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르익는 열매들의 향연
말은 그대로인데 열매는 살이 쪘다. 혹은 너무 살이 찐 열매들이 햇빛을 이기지 못하고 잔뜩 주름을 머금었다. 저물어가는 9월. 반년 하고도 몇 개월을 꼬박 자라난 것들이 눈을 감는다. 눈을 감은 후 열매들은 어디로 갈까. 눈꺼풀 뒤에서 어떤 세상을 볼까. 말은 살 찌지 않는데 열매는 진다. 표현할 말이 없어 단어를 고르고 고르다가 눈을 감는다. 삶을 꼬박 살아낸 사람들만이 열매의 다음 길을 안다. 열매가 지고 나면 새로운 꽃이 핀다고 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 했어도 베껴쓴다.

오랫동안 베껴 쓴 이야기로 가을을 어렴풋이 이해해본다.
 무화과 예찬 /뭉곡



달콤한 것은 늘 유난히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여름에는 특히 과일이 그런 것 같아요. 안 그래도 바쁜데 더워서 더 정신이 없으니 단것은 뒤로 밀리기 일쑤인데, 과일은 쉽게 썩기도 하고 껍질을 까먹어야 하기도 하잖아요. 잘 뭉그러지고, 또 그만큼 기막히게 달콤한 것. 사치스러워요. 올여름 제가 제일 탐냈던 과일은 그중에서도 무화과였습니다. 사치스러운 부드러움이었어요.


무화과는 먹다 보면 입술이 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작년 여름에 갑자기 무화과를 먹다가 입술도 붓고 속도 쓰리길래 찾아보니까 무화과 껍질에 묻은 진액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껍질을 안 벗겨 먹으면 못 먹나, 하고 무화과 빵 같은 것만 찾아 먹고 있었는데 곁에서 껍질을 벗겨 주신 분의 배려 덕분에 이번 여름도 무화과를 실컷 먹으면서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대가가 과일의 달콤함엔 필요해요. 그렇게 입에 넣은 무화과는 코 뒤를 스치는 향과 함께 혀끝에서 금방 녹는데도 말입니다. 무화과는 다른 과일들보다도 훨씬 부드럽고(가지무침과 비슷한 질감인 것 같아요) 달고 우유 같은 향이 나서 정말 녹는다는 느낌으로 넘어가요.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꿀떡꿀떡 참 많이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위에 서늘하게 쌓입니다. 잘 씹히기도 전에 넘어가 버렸는지 아직 차가움이 느껴지는 상태로 무화과 과육들이 위에 쌓여요. 언제고 여름이 그렇지 않겠냐마는 이번 여름은 서늘한 고민들이 그렇게 쌓이는 시기였어서 무화과를 먹으면서도 탁한 생각들을 하곤 했습니다. 가령 이건 언제까지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과일은 생산지의 온도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것 중 하나이고, 지구온난화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만성질환처럼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고민이니까요. 이번 달의 첫 번째 메일링 글을 쓸 때도 큰비를 걱정했었는데 이후에 큰 태풍이 한 번 왔고, 또 오고 있다고 하잖아요. 지금 제가 삼키는 무화과는 내년에도 똑같은 농도로 달까 종종 생각했습니다.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고요. 이것 역시 달콤함의 값이겠지요. 값을 내야만 하고 낼 수 있을 때 내고 싶은 종류의.


하지만 이런 고민들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는 달고 맛있습니다. 사실 이게 과일의 특징인가 싶기도 해요. 무구할 만큼 맑고 많이 단 거요. 껍질을 벗겨낸 무화과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녹잖아요. 무화과는 꽃이 안 피어서 무화과라는데 그 꽃을 삼켰나 싶게 안에 씨 같은 게 몰린 부분이 있어요. 거길 훑을 때마다 얜 자기가 이런 상처를 갖고 있는 것도 모르고 속 없이 달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제가 무화과를 좋아하는 이유는 특유의 우유 같은 향 때문인데, 씹을 때보다 넘길 때 확 풍깁니다. 그때는 향이 하얗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상큼하고 깨끗하게 넘어가는 다른 과일들과 다르게 뭔가 선명하고 탁한 향이 나요. 그리고 혀에 단맛이 얼얼하게 남죠. 그전까지는 밍밍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리지만 저는 좋습니다. 여름에 잘 어울리는 맛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올해 무화과는 저의 여름 한복판에 놓인 오브제가 되었습니다. 감사하게 하루의 곳곳에서 껍질 깐 무화과를 한 그릇씩 받곤 했거든요. 아침에 먹으라고 받아 온 걸 저녁까지 남기면 수분이 많긴 해도 가장자리가 꼬들꼬들 마르는데, 먹어도 되나 싶지만 깨끗하다면 이것도 맛있습니다. 빵에 넣어 먹는 말린 무화과도 좋고요. 풋내가 날 정도는 아니라면 아직 다 안 익어서 약간 서걱서걱한 것도 좋아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즈음이면 무화과가 푹 익는데 이건 먹다 보면 거의 술 맛이 나요. 이것도 좋고. 무화과는 정말 여름 과일이라 먹다 보면 이렇게 여름이 지나가는구나 생각이 들어요. 이제 여름이 다 지나갔나 하는데 가 보려고 벼르고 있던 디저트 카페에서 또 무화과 케이크 판매 공지를 띄워 주셔서 제 여름을 맛보러 조만간 가야지 싶습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즐기고 나면 이제 다음 무화과는 내년 여름까지 기다려야만 하겠죠. 작년에는 무화과 철이 너무 짧아서 정신 차려 보니 없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렇게 길게 아쉬워한 것 같지도 않은데 올해 무화과가 왔고, 올해는 안 아쉬울 만큼 많이 먹었습니다. 제가 일 년씩 계절들에 익숙해져 갈수록 여름은 점점 길어지고 빨리 돌아오는 것 같아요. (이것도 온난화의 영향인가?) 언제 오나 헤아리고 있으면 늘 제 예상보다는 빨리 오더라고요. 가을과 겨울의 일들을 하면서 기다리려고 합니다. 가을의 과일들은 껍질과 과육이 좀더 튼튼하듯이 저도 조금 더 단단해져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요.


여러분은 이렇게 어떤 해의 계절 하나가 담기는 과일이 있으신가요. 계절을 기억하기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수박씨 /별림 


 아무리 말해도,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때때로 정의로운 선언이 그런 식으로 평가절하 되지만, 나의 경우에는 정의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수박 싫어’라는 네 글자가 세상을 바꿔주지는 않으니까. 나의 말이 없는 일 취급받는 건 단순히 개인의 기호가 가족 단위에서는 무시당한다는 진리를 넘어선다. 하기야 수박밭을 일구는 조부모를 두었다면, 수박을 싫어한다는 말이 ‘할머니 할아버지 미워!’ 정도의 효과를 발휘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내 나이를 꼬박 채워 수박을 먹어댄 올해 여름도 귀경길 차량에 올랐다. 벌써 부터 동생은 수박을 잔뜩 먹을 생각에 신났는데, 나 혼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온다. 이미 귀부터 시작된 지독한 멀미는 덤이다. 욱, 우욱, 괜스레 헛구역질하며 입을 가로막는다. 시골로 내려가는 길목마다 파릇파릇 피어난 풀들이 한가득이다. 할머니 냄새. 나는 생각한다. 어딘가 꿉꿉하면서도 산뜻하고, 그러면서도 오래된 나무와 풀 냄새를.

 

 시골에 내려가니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겼다. 엄마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수박을 잘랐다. 원래는 우리가 오기 전에 네모로 각지게 잘려있던 것들인데, 올해부터는 다르다. 할아버지는 수박을 예쁘게 자를 줄 모르고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엄마는 그걸 보고 ‘아버님, 다음에는 제가 할게요’라고 말했다. 깊은 한숨과 함께. 나는 차라리 수박을 안 먹길 바랐는데, 그건 너무 먼 기대였던 모양이다. 흰 접시에 작은 포크를 달아 나온 수박을 동생은 신난다고 집어먹고, 나는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함께 살았던 집은 작은 대청마루가 있는, 말 그대로 시골집이었다. 흙으로 된 마당 한쪽에는 장독대, 그리고 한쪽에는 다 늙은 백구가 묶여 있다. 벽틈마다 자라나는 야생풀들이 살랑거리며 풀 냄새를 만드는 시골. 동생은 수박을 잔뜩 먹고 퉤퉤, 씨를 뱉는다. 씨는 멀리도 날아간다. 어렸을 적 할머니는 늘 이 대청마루에 앉아 수박씨를 뱉었다.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도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곤 했다. ‘이건 쓰레기가 아니야. 수박에게 다음 갈 곳을 주는 거란다.’ 떨어진 수박씨는 땅에 묻혀 자라거나 양분이 되거나 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동생과 나는 수박씨를 꼭 할머니네 집 마당에 뱉었다. 그러면 다음 해에 자라난 풀이 그 수박이겠구나 싶었다.

 

 나는 포크에 찍힌 수박을 들고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땅에 할머니를 묻던 날을 기억해낸다. 거기에도 다음 갈 곳이 있을까. 나는 수박을 입에 가득 넣는다. 그리고 아삭거리며 씹는다. 다 자란 열매가 되어 수확되기까지 기다렸을 과즙들이 터진다. 내 눈물이 터졌던 그날처럼. 나는 아삭아삭, 수박을 씹고 수박씨를 마당으로 뱉어낸다. 그러면서 더는 네모나게 잘라지지 않는 수박과, 만날 수 없는 사람과, 그들이 떠나간 길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고 나도 수박은 여전히 싫다. 그래도 미워할 수는 없었다.

 수렴 /심연


 무화과無花果

 : *꽃이 없이 열리는 열매. 그러나 실제로는 열매 안의 꽃이 보이지 않는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은화과隱花果라고도 불린다. 어쩌면 가장 유명한 과일, 금지된 열매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을까. 누가 그것을 집어먹도록 충동질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베어묾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나 정말 모든 선악을 분별하게 해주는 치트키가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을 기어코 눌러보고 싶지 않을 텐데. 영영 모르는 척하고 싶은, 갈라서 열어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으니까.

 

 숨어 자라는 꽃에 대해 생각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황홀에 가닿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에 대해서도 역시 생각한다. 비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마침내 단것을 맛볼 때, 벌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을까. 혹은, 남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장소에서 사명을 수행하는 신성함에 대해서도 말해볼 수 있다. 은밀한 데에서만 조심조심 개화하는 봉오리는 어떤 모양일까? 단 하나의 목격자를 위해 피어나는 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러나 열매보다도 중요한 것이 또 있지. 벗은 몸들을 최초로 가려 주었던 그 잎사귀도 무화과에게서 난 것이었다고 한다. 보송하고 까칠한 이파리의 감촉을 상상한다. 열매가 떨어지기 전까지 그 줄기들에게는 우리 무관심했을 텐데. 가지 끝에서 부풀며 무거워지는, 심장 같은. 맛보는 순간 선악을 알게 된다는 그 과실에게만 집중했을 텐데. 가지가 없으면 뿌리가 없으면 꽃도 없고 열매도 없다. 그러니 불을 놓을 때는 마른 땅을 겨냥해야지.

 

 세상의 모든 꽃이 사라진다면. 세상의 모든 꽃을 불사른다면. 내부로 숨어든 무화과의 꽃만이 살아남을까. 무르고 달콤한 동굴 속에서 수없는 돌기로 피어나는. 만개할 즈음에는 이미 차폐되는 세계 안에서. 그런 불공평함에 감싸인 채로. 위험한 것들은 왜 늘 아름다운 빛을 떠안고 있을까.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들여다보면 왜 아찔해질까. 선악과를 삼키면 사랑도 분별할 수가 있을까. 사랑은 정말 선하기만 한 것일까. 낡은 질문들이 혀 아래에 고여 녹는다.

 

 어차피 지겹도록 달콤하다면, 선택은 하나다.

 

*위키백과

 미소 /자두


 차는 도심에서 벗어나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넓디 넓은 주차장 사이로 4층이나 될까, 싶은 장례식장 건물이 우뚝 서있었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푸른 들판뿐이라, 더욱 이질적이고 쓸쓸해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차는 그 장례식장의 주차장 한 귀퉁이에 멈췄다. 가족들이 차에서 차례로 내린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고, 아빠는 그런 엄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조용히 동생들과 그 뒤를 따랐다. 건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작은 TV 모니터가 하나 걸려있었다. 푸른 배경에 뜬 외할머니의 사진 옆에는 우리 가족들과, 이모, 외삼촌 가족의 이름이 할머니와의 직계가족 순으로 줄줄이 적혀있었다. 특히 손(孫)이라고 써진 아래에는 나와 동생들, 사촌들의 이름이 모두 구겨져 들어가느라 칸이 비좁은 느낌이었다. 거기에 써 있는 내 이름이, 가족들의 이름이, 외할머니의 이름이 모두 어색하기만 했다. 할머니도 우리 가족들이 이렇게 해서 한 자리에 모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셨겠지. 가족들이 모두 들어간 후에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 모니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뒤이어 도착한 외삼촌 네 가족을 발견하고서야, 나는 안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할머니를 모신 빈소는 바로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신발을 벗고 낮은 높이의 상이 줄을 맞춰 늘어진 접객실은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았다.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왼쪽에 위치했던 빈소보다는 넓은 편이었다. 안쪽에 마련된 분향소 한 편에는, 하얀 국화꽃이 잔뜩 쌓여있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상조 업체에서 나눠주는 온통 검은색으로 물든 상복을 받아들었다. 깃만 때 묻지 않은 하양인 것이 괜히, 눈에 거슬렸다. 여자 가족들에게만 나눠주는 하얀 리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져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했다. 저희들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언뜻 보면 미소였지만, 할머니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굳은 것만 같은 어색한 표정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저런 미소는 본 적이 없다.

 

*

 

 뜨거운 햇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날이었다. 새까만 빛의 머리카락은 그 빛을 다 흡수해 금방이라도 두피가 익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여름이라는 것을 알리는 매미가 쉴새없이 울어대며 짝을 찾느라 분주했고, 다 익은 매실이 지붕위로 툭, 떨어져 처마 끝으로 구르는 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나는 나무로 엮인 마루에 엎드려 누워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두 자릿수 곱하기 한 자릿수 문제를 암산하겠다며 고집을 부린지 얼마나 되었을까. 연필 뒷 꽁무늬를 이로 잘근잘근 다 씹어 아작을 내 놓으면서도 풀이를 적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연필로 백의 자리 숫자부터 적어 내린다. 양 옆으로 번갈아 도리질을 하며 불던 선풍기 바람이 나를 향했다. 풀어 헤친 긴 머리가 휘날려 얼굴을 덮었다.

 "그러게, 머리 좀 묶으라니까. 산발을 해서는. 쯧."

 머리맡에서 구멍 난 몸빼 바지를 기우던 할머니가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나는 머리를 왼손으로 쓸어 넘기며 들은 체 만 체 했다. 바람에 천이 휘날리기라도 할까봐 왼 발로는 바지 밑단을 밟고 손으로는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의 머리는 지금의 사진과 똑같이 온통 하얗게 세어있었다. 그렇게 머리가 다 세어버릴 동안 능숙한 손놀림은 언제부터였는지, 가끔 돋보기안경을 쓰고도 바늘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며 실을 꿰어달라고 하신 적은 있지만 정작 바느질을 시작하면 맨 손가락 한 번 찌르지 않아 피를 보는 일은 없었다.

 선풍기 바람은 할머니를 향해 돌아갔다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문제집 책장이 펄럭였다. 그 소리에 할머니는 곁눈질로 나를 들여다본다.

 "두 개나 틀렸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책으로 고개를 박는다. 그제야 나는 하나하나 풀이를 옆에 적어가며 셈을 해본다. 이십구 곱하기 육, 십육 곱하기 팔… 숫자 위에 올림표시를 해가며 다시 계산하는데 틀린 답은 하나도 없다. 다시 한 번 검산한다. 삽십팔 곱하기 이는, 이십삼 곱하기 오는…. 인상이란 인상은 다 찌푸리고 연필로 적은 숫자들을 노려보고 있는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퍼뜩 든다. 누런 이로 사과를 아작 베어 무는 할머니를 본다.

 "내가 곱셈을 어떻게 알어."

 "할머니!"

 바람보다 웃음소리가 호탕하다. 우리 할머니는, 점잖은 미소보다 시원하게 웃는 것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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