사업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완은 6월 말에 「체류자격: 거주(F-2)」가 찍힌 외국인등록증을 받았습니다. 외국인등록증을 사진으로 찍어 저에게 보내며 태완은 김제로 놀러 오면 한우를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저는 태완을 만나러 세 번 김제에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10월 19일이었습니다. 법무부 구제대책의 종료를 앞두고 구제대책의 지속을 요구하기 위한 캠페인을 준비 중이었는데, 그 캠페인에 태완의 인터뷰 영상을 넣고 싶어 만난 것이었습니다. 태완의 인터뷰를 찍으며 우리는 정말 즐거웠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긴장하는 태완을 제가 놀리면, 태완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태완이 체류자격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헷갈려하면, 제가 옆에서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정말 많이 웃었습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우리는 드디어 한우를 먹으러 갔습니다. 그리고 태완의 일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태완은 특수 차량의 자율주행 협업 제어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대학에서 배운 것과는 수준이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하지만 매일 매일 새로운 걸 배우고 있어서 좋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대구에 가서 박람회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연구원 중에 혼자 간다고, 박람회 때 잘 설명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어떻게 하면 말을 잘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태완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전문 지식이 점점 쌓이면 말은 저절로 잘 할 수 있게 될 거라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기차 시간에 쫓겨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2024년 11월 8일, 저는 대한직업환경의학회에서 이주노동자의 건강과 안전보건에 대한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에 태완이 많이 다쳐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당장 가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 학회 장소에 막 들어갔을 때 태완이 사망했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새로 개발한 10톤짜리 장비를 테스트 하다가 몸이 끼었다고 했습니다. 온몸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신없이 발표를 마치고 김제로 출발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김제 특장차 제조공장에서 30대 몽골 출신 이주노동자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저에게 태완은 이주노동자도, 몽골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태완은 이주아동이었고, 한국어밖에 못하는 군포 출신이었습니다. 저는 태완의 성장을 지켜보았고, 태완과 태완 같은 이주아동들이 한국에서 체류하며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아가며 지난 18년간 활동해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태완에게 Taivan이라는 이름이 찍혀있는 외국인등록증이 아니라, 강태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주기 위해 활동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완이 떠나버렸습니다. 저는 이제 무엇을 위해 활동해야 할까요.

 

태완은 저에게 정말 자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죽으면 저를 추억하면서 눈물을 흘려줄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 갔습니다. 허망하다, 비통하다, 참담하다라는 말로는 제 심정을 다 표현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태완이 남기고 간 숙제가 있기 때문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태완이 당한 사고가 철저히 조사되고, 진상이 밝혀지고, 책임자가 처벌받고, 다시는 이런 억울한 죽음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태완은 사고가 나기 일주일 전 차를 사서 군포까지 올라가 엄마를 태워드렸다고 합니다. 태완이 그토록 원했던 바를 이루고 가서 다행입니다. 행복할 때 떠나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제 마음을 다독입니다. “태완아, 늘 그래왔듯이 내가, 그리고 나와 함께 하는 활동가들이, 되게 할게. 너는 아무 걱정하지 마. 국적과 체류자격을 따지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고 있어. 우리 다음에 또 만나자.” 

산재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경찰과 노동부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겠다고만 합니다. 이후 산재사고 수습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태완을 위해 지치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카카오뱅크 3333-21-0810349, 예금주 김사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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