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란, 싱글에이트, 네가 혼자 있는 동안에, 플로우, 다잉, 모래 수영장에서 헤엄치기, 청설, 마이선샤인
2024.10.21. 월요일
남은 부국제 오늘 다 텁니다 (4/4)

🚨 <전, 란>의 주요 캐릭터에 관한 정보가 잘못 기재되어 해당 내용을 제외하고 10월 21일자 레터를 재발송합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2024 부국제를 중심으로 10월에 여기저기에서 본 영화들에 대해 총 네 편에 걸쳐 보내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부국제에서 만난 사적인 베스트와 워스트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요. 언젠가 이 영화들이 국내 극장에서 개봉하면, 혼자가 아니라 같이 떠들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약하면서. 찐 부국제 마지막 편,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전,란>(넷플릭스 스트리밍중)

🎥 <싱글에이트>(극장 상영중)

🎥 <네가 혼자 있는 동안에>(개봉일 미정)

🎥 <플로우>(2025년 개봉 예정)

🎥 <다잉>(2025년 개봉 예정)

🎥 <모래 수영장에서 헤엄치기>(개봉일 미정)

🎥 <청설>(2024년 11월 개봉 예정)

🎥 <마이 선샤인>(2025년 국내 개봉 예정)


10.

<전, 란 uprising>

김상만 연출ㅣ강동원, 박정민,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출연ㅣ126분


 2024 부국제 개막작 <전, 란>을 폐막 후 열흘이 지나서야 (집에서) 보았다. 넷플릭스가 투자, 배급을 맡았고 OTT 오리지널 작품으로는 역대 최초의 부국제 개막작으로 선정 됐다는 점은 작품의 홍보를 위한 소구 포인트였겠지만, 작품 자체에 대한 관객의 호오보다 부국제 개막작으로 매진이 되었다는 사실이 작품 공개 이후 더 많은 버즈량으로 이어졌다 느껴진다.


 먼저,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논외로 둔다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반드시 임진왜란이어야 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양반가의 하나뿐인 아들 ‘이종려'(박정민)와 그의 노예 ‘천영’(강동원) 간의 하늘도 눈물을 흘릴 우애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후, 그들이 휘두르는 분노는 시대를 초월한 일종의 게임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왜군에 대항하는 전쟁과 민심을 살피지 않는 왕위를 향한 반란. 이쪽으로 가도, 저쪽으로 가도, 죽은 목숨이긴 매한가지라면 과연 우리의 강동원은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선택과 집중이 무자르듯 쉽지 않다는 것. 그것이 ‘전’과 ‘란’ 두글자 사이에 쉼표가 놓여 있는 이유일 것이다. 강동원이 무적의 검술러라는 걸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때 즈음, 도구 없이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부터 바꿔버리는 여성 의병 ‘범동’(김신록)이 적절하게 극의 균형감을 잡아준다. 




11.

<싱글 에이트 Single 8>

코나카 카즈야 연출ㅣ우에무라 유, 후쿠자와 노아, 쿠와야마 류타, 타카이시 아카리 출연ㅣ112분


 부국제에 동행인이 있어 영화 앞뒤로 대화를 나눌 때, 혹은 내가 방금 보고나온 영화에 대해 SNS에 갓 따끈따끈하게 올라오는 리뷰들을 볼 때, 매 해 그 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이렇게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어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상 영화를 보는 사람 vs 언젠가는 영화를 만들고야 말 사람. 내가 8mm 필름으로 찍은 영화 같은 걸 보고 심장이 그리 뛰지 않는 이유는 철저히 전자에 해당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싱글 에이트>는 영화제의 공식 상영작은 아니었는데, 부국제 시즌과 맞물려 전국 극장 개봉을 한 영화 중 일정에 맞춰 빈 시간대를 메우기 위해 CGV 서면 지점에서 즉석 관람을 결정한 경우다. 마침, 리클라이너관(안락의자가 구비된 상영관)이기 때문에 다리를 쭉 뻗고 중간중간 밀린 잠도 조금 잤다.


 스토리는 이렇다. 1970년대에 개봉한 <스타워즈> 시리즈의 첫 편을 보고 감화된 고등학생들이 학교 축제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SF 디스토피아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극 중에 등장할 우주선은 조악한 소품이 아니라 진짜 우주선처럼 보여야 할 것 같고, 시각 효과도 그럴듯하게 넣고 싶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8mm 필름으로 찍고 또 편집해야 하는 것! 영화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바는 아니지만, 기술적 제약과 한계는 오히려 상상력을 폭발시키는 기반이 된다. 그리고 최소한의 수면 시간이 확보되지 않아도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며, 아무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라며 브레이크를 걸지 않기에 이들은 최강의 팀워크로 어떻게든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해낸다. '그래서 니네가 참 고생이 많다'는 감상이 든 순간 나는 스스로가 이 영화를 보기에 다소 부적절한 관객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영화를 만들고야 말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 영화를 사랑할 것 같다.




12.

<네가 혼자 있는 동안에 While You're On Your Own>

박소현 연출ㅣ신구, 미뇽, 장 고다르, 장 꼬망, 유자, 감자, 모모, 찡찡이, 보리, 메루 등 출연ㅣ39분


 엊그제에는 메가박스 홍대에서는 또 다른 영화제가 있었다. 제 7회 서울동물영화제에서 단편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았는데, 달팽이와 개미가 주연인 첫 번째 단편을 보고난 후 이어지는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 <네가 혼자 있는 동안에>에는 바톤 터치를 하듯 온갖 고양이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주로 10살이 넘은 노묘들이라는 것이다. 고양이 나이 10살은 어림잡아 인간 나이로 50대 중반에 해당한다고 하니, 집사는 집을 비우기 전에 그들의 심기와 건강과 행복을 거스르지 않는 방향으로 미리 고려할 것이 많아진다. 투약중인 약을 챙기고, 침이 묻은 사료는 두 번 다시 먹지 않기 때문에 사료를 세 그릇에 나누어 놓아야 하는 등 그런 일을 할 누군가를 위한 가이드라인은 결코 짧아질 수가 없다. 그리고 <네가 혼자 있는 동안에>에서 이 가이드라인은 단순한 문서의 형태를 띄지 않고 반려인이 반려묘와 함께한 생을 헐어서 쓰는 장문의 편지가 된다. 지금 집에 혼자 있는 ‘너’(고양이)를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함께 살아가는 삶의 모양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가 그 편지에 들어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박소현 감독은 집을 비운 반려인 5-6인의 집으로 가서 새로이 마주한 고양이 돌봄을 하기 전에 먼저 그 편지를 읽는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39분 밖에 안 되지만 너무 많은 인간과 비인간의 삶이 나를 관통한 후 빠져나간다. 우리가 반려인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정보는 서재에 꽂힌 책들이 거의 전부처럼 보이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인간의 삶’에 대한 디테일을 가늠하는 일을 그만두는 게 더 좋겠다는 결론에 닿는다.




13.

<플로우 Flow>

긴츠 질발로디스 연출ㅣ85분


 여기서부터는 다시 부산에서 본 영화들이다. 늘상 부국제가 열리곤 하던 10월 중에서도 폭염에 절여진 한 계절을 보내주고서 맞이한 올 10월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플로우>는 야외 상영관이자 약 2000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영화의 전당에서 봤는데, 전석 매진인데다 이 때 모두와 함께 모여서 같은 곳을 바라본 시간이 새삼스럽게 좋아서 ‘여기서 볼 수 있는 영화, 아무거나 하나만 더’ 하다가 그로부터 며칠 뒤 RM 다큐멘터리까지 보게 된 것이었다.


 <플로우>가 전석 매진이었던 이유중 하나는 올 상반기에 열린 제77회 칸 영화제의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초청작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애니메이션 계의 칸이라 불리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는 4관왕을 거머쥐었다. 고양이가 주인공인 무성 영화인데, 갑자기 홍수가 덮친 지구에서 고양이, 여우원숭이, 카피바라, 새, 리트리버 등등이 서로의 동선을 교차하며 마주한다. (별다른 설명은 없으나 인간이라고는 한 명도 없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는 걸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인데, 비슷한 상황에서 물고 뜯고 싸우는 <파이 이야기>를 떠올려보자면 <플로우>의 주인공들은 무척 현명하고 존경해야 할 존재처럼 보인다. 관련 인터뷰에서는 해당 정보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홍수, 배, 고래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창세기의 노아 대홍수와 요나서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겠다는 합리적 의심도 들었다.




14.

<다잉 Dying>

매티아스 글래스너 연출ㅣ라스 에이딘거, 사스키아 로젠달, 로날드 제르필드, 코리나 하르포흐, 릴리트 스탕겐베르크 출연ㅣ182분


 안타깝지만 이 영화는 부국제의 워스트였다. 시놉시스 예습도 내가 했고, 영화표 예매도 내가 했지만, 도대체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극장을 빠져나왔다. 세시간에 달하는 영화는 총 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죽어가는'(Dying) 인물들의 이야기가 연작 소설처럼 서로 포개진다. ‘죽음’이라는 교향곡을 쓰는 작곡가와 공연을 준비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캐릭터가 등장 인물 중 일부이기 때문에 그들이 그 곡을 스크린 속 관객들 앞에서 완성도 있게 시연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을 거라고 예상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다.


 죽음, 죽어감, 죽을 맛임, 죽다 살아났음, 그 무엇도 아닌 곳을 향하는 와중에 이 영화는 내게 시청각적으로 적잖은 괴로움을 안겨주었다. 그 중 백미는 치과 종사자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챕터였는데, 치과 의료 도구들이 자아내는 소음이 인물들이 대사에 섞여서 흘러나올 때 나는 내가 번번히 돌아오는 이번 차수 정기 스케일링 일정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더욱 괴로워질 뿐이었다. 놀랍게도 집으로 돌아온 후 며칠 뒤 아침을 먹다가 돌연 금니가 빠지는 사건이 생겼으므로 치과에 다녀와야만 했다.



15.

<모래 수영장에서 헤엄치기 Swimming in a Sand Pool>

야마시타 노부히로 연출ㅣ하마오 사키, 나카요시 레이아, 키요타 미쿠리, 하나오카 스미레, 미우라 리나, 사토 호나미 출연ㅣ88분


 올 여름 교토국제고가 고시엔 결승을 차지한 걸 보고 가슴이 뻐렁쳐댔던 나를 보란듯이, 이 영화는 고시엔을 끊임없이 곁눈질 한다.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체육 수업에 빠졌다는 이유로 교내 수영장을 청소하라는 징계를 받은 여자 고등학생들이 수영장 담장 너머에서 고시엔을 목표로 야구 훈련중인 남자 고등학생들의 존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대략적으로나마 이런 조건을 감안하고서 영화의 제목을 다시 살펴보자.


 원래 수영장이었던 곳이 바닥까지 물이 다 빠져있기 때문에 아무도 헤엄을 칠 수 없는데, 담장 너머 야구 경기장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수영장 바닥에 모래가 수북하게 쌓인다. 그래서 원래 ‘수영장’이었던 것이 임시적으로 ‘모래 수영장’이 된 건데... 청소를 하던 아이들은 거기서 ‘헤엄’도 친다.. ‘정말 이게 무슨 이야기지?’ 싶을 때 즈음이면 인물들이 저마다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장광설을 시작한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이 고등학교 시절 연극부에서 만든 연극을 영화화했다는 정보는 끊임없는 인물간의 대화를 이해하는데에 약간의 도움이 된다. 그렇다고해도 나는 이 영화를 ‘여름 청춘 영화'라며 함부로 추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16.

<청설 Hear Me : Our Summer>

조선호 연출ㅣ홍경, 노윤서, 김민주 출연ㅣ110분


 동명의 대만 영화를 조선호 감독이 리메이크 하면서, 홍경, 노윤서, 김민주 등의 라이징 스타 대열에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 했다. <우리들의 블루스>, <일타 스캔들> 등에서 주연으로 분하며 꾸준히 인지도를 쌓고 있는 노윤서 배우의 연기에 대한 기대치가 가장 높은 상태였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세 사람의 합이 더없이 좋았다. 세 인물이 수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장면이 영화의 전체 러닝타임중 체감상 7-80% 정도를 차지한다. 그만큼 청인 관객은 자막에 집중하느라 다른 외화를 볼 때와 비교하더라도 곱절의 집중력이 필요한 셈이다.


 <모래 수영장에서 헤엄치기>와 <다잉>이 각각의 괴로움으로 나를 습격한 날, 나는 “지쳤을 때는 아는 맛을 먹어야 한다" 라는 족보 없는 명언을 떠올렸다. 실제로 이 세 편을 연달아 같은 날(10/9)에 관람했는데, 그래서인지 <청설>을 보는 시간은 집중력을 동원해야 하는 일과는 별개로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했다. 대만 버전 원작과는 스토리라인이 다소 다르다. 2024년 한국 버전의 <청설>은 대놓고 반전 요소를 집어 넣었기 때문에, 스포일러에 민감한 관객이라면 11월에 개봉하자마자 극장으로 향하는 것을 추천한다.



17.

<마이 선샤인 My Sunshine>

오쿠야마 히로시 연출ㅣ이케마츠 소스케, 코시야마 케이타츠, 나카니시 키아라 출연ㅣ110분


 우체통 높이까지 쌓여버린 눈. 그럼에도 생활과 의무를 다해야 하기 때문에 어디론가 이동한 인물의 보행이 보일듯 말듯 남겨두는 발자국. 직접 가본 적 없지만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홋카이도의 겨울은 한결같다. 눈이 저렇게 많이 나리는 곳에서만 태어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까.


 96년생 일본 감독 오쿠야마 히로시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마이 선샤인>은 그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답을 마련한다. 이 영화는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 학교에서 소녀와 소년에게 피겨 스케이트를 교습하는 선생님 '아라카와'(이케마츠 소스케)의 이야기다. 감독이 실제로 피겨 스케이팅을 7년간 탄 경험이 있지만, “눈은 빛반사가 너무 심해서 촬영하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 조도를 높이면 모든 게 날아가버리고 또 낮추면 바로 어두워진다. 내 머릿속에 만들고 싶은 장면이 확실한데도 이 과정이 생각보다 까다로웠다”는 <씨네 21> 감독 인터뷰를 보면 아름다운 걸 만들고 싶은 선한 의지가 있는 인간에게조차 자연은 쉽게 통제권을 넘겨주지 않는다는 걸(그게 당연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속에는 ‘타쿠야’(코시야마 케이타츠)가 그의 형으로부터 “(그건) 어차피 눈 내렸을 때 잠깐 하는 일이잖아”라는 말을 듣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대사 때문에 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는 찰나같을지도 모를 순간을 소중히 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해보게 됐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모든 겨울마다 이 영화를 보고 싶다. 주저 하지 않고 꼽을 2024 부국제의 베스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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