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히만은 프로이센 최초의 검사가 되었던 철학자였다. 그는 실정법에만 매달려 세상의 이치를 바라보지 못하는 법학은 학문으로 전혀 무가치하다고 보았다. 다른 영역에서의 지식은 존재 앞에서 겸손하고 자중하지만 유독 법학에서만큼은 결함있는 지식조차도 존재를 압도하고 나선다면서, 입법자가 세 마디만 바꾸면 도서관의 모든 책들이 휴지가 되고 만다고 탄식한다.
그의 해결책은 비교적 단순하다. R. 예링이 국가의 최우선적 과제를 국민의 법감정을 읽어내는 것이라 하였듯이, 그 또한 실정법으로 하여금 민중의 건전한 감각에 터잡게끔 하는 것이 법학의 절실한 과제임을 강변한다. 학문이라는 불변의, 검증가능한 명제는 법존재를 가능케 했던 수많은 사회현상을 귀납함으로써 가능하며, 따라서 법학자와 법률가의 시선은 법조문을 떠나 그 법이 자리한 생태계를 제대로 주시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헌법주의자”를 자처하던 이가 검찰을 동원하여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급기야 친위쿠데타까지 일으켰던 사태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과거 법의 가변성을 맹신하고 그 변화의 추동력을 자신의 권력의지에 맞추었던 통치자들의 행태가 민주화를 말하는 오늘날에 그 가장 원시적인 모습으로 재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법은 만능임을 강변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권력의지에 종속시켰던, 그래서 귀걸이 코걸이 식의 법폭력을 양산하였던 비리한 법조인들의 집단이 자리한다.
최근 로스쿨제도가 정착되어가면서 한편에서는 법학이 고사한다는 아우성이 적지 않다. 로스쿨제도로 인하여 법학부 자체가 고사할 뿐 더러, 로스쿨에서조차 변호사시험에 매몰된 학생들이 그저 판례나 법조문 암기에 주력하는 바람에 학문으로서의 법학이 고사할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하지만, 키르히만이 성토하는 “법학”의 무가치성은 이미 사법시험시절 혹은 더 이전의 고등고시시절에서부터 우리의 현실이었다. 법은 가장 유효한 권력통제수단이며, 법학은 이런 법의 존재와 그 발현양태를 규정하는 최우선의 제도여야 했음에도, 권위주의체제 앞에서 그 “법학자”들의 존재는 거의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 로스쿨의 존재이유를 “풍부한 교양, 인간 및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유ㆍ평등ㆍ정의를 지향하는 가치관”(로스쿨법 제2조)을 갖춘 법조인의 양성에 두고 있음은 이런 질곡의 역사를 떨쳐버리고자 하는 작은 희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인문학적 이해와 사회과학적 가치관은, 당장 법률서비스상품으로 전용가능한 법지식과 법기술을 전수함을 주 목적으로 삼는 로스쿨에서 도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전단계, 일반 학부에서 도맡아야 한다. 법학의 영역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문사회학술의 몫이다.
로스쿨의 기초법이나 일반법이론 등의 영역은 인문학적 소양이나 사회과학적 비판의식을 법의 영역으로 재구성하는 매개학술의 성격을 가진다. 로스쿨의 원형인 미국의 대학에서 “법과 문학”, “법과 사회”, “법과 정치” 등의 교과목들이 실정법의 가변성을 뚫고 법의 제자리를 교육할 수 있음은 이를 대변한다. 인문사회영역에서 탄탄히 구축된 학술을 바탕으로 법을 그 시선 속에서 재구성해 나가는 작업들이 유효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주화가 되면서, 혹은 신자유주의의 질서가 이 땅을 관통하면서 법은 무엇보다 중요한 사회통제 및 통합의 수단으로 격상되고 있다. 하지만 그 법과 법권력을 전유한 법조인, 법률가들을 제어할 수 있는 기제는 여전히 미완성 상태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는 동전의 양면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면, 제대로 된 법치의 실현은 법권력의 담당자를 통제하는 것 이상으로 법 그 자체를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을 요구한다. 법조문 이전에 그 법을 둘러싼 민중들의 아우성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법원의 판결을 읽으며 세상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성, 법전에 명기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면서 주권자 국민을 떠올릴 수 있는 지성…. 문사철(文史哲)은 어쩌면 낭만이기 이전에 이 모든 것의 토대이자 민주적 법치를 향한 우리의 마지막 희망봉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