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어 달 전엔 무엇을 보든 ‘구름’과 ‘우울’이라는 단어가 와서 박히더니 이제는 ‘꽃’과 ‘사랑’이 그렇습니다. 모니카 바렌고의 <구름의 나날>을 펴내고 한 달 만에 <사랑의 모양>을 내놓게 되었는데요. 구름에 파묻힌 여자로부터 이름 모를 하얀 꽃에 빠져든 여자로(어쩌면 한 여자일지도 모르지만요), 책 속 주인공을 따라 제 존재가 변모하고 구심점이 되는 단어가 달라져요. 저는 이제 사랑 채집자가 되었고, 사월엔 사랑의 여러 모양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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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봄바람은 ‘살랑살랑’이 아니라‘사랑사랑’이다. 물론 연속되는 ‘ㄹ’ 발음이 어려운 탓도 있지만, 봄바람이 주는 설렘과 사랑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봄바람이 사랑사랑 불고 나는 그것을 눈으로 쓰다듬으며 새로 태어나는 말들을 기다리고 있다. 언어와 언어가 포개지고 부딪치고 어긋나는 곳, 이곳이 사랑하는 나의 자리다.
-신유진 ‘아름답게 어긋날 용기’, <한겨레21> 칼럼에서 [링크]
나의 사랑하는 자리에서 화분들을 창가에 늘어놓고 해 바뀐 뒤 처음으로 창문을 종일 열어둔 날. 그러니까 봄바람 사랑사랑 불던 날의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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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원가가 자연적으로 진화한 존재라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쭈그려 앉을 필요가 없도록 딱정벌레 같은 다리를 가졌을 테고, 등에는 날개도 돋아났을 거다. 보기에도 예쁘고 화단 너머로 둥실둥실 떠다닐 수 있으니까.
-카렐 차페크 <정원가의 열두달>에서
정원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제 모양을 새롭게 그려본 사람의 문장. 정원가도 아니고 돌보는 식물도 몇 안 되는데 이 봄날엔 하루에도 여러 번 분들의 흙을 찔러보고 물을 주고 이고 지고 나르는 터라 팔이 좀 더 많이 달리고 길고 튼튼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낮의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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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달, 물방울, 산, 나뭇잎 등 동그라미와 삼각형의 모습을 자연에서 찾는 건 어렵지 않지만 사각형은 그렇지 않아요. 사각형은 인위적으로 가공된, 인류 문명을 상징하는 도형이라고 할 수 있어요. … 책이란 물건도 사각형의 범주에 속해 있을 때가 제일 안정적인 상태예요. … 그런데 플라뇌즈의 책들은 사각형의 배열을 벗어난 채 마치 울퉁불퉁하고 뾰족한 자연의 모습인 양 진열되어 있었어요. 책방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색다르고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이치코 ‘소소한 산-책’ 중에서
“쌓아놓은 게 무너지면 제가 치우면 되니까 편안하게 구경하세요.”
자연의 모양을 한 책방에서 사랑의 말을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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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모양은 수시로 자세를 바꿉니다. 빛처럼 흐르며 매일 새롭게 갱신되고, 발명됩니다. … 먹으려고 뜬 물을 식물에게 대신 줄 때, 그려지는 포물선의 모양. 그런 것들입니다. … 사랑은 사랑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립니다. 모든 순간은 순간으로만 남고 더는 기억되지 않아, 매일 밤 지난날들의 형체를 복기하곤 합니다. … 다만 스러짐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다시 불길이 이는 일입니다. 눈을 감고 흐릿해진 얼굴을 더듬으면 우리는 늘 새롭게 만날 수 있어서.
-강혜빈 ‘사랑을 발명하는 사람’ 중에서
… 바람은 들판에게 모르는 꽃의 이름을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태어난다는 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몸으로 이전과는 다른 이름 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 없는 목소리가 그리워서 사전을 펼쳐 열어 사랑이라는 낱말을 찾아보는 밤이 있다. 그러니까 사랑 때문이다 사랑 때문이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빛 그늘 어울림 속에서. 들판의 바람은 끊이지 않아서 슬픔 비슷한 것이 나뭇잎을 흔들고 있다.
-이제니 ‘영원이 너의 미래를 돌아본다’ 중에서
두 편 모두 <사랑에 대답하는 시>에 수록. <사랑의 모양> 속 장면들과 꼭 겹치는 글줄에, 감응으로 작고 짙게 요동친 밤의 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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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답하는 시>는 열다섯 명 시인이 사랑에 관한 시와 산문을 한 편씩 써 내려간 앤솔러지예요. 레터에서 소개했던 작가들 안희연, 목정원 시인의 글을 먼저 읽고 행여 여운 흩어질까 책을 내려놓은 채 오래 음미했습니다. 그러고 최근 다시 펼쳤어요.
사랑이라는 것에 모양이 있을까. 사랑은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다 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만나지 않은 채로 사랑할 수 있을까? 잡히지도 않고 생이 다할 때까지 영영 모를 것도 같은 그 감정의 형태를 시인들은 어떻게 포착하고 있을까요. 사랑에 관한 여러 질문들에 답하는 시와 그 시의 탄생 뒤에 펼쳐진 풍경을 담은 산문까지 서른 편을 모두 거치고 나면, 제 안에서 작은 물방울이었던 것이 비처럼 쏟아진 다른 물방울들을 만나 큰 웅덩이를 이루고 있어요. 새로운 사랑의 질문과 가능성이 고인 곳.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는데 너무나 사랑으로 가득한 그림책 한 권도 권해봐요. 김선진 작가의 <농부 달력>입니다. 농부 부부의 일 년을 그려냈는데, 다양한 사랑의 모양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농사일을 사랑하는 농부의 손길, 그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 또 농부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 마지막으로 그들을 향한 작가의 눈길까지. 읽을 때마다 더 좋아요. 할머니의 몸뻬 컬렉션도 저의 최애 포인트.
“제일 고운 걸로 한 장 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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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엔 각자의 소중한 단어가 무엇인지 질문했었는데요. 이달엔 그 단어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요.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아니, 어떤 단어의 모양이든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 없을 테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