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을 하자면 (왜?) 튀긴 가지 요리도 맛있지만, 정말 뜨거울 때 먹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식으면 가지라는 채소의 특성상 기름을 빠르게 먹어서 금방 눅눅하고 느끼해집니다. 이탈리아나 그리스식으로 만든 가지 요리(=무사카/가지 라자냐)는 가지의 맛을 즐긴다기 보다는 소스의 맛으로 먹는 것이고요. 그런데 한국식 가지 요리는 약간 따끈하게 먹어도, 식은 채로 먹어도 맛있습니다. 간간하게 무쳐내면 흰 밥에 올려서 먹어도 좋고요. 마이너를 장르를 파는 덕후처럼 이야기하고 있네요 저.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름지기재단의 한식 레스토랑 온지음에서 출간한 레시피북 [온지음이 차리는 맛]을 참 좋아하는데요. 손이 과히 많이 가는 아름다운 한식 메뉴들로 가득한 책이에요. 그래서 마음이 복잡할 때는 이 책을 펴고, 시도해볼만한 메뉴가 있나 고민해봅니다. 그런데 이 책과 레시피에 작은 문제가 있다면...따라 했을때 딱 이거다! 싶은 맛이 나지 않아요.....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구하는 재료와, 집에서 하는 요리의 한계가 아닐까 하고 감히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도 이 책에서 가지 냉국 레시피를 보고 따라해보았는데, 집에서 차갑고 진한 멸치육수를 내는데 실패해서 만족도 50% 짜리 식사를 하고 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 따라 머리 속에 그 가지 냉국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 애매한 맛의 음식이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요. 초여름에 딱 어울리는 채소라 그럴까요. 스스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역시 냉국은 새콤달콤한 것이 좋다는 결론 아래 묵사발에 가지를 넣어보기로 했습니다. 가지냉국 레시피에서 가지 조리법만 빼온거죠. 하지만 요리책의 의미란,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 소개된 요리의 어떤 요소를 차용해 내 요리로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요? 

 저만의 가지 묵사발(feat. 온지음)은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가지를 쪄서 손으로 쪽쪽 찢어낸 후에 밑간하고, 채썬 도토리묵과 오이를 그릇에 소담히 담아낸 후 들기름에 무친 묵은지를 올렸죠. 국물은! 무엇으로 했느냐! 당당히 대기업에 외주를 줬습니다. 팩으로 나오는 냉면육수가 최고니까요. 고민없이 국물을 부어 오늘의 요리를 완성했습니다. 

 예쁜 그릇에 담아 사진을 찍었는데, 사실 제 큰 손 덕분에....재료가 저만큼 더 있었고요, 결국 식사는 대접에 부어서 했습니다 ^^ (부끄러우니까 사진은 작게....)

 요즘의 제가 하는 일들도 그렇습니다. 모든 단계가 손이 많이 가고, 품도 많이 듭니다. 마음도 많이 쓰이고요. 하지만 최종의 결과물에서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데 더 가깝달까요. 그렇다고 제가 지금 대충 해버리고 나면 나중에 굉장히 큰 문제가 될거에요. 

 그리고 제가 계속 떠들죠 뭐. 제 노력과 제 이름이 지워진다면, 제가 열심히 내가 했다고 떠들면서 다시 제 이름을 써보려고요. 이 오이 속 파내서 아삭한 식감만 남게 했다고, 이 김치 내가 사력을 다해 물기를 짜냈다고, 이 도토리묵 내가 뜨거운 물에 튀겨내서 잡맛을 뺐다고 고래고래 말하고, 티도 열심히 내고요. 내가 이 묵사발을 만드느라 알게모르게 정말 고생했다고, 생색을 한껏 내보겠습니다. 아마 그 생색은 이렇게 시작할거에요.

푸이 퓌메(Pouilly Fume)는 프랑스 루아르 지역의 소비뇽블랑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와인이래요. 소비뇽블랑 100% 특유의 청량한 화이트와인의 풍미가 좋아요. 그런 와중에도 섬세하고 힘이 있죠. 점점 맛이 진해지는 초여름의 채소들과 아주 잘 어울리는 그런 와인입니다. 거창한 소개는 못하지만 정말 싱그러운 와인이랄까요. 

프레딜렉시옹(Predilection)은 '편애'라는 뜻으로, 생산자는 이 와인에 사용되는 포도가 자라는 밭에 정말 좋은 환경을 조성해줬다고 해요. 덕분에 소비뇽블랑이라는 품종이 가진 특성과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낸 와인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아주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귀한 아이같은, 그런 와인인거죠. 

솔직히 저는 화사한 꽃 향기에 달달한 꿀 향기도 느껴지지만 산도가 높고 드라이한 와인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듭니다. 어떤 음식이랑도 잘 어울리지만 와인 자체도 굉장히 맛있습니다. 차게 칠링해서 마시면 정말 좋아서, 어쩐지 여름날의 계곡이나 강변에서 물이 흐르는 청명한 소리를 들으며 잔을 기울이고 싶은 그런 상상을 해보고 있습니다. 

 전에 어떤 레스토랑에서 이 와인을 마셔보고 완전히 반해서 푹 빠져버렸는데, 수입사에서도 품절로 다 구할 수 없다고 해서 굉장히 아쉬워했었어요. 그런데! 올해 추가 물량이 수입되었다고 해요. 저는 사실 한 박스를 구해놓았습니다 헤헤 같은 생산자의 다른 와인들도 들어왔다고 하니 발견하면 놓치지 마세요! 

  사실 이 레터를 처음 기획할때는 그 계절의 맛에 대해서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점점 그냥 제가 먹고싶은 음식이나 제가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서 약간 뜨끔합니다. 물론 계절의 음식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요...원래 이번 레터에는 노란맛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쓰려고 했었거든요. 어쩌다 갑자기 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되었는지...영 모를 일입니다.

 진짜 여름이 시작된 이 나날들 사이에 여러분에게 에어컨의 축복이 있기를. 이렇게 6월의 첫 번째 레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