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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001  |  2023. 11. 01.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은 지적 호기심이 많은 분이 틀림 없습니다. 

오늘 소개할 제인 맨스브리지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명예교수는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입니다. 민주주의 국가에 살지만 정작 ‘민주주의’란 말은 헤엄치기에 너무 넓고 어려운 바다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이론’은 이해하기 힘들거나 따분함의 대명사입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놓지 않은 채 그녀의 강연을 되씹는 데 조금만 시간을 투자한다면 당신은 분명 지적 확장과 적지 않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아시는 것처럼 내년에 총선이 있죠. 미국에선 대선이 있습니다. 이미 적대주의가 가장 심각한 두 나라에서 갈등이 증폭될 수 있는 위험한 시간표입니다. 유럽에서는 전후 잠잠했던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위기와 맞물린 경제위기 그리고 유럽과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미-중의 패권 경쟁이 우리 삶을 포위한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나침반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맨스브리지 교수의 메시지는 호기심을 넘어 우리 삶의 조건과 결부된 문제입니다.

위기라 불리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세계적 석학이 지난 10월11일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하는 아시아미래포럼에서 ‘민주주의 위기의 근원’을 주제로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요? 자, 이제 레터를 한번 읽어볼까요.

'다중위기 시대: 공존의 길을 찾아'를 주제로 열린 제14회 아시아미래포럼 현장.  김정효 기자

발제 중인 맨스브리지 교수. 강창광 선임기자 

민주주의 설계사 제인 맨스브리지 

요한 쉬테상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정치학계 노벨상이라 불릴 정도로 권위 있는 상이지만 솔직히 저에게도 낯설었죠.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정치학을 가르쳐온 맨스브리지에게 2018년 이 상을 준 요한 쉬테 재단은 예리하면서도 깊은 헌신으로 직접 및 대의 민주주의와 페미니스트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시켜줬다고 평가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미국정치학회에서 주는 벤자민 E. 리핀콧상을, 2년 전 국제정치학회에서 주는 칼 도이치상 등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적대적 민주주의를 넘어’(Beyond Adversary Democracy)를 펴냈죠.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정치학회에서 여성으로서 드물게 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민주주의 설계사입니다. 18세기 고안된 민주주의 모델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재설계 해야 한다고 끊임 없이 주장해왔죠.

10월11일 아시아미래포럼에서 한 맨스브리지 강연도 민주주의 모델의 재설계도를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강연을 크게 세 갈래로 나눠봤습니다.

① 자유 사용재(Free use goods)와 상호 연관성의 증대

서울 아니면 런던이나 파리의 18세기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세요.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를 자주 왕래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고 다리와 터널을 통과합니다. 기차도 마찬가지죠. 전철을 싼 값에 때론 공짜로 이용합니다. 벽지에도 전기가 닿고 전화가 가능합니다. 

맨스브리지 교수는 누군가가 노력이나 비용을 들여 생산한 뒤에는 누구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재화를 뜻하는 자유 사용재 개념으로 강연을 시작합니다. 자유 사용재는 도로, 교량, 터널 등만이 아니라 국방, 법과 질서, 교육, 보건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상호 연관성이 많아진 세상에서 더 많은 자유 사용재가 필요하다는 건 설명을 보태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돈벌이가 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자유 사용재는 대체로 국가가 생산합니다.

② 무임 승차자와 규제 그리고 정당성

경제를 잘 모르시더라도 자유 사용재 생산에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든다는 사실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런데 공짜로 점심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무임 승차자라고 불립니다. 친구와 자취를 하는 데 방짝이 아무것도 안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혼자서 독박 설거지, 음식, 빨래, 청소를 한다면 아마 결별하고서 새로운 짝을 찾겠죠. 새 짝과는 규칙을 정할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유 사용재가 많아지면 국가의 규제가 많아집니다. 상수원에서 수영이나 빨래를 하면 과태료가 매겨질 겁니다. 고속도로 위에서 달구지가 달릴 수 없게 하거나 고추를 말릴 수 없도록 하겠죠. 뭘 못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금을 걷도록 하거나 국방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것도 규제의 영역입니다.

맨스브리지는 지금과 비교할수 없을만큼 적었던 상호의존성과 자유사용재가 있던 18세기 환경에서 설계된 지금의 민주주의 모델의 한계를 말합니다. 상호의존성 증가로 인한 자유 사용재가 크게 늘어나면서 국가의 규제 또한 늘어났지만 과연 국가의 정당성은 늘어났을까요? 그녀는 ‘아니오’라고 답합니다. 지금 민주주의가 겪는 위기의 근원에 국가의 정당성 부족이 있다고 봅니다.

③ 숙의와 소통을 늘려야

강제성을 띤 규제를 촘촘하게 잘 짜서 늘리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이 때 맨스브리지는 행동경제학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명한 이스라엘 어린이집 사례를 끌어옵니다. 한줄로 거칠게 요약하면 부모가 아이를 늦게 찾아갈 때 지각비를 내게 하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되레 지각하는 부모가 많아지는 현상입니다. 예상하셨겠지만 돈을 내면서 일종의 ‘정당한 지각자’ 지위를 얻은 겁니다. 지나친 규제는 연대와 책임을 약화할 수 있습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규칙을 어기거나 규제의 틈새를 노리는 부패가 많아지면 국가의 정당성은 약화합니다.

그렇다면 상호 의존성 증가와 맞물려 늘어난 자유 사용재를 공급하는 국가의 규제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국가의 정당성 또는 합법성의 강화는 맨스브리지 교수의 문제의식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답은 어렵지만 간결합니다. 대의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출된 대표와 주권자인 시민의 양방향 소통을 늘리는 겁니다. 의회 연결(Connecting to Congress), 숙의 투표(Deliberative), 선거구 평의회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의회 연결의 미국 사례는 무작위로 추첨한 175명의 유권자가 인터넷을 통해 선거구 대표와 만나 선택한 이슈를 놓고서 토론을 합니다. 대표는 정책이 유권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 알게 되고 이해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과정을 거쳤을 때 정책이 갖는 정당성은 커지고 규제도 개선됩니다. 맨스브리지가 재설계하려는 민주주의 모델의 핵심 레시피(조리법)는 다름 아닌 숙의와 소통을 동반한 참여 확대입니다.

정치 양극화를 줄이고 시장주의를 경계하라

여기까지 읽으신 독자라면 모두 그녀의 강의를 쉽게 이해하셨을 겁니다. 그럼에도 아직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드는 분도 적잖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짧은 강연 외에도 대면 및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해한 그녀의 생각을 보충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론가인 그녀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이면서도 친숙한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자유 사용재가 많은 국가는 북유럽식 복지국가 유형에 가깝습니다.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국가로부터 더 많은 복지 서비스와 혜택을 누리는 국가들이죠. 소득세는 소득 구간에 따라 다른데 가장 높은 구간의 소득세율이 덴마크에서는 56%나 됩니다. 맨스브리지는 덴마크를 여행할 때 만난 택시 운전사와 나눈 대화를 들려줬습니다. 그가 소득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면서도 받는 혜택에 만족한다는 얘기였습니다. 그의 세금은 자유 사용재 확대에 쓰였고 그 또한 혜택을 누리고 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많은 세금을 부과하지만 규제의 정당성도 큰 나라입니다.

맨스브리지의 얘기를 좀더 확장시켜 볼까요. 많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정도로 정치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는 요즈음 덴마크는 정치 양극화가 가장 덜한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줄어야 ‘우리’(We-feeling)란 느낌이 커지고 복지국가에 대한 지지가 강해집니다. 상호 의존성이 커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란 느낌은 윤활유이자 마찰열을 줄여줍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큰 나라에서 공동체 구성원끼리 동질감은 클 수 없고 정치적 상대를 ‘적’으로 설정하기 쉽습니다. 불평등이 크면서 동시에 정치적 양극화로 시름하는 미국과 한국에서 관찰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자신이 속한 내집단(In-group)과 외집단(Out-group)의 구분짓기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불평등과 소셜미디어의 확산이 이를 강화시킨다고 맨스브리지는 지적합니다.

그녀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을 설계할 때 정치적 양극화를 줄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정당성 획득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시장주의 또는 시장근본주의(시장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주의(정치적) 양극화는 시장의 확장이 초래한 불평등과 자본주의 길들이기란 목표의 후퇴에서 기인합니다.”

아시아미래포럼 시작 전, 맨스브리지 교수와 인사 나누는 한겨레 최우성 대표이사.

나이는 위계를 정당화하거나 때론 차별로 작동합니다. 말하기 조심스러울 때가 많으나 제인 맨스브리지의 나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세계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그녀는 1939년 생입니다. 그녀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녀는 한겨레 아시아미래포럼을 포함해 세 곳에서 강연했습니다. 포럼에 참석하기 전 자신의 제자를 통해 한국 정치와 사회 관련 논문 10여 편을 읽고 한국을 더 잘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발표 전날까지도 청중의 특성을 헤아려 74쪽에 이르는 피피티 자료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하버드에서도 손꼽히는 교수법으로 정평이 나있는 교수 가운데 한 분입니다. 아마 성실이란 단어보다 매 순간 그리고 사람에게 성심껏 대하는 진정성이란 말이 이분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미 보스톤에서 인터뷰하기 위해 그를 찾아갈 때의 일입니다. 혹 저희 일행이 길을 잃을까봐 친절하게 메일로 안내하고 택시를 타면 꼭 전화하라고 거듭 안내했습니다. 인터뷰 뒤에도 마당 앞까지 나와 주거 단지를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뛰어가서 잡아 세워 태워줄 정도였습니다.

그녀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자유 사용재 개념을 건너뛰어선 곤란합니다. 그녀는 하버드 케네디스쿨 학생들에게 첫 수업을 할 때 으레 ‘자유 사용재’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무임승차 문제를 다루는 체험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보스톤에서 인터뷰한 뒤 통역이 자유 사용재 개념을 기자에게 제대로 전달했는지 확인했을 정도입니다.

그 뒤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녀에게서 메일이 날라왔습니다. 자신이 통역에게 시험치듯 물어본 건 아닌지 혹시 통역한 학생의 마음이 상하지 않았는지 물어왔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더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통역이 그녀에게 이미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고 전해줬습니다. 석학인 그녀는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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