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좋아하는지 알아버린 뒤에는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는 말이 떠올라요.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버린 사람은, 그 마음을 무시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아요.

 

2주간 혼자 프랑스를 여행했어요. 막대를 들고 수맥을 찾는 사람처럼, 내 마음이 반응하는 지점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녔어요. 파리에서 니스, 아비뇽, 안시를 거치며 수많은 소도시들을 거쳤어요. 그렇게 35도의 더위 속에서, 1리터 생수통을 가방에 욱여넣고 걷고 또 걸었어요.

 

그러면서 저는 단순히 공간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색색이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구나, 싶었어요.

 

중세시대에 지어진 수도원을 개조한 독립 서점, 설렘과 고요를 점점이 찍어낸 고흐와 모네의 그림에 사로잡혔어요. 서점에 담긴 수도사들, 서점 주인,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느꼈을 고요함, 그림 속 파랗고 노란빛을 찍어내며 붓끝에 마음을 담았을 장면이 상상이 되었어요.

 

또 튈르리 공원에서 타는듯한 햇살 아래, 나무 그늘이 있고, 또 그 밑 의자에 사람들이 늘어져 앉아 있는, 그런 장면들을 앞에 자주 멈춰 섰어요. 가만히 책장을 넘기고, 사랑하는 이에게 한껏 기대고, 이런 몸짓들이 다 아름다워 보였어요.

 

애정하는 공간 속에 항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취향이 담겨 있었어요. 그렇게 공간이 사람과, 사람이 예술과 이어지며 하나로 꿰어졌어요.

도대체 어떤 마음을 붙잡고 살아야 하나, 안개같이 모호하던 시기가 있었어요. 이제 지나온 시간들에 연결감이 생기며, 나아갈 방향을, 빛 한 조각을 발견한 느낌이에요.

 

마침 세상 온갖 만들기에 대해 탐구하는 아무님도 만나고, <글자풍경>을 쓰신 유지원 님의 모임도 참여했어요. 두 분 모두 토박토박 관심사를 따라 걸어온 시간이 쌓여 아주 멋진 모습이 되셨어요. 저도 제 쪼대로 길을 내고 걸어가 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그렇게 인천공항에 내리자마자 미뤄둔 약속, 집들이, 운동 등으로 바쁘게 살았어요. 그러다 결국 늦잠 지각까지 해버렸어요. (동기가 서른이 되어서 자다가 출근 못 하면 어쩌냐고 했는데, 맞는 말이에요 ㅜ^ㅜ)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금방 또 제헌절 연휴가 되었어요. 지금 글은 그 연휴기간 동안 쓴 것이에요.

프랑스에 가기 전과 후 저의 삶을 요약본으로 기록해요.

 

6/6 집 앞, 시간이 멈춘듯한 야장에서

6/10 갑자기 오징어게임

7/3 산 넘고 물 건너 집들이

7/11 93세 할아버지의 생일은

7/6~ 바이브코딩의 세상으로

7/16 장어 오마카세

7/17 온 세상 만들기의 비밀

7/18 일본 문학의 세계로

- 모두의 마음속에 어린아이가 있다.

 

회사에서 종종 팀원들 간, 팀 간 교류를 하는 행사가 진행돼요. 이번에는 꽤나 본격적으로 체육관을 빌려 오징어 게임을 했어요. 체육관에 들어가자마자 구석에 앉아, 오늘은 종일 이렇게 있겠다던 대리님은, 딱지치기 원톱이 되셨어요. 다치지 말고 헐렁하게 하자던 조원들은, 줄다리기나 무궁화꽃이 같은 별거 없어 보이는 게임에 진심에 진심을 더해 참여했어요.

 

피크닉에서 하는 아무송 님의 ‘온 세상 만들기의 비밀’ 도록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누군가, 어린이에게 전시를 어떻게 관람하도록 안내하면 될지 물었어요. 답으로 어린이는 작은 어른이고, 우리의 마음속에도 어린이가 살고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냥 두면 된다고, 마뜨로쉬카의 마지막에서 가장 작은 완두콩들을 가만히 들여다본 기억 하나만 가져가도 충분하다고 하셨죠.

 

같이 강의를 들었던 언니에게 물으니 사람은 오랜 기간 어린아이인 것 같다고, 최근에서야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사건이 있었다고 했어요. 또 다른 이에게 물으니 마음은 늙지 않는데 몸이 늙는 거라고 건강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했어요.

 

어린이다움이 숨어 있다가, 작은 계기로 튀어나오는 순간들을 애정해요. 어린아이의 마음을 안전하게 펼쳐놓는 경험이 나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종종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 생일이라는 핑계

 

N번째 생일을 맞이하며, 꼭 크게 축하받아야 하고, 케이크는 반드시 먹어야 하고, 이런 집착이 사라지고 있어요. 그래도 괜히 눈인사만 하던 회사 동료들이 갑자기 쓱 다가와 "오늘 생일이시죠? 축하드려요." 하기도 하고, 만난 지 오래된 사람에게 톡으로 안부 인사가 오기도 해요. 그럼 이 사람의 마음속에 내 생각이 작게라도 한 조각 있구나, 싶어요. 옅어진 관계를 한 번 더 연결해 주는 날이구나 싶고, 지나간 인연들이 새삼스러워져요.

 

최근에는 저의 생일도 있었고, 저와 생일이 하루 차이나는 동생의 생일, 일주일 정도 차이 나는 외할아버지의 생일도 있었어요. 그리고 외숙모도 올해 환갑이 되어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축하해 드렸어요.

 

그 축하를 빌미로 모여서, 같이 밥 먹고, 좋아하는 옷이나 브랜드, 요즘 시시콜콜하지만 무겁기도 한 고민들을 나누고 그러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기념일은 그걸 핑계로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 같아요.

- 개발이라는, 또 다른 만들기 세상

 

새로운 기획이 하루에도 다섯 번 떠올라요. 어느 날은 시안북스테이에 오지 않은 사람에게 그 안에서 바라본 광덕산 풍경을 전달하고 싶었어요.

 

동그란 원을 그리며 빗방울이 떨어지는 여름, 중후한 광덕산을 배경으로 새들이 열매를 쪼아 먹는 가을, 폭닥한 눈이 테라스 위로 제법 도톰하게 쌓인 겨울, 마당이 조금씩 연한 초록으로 덮히는 봄, 이런 사계절 중 하나를 골라요. 그리고 나를 닮은 캐릭터를 데리고 북스테이의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노래를 듣게 하는 거예요. 그 장면과 함께 분위기를 잔뜩 잡고, 작업하는 모습을 상상해 봤어요.

 

그 외에도 어딘가 허술하고, 그래서 사랑스러운 기획들을 머릿속에 짓고 보수하는 게 즐거워요. 그런데 이제 내내 기획을 머릿속에서 굴리기만 하는 것에 질려버렸어요. 눈앞의 결과물로 보고 싶다! 는 스스로 압박하는 마음이 쌓이다가, 드디어 바이브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글을 쓰는 시점에 야무지게 도메인도 사고, 실 환경에 첫 화면을 배포했어요. 서비스 오픈 후에는 어떻게 마케팅할까 고민하며, 출시 이후 과정도 체계적으로 준비해볼게요.

벌써 스물세 번째 편지 겸 일기를 썼네요. 아카이브하고 회고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어쩌면 지금은 재경험에 더 큰 방점을 두고 있어요. 모자무싸를 벌써 세 번을 봤는데요. '친절은 인간의 기본이야'라는 흘러가는 대사가 새삼스럽게 다가오고,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쓱 반복되는 걸 눈치채게 되었어요.


오감으로 느끼는 것을 기록으로 한 번 더 곱씹는 과정은, 한 작품을 반복해서 보는 것과는 비할 바 안되게 많은 걸 발견하게 해 줘요. 호로록 지나간 시간에 나의 관점과 취향을 투영하며 더 섬세하게 보고, 풍부하게 연결되는 게 좋아요. 그래서 글쓰기를 놓지 않으려고요.


프랑스의 기록들도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요. 그럼, 다음 글에서 봬요! :3

귤껍질 드림
essayhee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