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해외 출장이라고 하면 뭔가 멋있어 보였다. 해외 출장. 얼마나 프로페셔널한 말인지. 단어를 읽는 것만으로도 멋진 이미지가 머릿속에 자연스레 떠올랐다. 반듯한 정장과 멋들어진 서류 가방, 여유로운 미소, 능숙한 영어 회화 등. 멋진 회의장에서 외국인과 웃으며 악수하는 그런 거. 마치 성공한 전문직을 떠올리듯 말이다.
딱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해외 출장을 다녀온 지금은 그게 전부 환상이라는 걸 안다. 아니, 세상 어딘가에는 출장지에서도 여유와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사실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내가 겪은 해외 출장은 불안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 번은 미국 입국 심사에서 붙잡혀 두 시간가량을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그 일은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하지만 돌아와서도 영어공부는 하지 않았지.)
직장 생활을 하면서 꼭 해외 출장을 가고 싶다거나 직장을 고를 때 해외 출장을 갈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기준 같은 건 없었다. 굳이 고르자면 해외니까, 갈 수 있으면 좋지 않나 정도의 호기심만 있었다. 해외 출장은 해외여행이 아니고, 가게 된 이유 같은 건 없다. 장소도 내가 고를 수 없다. 결국 해외 출장도 일이고 시키는 곳도 회사여서 그냥 가라니까 갔다. 연간 계획 수립 전에 나의 의사를 묻긴 했지만 더 정확하게는 나에게 여권이 있는지를 물었던 것 같다.
한번 출장을 가면 적어도 일주일 정도는 현지에 체류해야 했다. 다행히 크게 가리는 음식이 없는 탓에 먹을 걸로 고생한 적은 없지만 미국 출장에서는 늘 날씨로 고생을 했다. 겨울에 가면 한국보다 이른 칼바람으로 감기를 앓았고 이번엔 여름에 갔는데도 이상 기후로 내내 비바람을 견뎌야 했다. 여름인데 왜 이리 춥고 흐린 거냐고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자기도 이런 적은 처음이란다. 하, 머피의 법칙이다. 허름한 숙소 한 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쿨럭거리고 있으면 표류기가 따로 없다. 해외 출장 표류기.
현지에서 짊어지는 피로도 말이 아니다. 분명 같은 지구인데 몸이 더 무겁고 머릿속은 몽롱하다. 처음엔 단순히 시차 때문이겠거니 해서 멜라토닌도 먹어보고 안대도 써보고 아무튼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한번은 현지에서 만난 업계 관계자들에게 명쾌한 해답을 들었다. “집 나와서 그런 거예요. 집 밖에 있으니까 일상이 다 망가지잖아요. 아무리 쉬어도 제대로 쉬는 게 아니죠.” 그렇다. 어른들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었던 것이다.
이왕 불평 보따리를 풀었으니 해외 출장의 가장 안 좋은 점을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다. 날씨? 오케이. 피로? 오케이. 그것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업무가 두 배가 된다는 점이다. 출장이니까 평상시의 업무는 누군가 백업을 해준다? 물론 출장 전 회의에서 그런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얘기가 오가긴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휴가를 가도 백업이 안됐는데 해외 출장이라고 될쏘냐. 첫 번째 해외 출장에서 용감하게 전화 로밍 대신 데이터만 챙겨갔다가 쌓여있는 부재중 전화를 보고 그 다음부턴 제일 먼저 로밍 서비스를 신청하게 됐다.
업무 보고 시간도 한국에 맞추다 보면 결국엔 낮엔 현지 일과 시간에 일하고 밤엔 한국 일과 시간과 맞춰 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띠링띠링. 기진맥진하게 잠들었는데 한국의 일과 시간에 맞춰 명랑하게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를 들어본 사람만이 그 순간의 분노와 짜증, 허탈감, 어지러움을 안다. 근무 시간에 해가 지지 않는다고 상상해보라.
지금보다도 더 사회 초년생 시절. 해외 출장을 간다고 하니 유경험자들이 다들 덕담 한마디씩 건넸다. 절대로 열심히 일하지 마라, 이왕 간 김에 누릴 수 있는 건 누려라, 건강 잘 챙겨라 등등.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다. 누구나 해외 출장의 열정을 안고 갔다가 누더기가 돼서 돌아온 경험이 있는 것이리라. 시니어들이 더 이상 해외 출장은 가고 싶지 않는 얘기가 배부른 불평이나 너스레로 들리지 않는 이유다.
그래도. 욕을 이만큼 했지만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해외 출장을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회사가 출장비를 넉넉하게 줘서도 아니고, 해외에서 호화롭게 코에 바람을 쐴 수 있어서도 아니다. 내가 어떤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만큼 멀리까지나 왔다는 걸 물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데에 해외 출장만한 게 없어서다. 내가 이 먼 곳에서 뭔가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 그럼 자연스레 나를 여기까지 밀어온 건 뭘까 싶어진다. 일종의 성찰이 가능해 진달까.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면 멀어졌다는 게 꼭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종의 자기 긍정이다.
멀어졌다는 건 성장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게 해외 출장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념품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