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VII -세잔(Paul Cezanne)과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et)
명화속에 살아 있는 여인들 VII
"세잔(Paul Cezanne)과 오르탕스 피케(Hortense Fiqet)"
by 박명인(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오르탕스 피케는 오랫동안 세잔에게 감정적 괴로움을 주기도 했지만 인물화에 대한 영감을 준 여인이기도 하다. 1850년에 태어난 오르탕스는 세잔보다 11살 연하였다. 1869년에 세잔을 만났으나 그의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 동거생활을 하면서 1872년에 아들을 낳았고, 아버지의 임종 후인 1886년 20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세잔이 다른 화가들에게 비해 아버지로부터 혜택을 받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경제적 원조를 계속해서 받기 위해서 결혼을 숨겨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한 환경을 오르탕스는 묵묵히 견뎌 냈다. 그러나 오르탕스는 세잔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머니와 누이조차 결혼을 받아들이지 않아 오르탕스는 대부분 아들과 둘이서 파리, 또는 마르세이유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세잔은 아내 오르탕스와의 관계는 화업(畵業)과는 무관했다. 아내가 번거롭게 해서 그의 그림이 나빠지는 일이 생겼다고는 할 수 없다. 세잔은 그런 점에서는 ‘초월한 화가’이었다. 세잔의 아내가 어떤 여성이었든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 오르탕스는 인내력이 강하고 온순한 여성이어서 세잔의 100번이 넘는 포즈를 거절하지 않고 따라 주었다. 그로 인해 세잔은 인물화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되었다.
세잔의 아버지는 은행을 세우고 자산가로서 부동의 지위를 쌓았다. 세잔이 9세 때 아버지의 엑스(Aix)은행은 영업을 시작했다. 엄격하지만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아버지, 애정이 가득해서 어머니의 과잉보호가 마마보이 컴플렉스의 이유를 만들었고, 두 여동생이 있었지만 오르탕스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세잔은 아버지의 기대에 반항하지 않는 한, 경제적 어려움이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엑스대학(Aix-Marseille University)에서 법률을 배우던 무렵(중퇴하고 그림수업으로 전향), ‘나는 미남자라는 영광이 없기 때문에’라며 학우 에밀 졸라에게 짝사랑의 실연을 편지로 알린 적이 있다. 세잔의 20세 때였다. 세잔이 꿈꾸고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함께 파리로 떠나, 나는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예술가가 되어 둘이서 웃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지만, 예술가로서의 대성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행복해지는 것도, 스무 살의 꿈이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았다. 특히 예술은 세잔에게 가차없는 방색(防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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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실에 있는 마담 세잔(Madame Cézanne in the Conservatory),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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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과 야심, 그것과 표리를 하는 세심함. 불안을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세잔이 생애의 아내가 될 오르탕스 피케와 만난 것은 1869년. 세잔은 30세, 1850년 출생의 오르탕스는 19세이었다. 아름다운 몸매의 블론드(blond) 소녀, 검은 눈동자의 오르탕스는 파리의 제본소의 여공으로, 모델을 해서 수입을 보충하고 있었다. 여성에 대한 강한 집착과 소심함을 겸비한 세잔이 오르탕스와 동거생활을 시작한 계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남녀관계는 알기 쉬울 만큼 진실과 멀었다. 모르는 편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처음부터 생애의 아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도 역시 불분명하다. 그런 와중에 오르탕스는 임신했다.
‘나는 돈이 없으면 금방 슬퍼진다’가지고 있던 돈은 순식간에 사용해버리는 낭비형 세잔에게 오르탕스의 임신은 위협적이었다. 만약 아버지가 알게 되면 화가수업과 생활을 유지하는 매달 보내 주던 송금은 끊어진다. 지극히 친한 친구들과 어머니에게 사정을 털어놓는 것 이외에는 비밀을 지켜야 했다.
오르탕스의 초상은 30점 정도 있지만, 뒤룩뒤룩 살찌고, 무표정으로 보기 흉하게 그려진 그림도 있다(예를 들면, 《빨간 팔걸이의자의 세잔 부인》(1877년). 연령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젊게 그려진 세잔 부인상도 있다. 아내에 대한 세잔의 노골적인 악감정을 느끼게 하는 그림도 있다. 오르탕스가 세잔 부인이 되고 나서의 초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것도 3년부터 5년 걸쳐서 완성되는 속도로 그려졌다. 상당히 큰 그림도 있다.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1890경)은 40세의 아내를 묘사하고 있는데 아마 세잔 부인상 중에 가장 매력적인 초상화이다. 그려졌을 때는 서로 알고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러나 세잔에게는 크나큰 사건이 생겼다. 아버지로부터 받는 생활비 때문에 오르탕스와의 관계를 숨기고 살았는데 오르탕스의 아버지가 사정을 모른 채 파리의 딸에게 보낸 편지가 세잔가에 전해졌다. 이 편지에는 오르탕스를 ‘세잔 부인’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그동안 세잔과 오르탕스의 관계를 감지한 아버지는 아들의 소행을 캐내기 위해 수단을 다했다. 세잔의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을 완전히 부인하고 폴 출생 6년 후, 아들의 부주의라며 양도(糧道)를 끊고 손자를 버리게 했다는 자료도 있다. 결국, 한 사람의 생활에 많은 돈은 불필요하다며 매달 생활지원금을 반액으로 깎았다. 당시 졸라에게 매달 60프랑씩 돈을 빌려 쓰고 있었다. 가계가 어려웠을 때 오르탕스는 바느질을 해서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고 한다. 화가로서의 고행에 답은 없고, 아내를 아내로서 인정할 수도 없는 긴 세월에는 세잔의 연애 사건도 일어났다.
1885년 봄에 세잔이 쓴 편지의 초안이 있다. ‘나는 당신을 만나고, 당신은 나에게 입맞춤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 후 나의 마음은 깊은 혼란에 빠졌습니다.’편지는 데생(dessin)의 뒷면에 쓰여 있으며 후반부는 발견되지 않았다. 46세의 나이에 여전히 서투른 세잔은 이 연애를 아내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이 사건의 계기로 이듬해인 1886년 4월 28일, 오르탕스 피케와 정식으로 결혼하게 된다. 이때 아들은 16세였다. 그리고 반년 후 아버지 루이·오귀스트·세잔은 사망하고 세잔은 막대한 유산을 받았다. 재능은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르탕스는 남편이 어머니와의 함께 사는 것을 좋아했고, 또 그림의 모티브를 이유로 고향을 떠나지 않는 것에 강한 불만이 나이가 들면서 더 강해졌다. 그녀에게는 파리의 생활이 쾌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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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세잔 초상화(Portrait of Madame Cezanne), 18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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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절교 상태였던 친구 졸라는 세잔의 어리석음을 글로 남겼다.
‘세잔은 아내에 대해 잔뜩 화가 났다. 1년 동안 파리에 있다 5개월 간 스위스로 호화여행으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인 아들을 따라 다시 파리로 도망쳤다.’
세잔과 오르탕스가 함께 지낸 시간이 많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였다. 부모로부터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고 20년을 살았고, 아들을 낳았어도 16년 동안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마마보이 습성으로 어머니를 떠나기 싫어했다. 더욱이 오르탕스는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잔의 고향보다 파리생활이 더 좋았다.
화상 보탈의 글에 의해 세잔 부처의 일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하루의 일을 마친 세잔의 관심은 다음 날의 날씨다. 그는 너무 일찍 침대에 들어가서 한밤중에 깨어나기도 했다. 사색에 잠겨 창문을 열고, 또는 침대로 돌아가기 전에, 양초를 손에 들고, 하던 일을 재검토하러 간다. 인상이 좋으면 아내를 일으켜서 만족한 감정을 아내와 서로 나누었다. 그리고 아내의 안면방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아내와 카르타(Carta: 패(札) 모양을 한 유희기구의 일종으로 도박이나 점을 치는데 쓰임. 영어로는 플레잉 카드 (playing card)
)를 한판 했다.’
세잔은 몸상태가 좋지 않은 아내를 아들과 함께 파리에 가게 하고, 친구의 초대를 받으면 아내와 아들과 셋이서 여행을 떠나는 날도 있고, 평범한 부부생활이 느껴지는 시기도 있었다. 비유할 데 없는 구원, 그것은 단지 하나의 희망이 되는 아들 폴을 얻은 결혼이었다. 17년간이나 아버지의 시비로부터 아내와 자식을 지킨 세잔을 생각하면, 남자의 성실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들 폴이 없었으면 가능했을까 의구심도 든다.
소외된 기나긴 생활에서 오르탕스는 때때로 시지포스(Sisyphos)와 비슷한 고역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며 괴로워하는 세잔의 반려인 것을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음지의 생활은 지독하게 길었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오는 날, 엑스에서 파리로, 거의 며칠마다 세잔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두 사람에 포옹을 보낸다’ ‘너와 마마에게 진심으로 키스한다’등으로 쓰여 있었다. 그러나 일종의 형식일지도 모른다. ‘내 비경(悲境)에서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너뿐이야’라고 세잔은 통절한 심정을 아들에게 토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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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 아들 초상화(Portrait of the Artist's Son), 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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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은 1906년 67세로 고향에서 사망했다. 아내 오르탕스는 이때 56세, 아들은 34세였다. 화가의 죽음에 당면해서 아내도 아들도 서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것을 오르탕스의 ‘차가워진 마음’때문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확인된 것은 없다.
세잔의 죽음은 옥외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가을의 비를 맞고, 인사불성이 되었으면서도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정원의 보리수 아래로 일하러 나간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도 만족하지 못하고 목숨을 단축해버릴 때까지 회화에 빠진 세잔의 인생은 제우스의 미움을 받고, 형벌로 굴러떨어지는 큰 돌을 산 정상으로 계속해서 올린 시지프스(Sisyphos)를 생각하게 했다. 누가 형벌을 부과한 것도 아니다. 세잔은 새로운 회화영역에 도달하는 것을 자신에게 명하고, 화단이나 세상에서 비웃음을 받더라도, 자신에게 부과한 과제를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은 화가이다.
‘그림은 결국 자신의 템프로멘트(Temperament) 표현이며, 자신에게는 독특한 작은 감각이겠지만, 그것을 타협하지 않고 엄격하게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근본이다. 그것을 믿으면서도 언제나 예술에는 그 이상의 느낌을 파악하고, 그것을 제작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하면 정지할 수 없게 된다’라고 세잔은 말했다.
세잔은 언제나 모델에게 인내를 요구했다. 화단의 이단자로서 1890년 이후도 큰 작품은 100프랑, 소품은 40프랑으로 판매되고 있었던 세잔에게 처음으로 기회를 준 것은 화상 앙부로와스·보탈이었다. 그는 세잔의 모델에 관한 경험을 쓰고 있다.
아틀리에의 의자는 네 개의 상자 위에 불안정한 상태로 있었다. 불안한 모델에게 “아니, 쓰러질 위험은 전혀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거기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은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라고 세잔은 말했다.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던 모델은 결국 깔판 위에 쓰러졌다. 세잔은 모델에 다가서서 말했다. “움직이면 포즈가 흐트러져요! 사과처럼 가만히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잔은 오르탕스에게도 그랬지만 모든 화가에게 엄격했다. 화상 보탈이 열어 준 전람회를 계기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 전람회에는 출품된 50점 중에 《온실에 있는 세잔 부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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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Self-Portrait with Bowler Hat) by Paul Cézanne, 1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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