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즐라탄이다』는 책 이름처럼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자서전입니다. 스웨덴 작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와 함께 썼습니다. 자서전이니까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인생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영미권은 자서전과 평전 시장/문화가 발달해서 의미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자서전이나 평전이 많이 나옵니다. 스포츠 스타는 자서전을 내는 대표 직군 중 하나입니다. 세 가지 이유 정도가 있습니다. 유명세, 특수성, 보편성입니다.
대형 스포츠 스타는 글로벌 규모의 유명인입니다. 유명인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건 인간의 당연하고 서글픈 본능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유명한 사람의 이야기라면 만에 하나 별로 재미있는 부분이 없더라도 사람들의 관심을 끕니다.
세상에는 유명하다는 이유로 유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유명세 자체도 대단한 재능의 결과라 생각하나 자서전을 쓰려면 유명세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하는 듯하긴 합니다. 유명세가 자서전의 모객용 향기라면 특수성이 자서전의 양념 정도 되겠습니다. 스포츠 스타는 그 면에서 남다릅니다. 스포츠 스타 중에서는 보통과 다른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유명하고 특수해도 우리같은 보통 사람에게 와닿지 않는다면 계속 읽힐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평전이나 자서전에는 결국 인간을 공감시키는 보편적 요소가 기술적으로 꼭 들어갑니다. 남다른 동기 뒤에는 남과 비슷한 욕구가 있었다든지, 남다른 성격 뒤에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든지 하는 식입니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자서전 역시 그렇습니다.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특수한 종류의 인간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예의 그 '즐라탄 어록'이 그 증거 중 하나겠습니다. 말은 말일 뿐이지만 즐라탄은 그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즐라탄이 어떻게 지금의 즐라탄이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특수한 면모에는 합리적인 부분이 있고, 그리고 분명 이 사람이 남다르다 싶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즐라탄은 괴짜 이미지가 강합니다만 저는 이 책을 읽고 역시 성공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일단 즐라탄은 관찰력과 기억력이 굉장히 좋습니다. 이 책에는 즐라탄이 젊을 때 겪었던 여러 가지 다툼과 싸움과 갈등의 순간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건 즐라탄이 많이 싸운 게 아니라 그가 그 여러 순간들을 아주 자세히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당시 순간을 고화질 카메라처럼 예리하게 관찰한 후 자세하게 표현하는 건 정말 남다른 능력입니다.
그가 남다른 에고를 갖게 된 데에도 경황이 있습니다. 즐라탄은 스웨덴 빈민촌의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표현을 빌면 "테이블에 우유 좀 줄래?"라고 상냥하게 말하는 집이 아닙니다. 그래서 즐라탄은 어릴 때부터 모든 걸 자기 힘으로 얻어야 했습니다. 싸웠다면 이겨야 했습니다. 싸울 때가 아니라면 언제 싸우고 언제 그러지 말아야 할 지도 스스로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면 에고가 강해져도 이상할 게 없죠.
동시에 즐라탄은 의외로 합리적입니다. 그는 책에서 몇 번씩이나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되 시키는 대로만 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언급합니다. 자기 고집을 지키는 동시에 남의 말도 잘 듣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말을 듣고 어떤 말을 안 들을지가 궁금해집니다. 거기도 기준이 있습니다.
이걸 기준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즐라탄의 기준은 '즐라탄이 들어보고 맞다면'입니다. 즐라탄은 합리적이니까요. 세상을 떠난 에이전트 미노 라이올라와의 첫 만남이 좋은 예입니다. 즐라탄은 역시 자세한 기억력으로 이때 만남을 복기합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겠습니다.
(미노) "당신은 자신이 꽤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즐라탄) "무슨 말이죠?
"당신이 차고 있는 금시계나 고급 재킷, 포르쉐를 보고 내가 '오, 이 사람 대단한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죠? 미안하지만, 전혀 아니에요. 우습기만 합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당신은 세계 최고 선수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엄청난 돈을 벌면서 이런 차림으로 한량처럼 놀러 다니고 싶습니까?"
"세계 최고가 되고 싶죠!"
"좋아요. 세계 최고가 된다면 다른 것들도 자연히 얻게 될 겁니다. 하지만 돈만 많이 벌 생각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알겠어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도 즐라탄은 미노가 마음에 들어서 당장 일하자고 합니다.
"좋아요. 하지만 나와 함께 일하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물론이에요."
"그럼 당신이 소유한 차량들을 처분하고, 시계들도 팔고, 지금보다 세 배는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요. 경기 기록이 쥐뿔만도 못하니까."
즐라탄은 이 말을 다 인정하고 고칩니다. '골을 많이 넣지 못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었고, 너무 나태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지적도 맞는 소리였다'면서요. 즐라탄다운 동기부여랄까요. 이런 에피소드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더러 최고라고 말하면 듣기 좋지 않아요?"
"그렇죠, 뭐."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당신은 최고가 아니거든요. 당신은 쓰**에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쓰**는 당신이지. 잔소리밖에 할 줄 모르면서. 당신이나 갈고닦으시지."
"* 먹어."
"당신이나 * 먹어."
같은 이야기를 한 뒤 즐라탄은 각성합니다. "즐라탄, 넌 쓸모없는 놈이야. 쓰레기라고. 네가 생각했던 실력의 절반도 못 돼! 더 열심히 훈련해야 해."
이게 뭔가 싶으나 스포츠는 결과의 세계고 즐라탄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결과를 냈습니다. 실제로 즐라탄은 긴 선수 경력 동안 플레이 스타일이 달라집니다. 선수 초기의 즐라탄은 화려한 드리블러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신체 사이즈와 힘을 키워서 몸싸움에도 밀리지 않고 골을 넣는 선수가 됩니다. 나이가 든 후에도 신체 건강을 유지하며 활동량을 줄이고도 중요한 골을 넣습니다. 무엇보다 몸은 노쇠해도 마인드는 여전하니 라커룸과 벤치에서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는 선수가 됩니다.
하나 더. 즐라탄은 잊지 않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요. 자신과 안 좋았던 감독이나 선수들은 책 안에서 노골적으로 비판받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어릴 때 살았던 스웨덴의 빈민가도 잊지 않습니다. 그가 어릴 때 살던 동네인 로센고드의 어느 다리에는 그런 말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로센고드에서 한 친구를 데려갈 수는 있어도 그 친구에게서 로센고드를 빼앗을 수는 없다."
이 책은 즐라탄이 그 말이 적힌 다리 아래를 다시 찾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어릴 때의 즐라탄은 이 다리 밑을 전속력으로 달렸다고 합니다. 무서워서, 저 멀리 보이는 가로등 불빛만 보며 이 어둠을 빠져나가기 위해서요. 그렇게 달린 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선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2012년까지의 즐라탄에 대한 책입니다. 축구를 안 보시는 분들이 많을 테니 즐라탄의 다음 삶을 짧게 말씀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즐라탄은 그 이후에도 영국, 프랑스 등 유럽의 톱 레벨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갑니다. 최상급 선수들은 요즘 은퇴 전 미국에서 몇 년 뜁니다. 즐라탄도 LA에서 2년을 뛰나 다시 AC 밀란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의 밀란 복귀 3년만에, AC 밀란은 다시 이탈리아 리그에서 우승합니다. 즐라탄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라커룸 스피치에서 성숙하면서도 여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국어 자막은 여기).
이탈리아 리그에서 우승한 후 즐라탄은 몇 가지 사실을 알립니다. 그는 6개월 동안 무릎 십자인대 없이 시즌을 소화했다고요. 매일 진통제를 먹었고, 팀 훈련에 10회밖에 참가하지 못하고, 거의 잠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때 즐라탄은 하나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내 동료들과 고치들을 이탈리아 챔피언으로 만들겠다고요. 그렇게 약속했기 때문에. 좀 느끼한 말 같기도 합니다만 스포츠는 결과의 세계입니다. 즐라탄은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우승을 친구이자 에이전트 미노 라이올라에게 바친다고 말합니다. 즐라탄은 역시 잊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으실 분이 많을 듯해 책 내용을 많이 요약했습니다만 책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한참 더 많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책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즐겁게 읽을 분은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읽으시는 당신이 누구신지에 따라 이 책의 재미가 크게 달라질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