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15. 노가리 클럽 우수 에디션 : 우수 맞이 우수 작품 모음집

우수 雨水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말로
이제 추운 겨울이 가고 이른바 봄을 맞는 시기를 뜻합니다.
이 무렵에 꽃샘추위가 잠시 기승을 부리지만,
금세 누그러져 봄기운이 돌고 초목이 싹틉니다.

눈이 녹아 비가 된다는 우수. 2023년 우수에는 비 소식이 있습니다. 절기를 절기답게 맞이하는 드문 행운을 누리겠네요. 새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본격적인 변화를 겪는 시기. 우수를 맞아 노가리클럽은 여러 변곡점을 그린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호는 운둔형 외톨이들이 방문을 나와 세상에 손을 내미는 과정을 그린 시사 다큐 <곰손카페>, 윻은 누군가를 살게 하는 작은 말과 관심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 <우아한 거짓말>을, 슬은 1만 평의 정원과 함께 진짜 여백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다큐 인사이트 : 인생정원 - 일흔둘, 여백의 뜰> 소개합니다. 노가리클럽 우수 에디션 시작합니다.

환영해요, 웰컴 투 곰손카페

SBS 스페셜 <곰손카페> by. 호


이 카페는 카페 내부를 볼 수 있는 창문과 출입구도, 편하게 앉을 테이블도 없습니다. 환하게 맞이해주는 직원의 얼굴도 볼 수 없어요. 오직 조그만 구멍 사이로 음료를 건네는 투박한 곰손만 마주할 수 있죠. 이곳은 곰손이 음료를 건네는 카페, 이름하여 곰손카페입니다.


작년 말 SBS에서 방영된 프로그램 <곰손카페>는 곰손카페가 오픈을 준비하고 영업하는 모든 과정을 담았습니다. 직원을 구하고, 메뉴를 개발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모습을 세세하게 담았죠. 곰손카페의 구인 조건은 단 하나였어요. ‘1년 이상의 경력자일 것’. 단 그 경력이 조금 남달랐습니다.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은 은둔 경력이었거든요.


무려 경쟁률 175:1을 뚫고 4명의 은둔 경력자가 모였습니다. 은둔 생활을 한 지 11년이 넘는 사람, 창문을 모두 가려 밤낮을 구별할 수 없는 채로 생활하는 사람, 밖에 나가는 것이 두려워 수돗물을 마시며 버텼던 사람, 무리한 다이어트로 섭식장애와 공황을 앓고 외톨이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죠.


이들의 목적은 하나예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 그래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저는 느리지만 꾸준히, 서툴지만 끝끝내 커튼을 걷고 음료를 건네는 그들의 손을 보면서 짜릿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들이쉰 숨에 갑자기 찬 공기가 들어선 것처럼요.


눈이 녹아 비가 되고, 앙상했던 나무에 푸른 새싹이 돋는다는 ‘우수’. 이 계절에 <곰손카페>를 틀어보세요. 그리고 곰손들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조금씩 움트는 과정을 지켜봐 주세요. 새싹은 관심으로 자랍니다.

"

세상은 오늘도 아름다워요.

봄이 오면 벚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세상이 푸르르고.

가을이 오면 울긋불긋 옷을 입고.

겨울이 오면 새하얗게 되죠.

저도 내일이 무서워요.

그치만, 다음 계절이 궁금해서

더 살 수 있어요.

"
- 곰손카페 손님이 남기고 간 편지 전문 


* SBS 스페셜 <곰손카페>는 SBS웨이브를 통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실타래를 자르지 않고 실마리로 풀어내는 마음

영화 <우아한 거짓말> by. 윻


<더 글로리> 보셨나요? 저는 요즘 눈에 불을 켜고 "브라보! 멋지다 00아" "나 지금 너무 신나"를 외칠 타이밍만 노리며 살고 있다는 말로 후기를 대신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스튜어디스 혜정이와 푼 돈으로 누군가의 하늘이 된 연진이를 보던 중 우연히 어떤 글을 봤습니다.

학교폭력 피해자가 자력구제를 하는 내용이었어야만 했는지와 이런 콘텐츠로 '사이다'를 느끼게 만든 현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가 주된 내용이었어요. 역시나 댓글에서는 여러가지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더군요. 글쓴이에게 공감하는 이부터 괜히 잘난척 하지 말라는 비난까지. 그 글들을 읽으며, 오래전 봤던 영화 <우아한 거짓말>이 떠올랐습니다. 

2013년 개봉한 <우아한 거짓말>은 김려령의 소설 '우아한 거짓말'을 영화한 작품입니다. 교복을 다리고, 반찬 투정을 하고, MP3를 사달라는 말이 오가며 여느 평범한 일상 아침 풍경을 다루던 영화는 막내 만지가 목숨을 끊으면서 순간 보는 이를 충격에 빠트립니다.  엄마 현숙(김희애 분)과 언니 만지(고아성 분)는 유서 한 장 없이 세상을 떠난 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언니 만지는 천지가 남긴 실타래에서 우연히 메모를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천지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은 몰랐던 천지의 이야기에 대해 알게 됩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천지가 내린 결말을 알고 있기에 보는 내내 모든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천지가 무너져내리는 순간마다 누구나 할 수 있었던 다정한 말 한 마디, 따뜻한 관심이 더 없이 아깝고, 속상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마다 엄마와 만지 역시 후회로 괴로워하죠.

영화 속에서 엄마와 만지가 엉킨 실타래를 풀듯 실마리를 찾아가며 엉킨 관계의 매듭을 풀어내는 과정은 괴롭지만 눈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가해자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이유'에 대해 천지 주변의 모두가 제대로 알고, 어떤 방식으로든 깨닫게 되니까요.

이러한 문제에 엉킨 매듭을 잘라 풀어낸 알렉산더 대왕의 해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함께 풀어내야 하는 문제죠. 천지가 남긴 실마리가 천지의 주변 사람들에게 새로운 실마리가 되어준 것처럼 말입니다.  

* 영화 <우아한 거짓말>넷플릭스, 티빙, 왓챠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수고가 깃든 정원을 나누는 마음

다큐멘터리 <다큐 인사이트 : 인생정원 - 일흔둘, 여백의 뜰> by. 슬


‘우수’라고 하니 <후르츠 바스켓>이란 만화가 떠오릅니다. (이렇게 나이가 탄로 나는 것이겠죠.) 사실 다른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는데 딱 한 장면만 생생합니다. “눈이 녹으면 뭐가 될 것 같아?”라는 질문에 “봄이 돼요!”라고 답하던 장면이요. ‘물이지’라고 즉답했던 감성 결여 문과생은 한참이나 그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더랬죠.


<다큐 인사이트 : 인생정원 - 일흔둘, 여백의 뜰> 편을 보면서 왜 눈이 녹으면 봄이 오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도입부부터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일흔둘 전영애 씨가 비 온 뒤의 정원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 위로 내레이션이 깔리는데요. ‘봄비가 오면 땅이 보슬보슬해져 일하기가 수월합니다.’ 


1만 평에 달하는 정원은 바라볼 땐 그저 아름답지만, 그 미려함을 지켜내기 위해선 직접 잡초를 베어내고 새 꽃을 심어 돌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존재를 건사한다는 건 까다롭기 그지없는 일이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요. 하지만 전영애 씨는 아이처럼 웃으며 말합니다.


“내가 공을 들이고 힘을 들이는 곳이 내 자리입니다.”


나의 수고가 깃든 자리에 결국은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다는 믿음. 세상 물정 모르는 생각이라고 의심해본 적 있었기에, 그렇게 말해주는 어른을 보는 것만으로도 조금 뭉클해지더군요. 


가장 놀라웠던 점은 ‘여백서원’이라는 커다란 공간에서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방은 딱 세 평에 불과하단 것이었습니다. 전기매트와 이불, 몇 벌의 옷, 글을 쓰는 노트북과 키보드. 나머지 모든 공간은 손님들이 방문해 자신의 여백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백’의 사전적 의미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남은 빈자리’입니다. 순서가 보이시나요? 저 역시 여백을 이렇게 이해해왔습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난 다음, 내 것 먼저 챙긴 다음 남는 자리가 있다면 그 여백을 나누겠다고요. 초록빛 뜰을 완전한 공백으로 비워둔 채 타인에게 먼저 내어주기로 택한 노학자의 마음의 정원, 그 크기를 저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다 헤아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백서원’은 혼자서 관리하는 통에 일반 방문객은 한 달에 딱 한 번만 받는다고 하는데요. <다큐 인사이트>가 다양한 각도로 고아한 정원 곳곳과 맑고 깨끗한 노학자의 얼굴을 잘 담아냈으니, 봄비가 오기 전 꼭 멀리서나마 여백서원을 즐겨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다큐 인사이트 '인생정원 - 일흔둘, 여백의 뜰'은 KBS, 웨이브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절기 레터] 올 해의 네 번째 마디

아침에 일어나면 기지개를 쭉 켭니다.  <캐나다 체크인>을 본 뒤 생긴 습관인데요. 효리 언니가 기지개를 켜면서 "이 자세가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을 한 후로 저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에게 기지개는 하루를 여는 신호이자, 스스로에게 건네는 기합 같습니다.

'우수'도 그런 것 같아요. 마치 세상 모든 것이 도약하기 위해 잔뜩 움츠려있던 몸을 깨우는 시간 같달까요. 비가 오고 난 후에 더 큰 폭풍이 올지, 화창하게 날이 갤지는 아무도 모르죠. 하지만 어떻든 봄은 온다는 것. 그러니 우수의 아침에는 기지개를 시~원하게 켜보세요. 무엇이든 맞닥뜨리겠다는 만병통치약 준비 자세를 취해보자고요!

From.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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