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밀어붙이지 않고,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형태와 전략이 ‘되도록 허용하는’ 감각. 무엇이 되려고 애쓰는 의지라기보다, 가능한 것을 허용하는 상태. 리듬과 감각에 실려 몸을 기울였다 신장하는 열림 속에서. 그런 시작으로 슬며시 성에를 걷어내듯, 발원을 글로 적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한 번 불러보자는 호흡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서 감응하여 내려 놓는 말들입니다. 어쩌면 대부분의 일들이 형식을 갖추거나 특정한 출발점에 서기 전, 미묘하게 시작되기에 이러한 발원은 — 일하며 누릴 수 있는, 호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 2, 3, 4, 5., Compter en s'amusant by Robert Doisneau, 1955.

로베르트 두이노 Robert Doisneau와 함께 숫자를 세어봅니다. 거리를 넘는 웃음소리, 잘 마른 빨래 위로 작고 연약한 들풀과 씨앗이 여기 저기 붙어 들썩이는 듯한 특별한 생동이 기척합니다. 발가락에 닿는 손끝의 움직임에, 로베르트도 나도 숨을 고릅니다.

'해야 할 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다가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다행히 일은 언제나 시작되기 전에, 예고하듯 기류처럼 회사 문을 두드립니다. 지나쳐 온 풍경 속, 튀어오른 접혀진 글자로부터,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척으로부터 — 그 느낌은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화면 바깥에서 조용히 말을 걸어옵니다. 무엇을 한다고, 이렇게 진행해야 한다고 합니다만은, 그보다 먼저 도달하는 것이 이 감각입니다. 나를 향해 스며드는 이 호명됨을 저는 잠시 기다립니다. 일을 지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들썩이며 흔들리는 사람들, 이 이어가는 흐름 속에서 하나둘씩 응답된 사물들이 자리를 잡아갑니다.


디자인 과정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무엇으로 표현한다, 어떻게 느껴지기를 바란다”는 여러 욕망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어렵지만 늘 흥미롭습니다. 불쑥 깨어난 감각은 사방으로 튀며 흙먼지를 일으키고, 우리는 그 속에서도 서로의 반짝이는 눈빛을 놓치지 않으려 애씁니다. 먼지가 걷히는 건, 어느 한 사람의 입에서 처음의 발원이 다시 떠오를 때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각자 꺼내든 손전등처럼, 감싸고 돌려 말해졌던 첫 마음을 조심스레 비춥니다.
‘일의 방향’이란 때론 주장하기 민망할 만큼 허약한 말입니다. 쌓여 있는 과업과 부족한 시간, 체력의 한계 앞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형의 감각을 다시 불러내고, 발원의 편에 서서 감각을 감정의 기세로 흔들어 깨웁니다. 발원은 주제를 넘어서, 과정 속에서 계속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내적 시스템이 됩니다.

Petite Maman, Film by Céline Sciamma, 2021
셀린 시아마는, 영화를 만드는 동안 인연된 아이들을 맞아들이는 것, 리허설 없이 그저 대본을 읽고 나누는 영화적 발원함으로, 이야기의 맥락을 이루는 (위계를 뒤집는) 수평적 관계, 그 섬세한 균형을 스크린 위에 펼쳐냈습니다. 네, 리듬과 상호작용으로요.
안녕하세요. 
네 번째 호를 맞이합니다. 예고했던 주제는 프로젝트에 임하는 <발원 發願>. 이는 단지 일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감응한 의식에 공명되어 우리 모두의 일로 새삼 떠오르게 하는 글입니다. 그런 글에 닿기 위해 부단히 마음에 모든 것 품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는 봄을 일깨우는 감각에 장 냄새를 보태어 보내드렸지요. 그 흐름에 이어 5월을 열며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내면의 발원이 마치 외부 현실을 조직하고 구현하는 듯한 요즘 — 작게 속삭이던 마음 속의 말들이 유행가처럼 거리 곳곳에 흐르는 것을 보면서 더 낮고 넓게 엎드려 귀 기울이게 됩니다. 땅 밑에서 깊이 우러날 ‘어떤 주제의식’을 제때 낚아채야 하겠지만 —  문득, 마루바닥 빛깔의 망토를 덮고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어린 날, 자주 눕곤 했던 책상 밑이나 식탁 아래의 포근함이 선명하게 되살아납니다. 그곳에서 느꼈던 평안과 풍요의 감각이 오늘에 이어졌으면, 마치 어린시절 고유한 균형 속에서 자족하던 순간처럼.
Parco Advertisement Fim, featuring Faye Dunaway, 1980s.
1980년대 초, 일본의 백화점 체인 파르코(Parco) 캠페인 중 하나로, 에이코 이시오카(Eiko Ishioka)가 수석 아트 디렉터로 재직하던 시기, 쿠리가미 카즈미(Kazumi Kurigami)가 연출한 광고 필름입니다. 무르익은 배우의 손끝과 시선은, 한 시대의 정서를 온전히 감당하려는 듯 나른하지만 단단한 연기를 펼칩니다. 삶은 달걀을 유심히 다루며 먹는 장면 — 고조되는 관악기과 현악기의 주고받는 선율, 거의 검게 비워진 공간과 흰 완숙란, 그리고 배우의 얼굴빛은 강한 명암의 대비로 감각 그 자체를 서사로 전환합니다. 이것이 파르코다. 완연한 감각이 곧 파르코입니다. 감각 그 자체가 브랜드의 첫 언어였던 시대의 장면은 매우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계란이 퍽퍽할 것 같아서... 잘 각 잡은 냅킨을, 묽은 찻물을 그녀에게 건네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조응하고 싶어지는 이미지 본연의 섬세한 매혹을 자주 상기합니다.
그렇다면, 디자인에서의 발원이란 무엇이어야 할까요. 완성된 비전을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감응 가능한 상태를 만드는 일, 그리고 그 감응이 흔들리지 않도록 작은 방향들을 세심하게 구축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 ‘처음의 말’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떤 식으로 꺼내어 일로 옮겨가는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어린 날 책상 밑의 포근함처럼, 자기 안에 묻혀 있던 조용한 평안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일에 파묻혀, 과업 안에서 헤매이기보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좋아하는 코트에 손을 넣어보듯이. 아주 사소한 감응에서 출발한 글이면서, 그로부터 작업의 조형적 축을 추출하는 예시로써 몇가지 글을 아래 소개합니다.
위 글은 2016년, 한 패션지에 ‘살고 싶은 건축’을 주제로 기고했던 짧은 글입니다. ‘살고 싶다’는 본능으로부터, 그것을 ‘바라보고 싶다’는 시선으로부터 연결하는 시각물 작업자의 태도를 담아 적었습니다. 도시의 하늘을 우아하게 떠받친 듯한 프랑스 대사관 지붕은 든든한 인상을 주면서도 기백있는 조형 언어로 다가왔습니다. 여러 브랜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더 큰 맥락 안에서 디자인 컨셉트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때의 초안이라서 의미가 깊습니다. 이어지는 글은, 모 백화점 식품관 프로젝트의 메시지를 여는 ‘발원문’입니다. 이 문장은 이후 수차례 다듬어져 “맛은 삶이며, 사람이고, 사랑.” 이라는 브랜드 메시지로 정립되어 갔습니다.
당시 백화점 현장을 오가며, 툭하면 밤을 새우던 시절이었습니다. 새벽 퇴근길, 창밖으로 보이던 이들의 이른 시작 — 그 조용한 움직임들에 자주 감화되곤 했습니다. 끝이 아득하게 멀어 보이던 하루하루의 일들은, 무명의 장면들로 차곡차곡 채색되어 갔습니다. 그곳은 ‘날씨가 먼저인가, 산지가, 노동이 먼저인가’, ‘기업이 우선인가, 사용자가 중심인가’ 같은 구도 이전에, 현장의 감각이 앞서는 곳이었습니다. ‘최선’, ‘최대한의 노력’이라는 말들이 거리낌 없이 우러나오던 곳. 그 밀도 속에서, 많고도 높은 숙고와 사려 깊음이 쌓이며 위의 거친 감화문이 브랜드의 메시지로 다듬어져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또 그럴 듯한 것이 아닌 진짜 원물의 에너지에 어울리는 비주얼, 기물, 공간에 대한 고민으로 상투적인 VMD 시스템 디자인을 걷어내기 위한 시도가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 경험은, 이 일에 몸을 담기에 충분한 발원이었음을 — 생생히 기억합니다. 

발원은 언제나 ‘무엇을 만들까’보다는 먼저 ‘어디에서 시작할까’를 묻는 데서 출발합니다. 작업에 감정적 에너지를 부여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디자인에서도 컨셉트의 아이덴티티를 이루는 핵심입니다. 발원문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감각의 경험이 어떻게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지를 넉넉한 품으로 느끼고 맛보며 우러나는 글입니다. 디자인 —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이름, 하나의 공간 경험을 구상하기 이전에, 그 일을 왜 하려 하는가를 다시 묻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니까요. 작업을 여는 실질적 방법론이기에 충분합니다.
Garments from Fall Winter 2016/2017, by Dušan Paunovic

두산 파우노빅은 과잉 생산의 시대 속에서도, 소재의 품질과 테일러링에 충실한, 시대를 초월한 컬렉션을 꾸준히 선보여 왔습니다. 백 년 전에도, 백 년 후에도 낯설지 않을 그의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정직하다’거나 ‘초탈하다’는 말로는 다 닿지 못합니다. 저는 그가 완벽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는 팬 중 한 사람입니다. 그의 디자인엔 확실히 체념한 어떤 태도가 있고, 그건 오히려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그의 세계는 마치 아주 우아한 잿빛 같고, 세상의 그림자를 조용히 그러모은 고독에서 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정제된 매진의 태도가, 가장 깊은 울림의 격려로 다가옵니다. 두산의 언어는 아마도 ‘싫다’일 것입니다. ‘그딴 것…’이라고 내뱉는 무심한 듯한 거절. 그 직설이야말로, 디자인 앞에 놓인 발원입니다. 언젠가는 저도 이런 시크한 거절로 일을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Surface Sconce by Studio Henry Wilson.
주조한 동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램프는 주물 자욱과 표면에서의 끓음이 드러나고 사용하며 자연스럽게 고색으로 물듭니다.디자인에서 혁신은 이제 거창한 것을 말하기보다 시간과 공간에 지속되어 오래된 것이 지닌 풍화의 매력을 자주 논합니다. 과거의 생산 방식, 소재 처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인류의 만듦이 처한 냉철한 현실을 지고하게 바라보는 것. 고통에 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용기있는 디자이너의 자질일지도 모릅니다. 
Mineralscapes Eyeshadow Palette by Byredo.
지구의 본색을 이렇게 시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18가지의 조화로운 색상들로 이루어진 아이섀도우 색상표는 그저 스파클, 쉬머링, 매트, 글리터링, 같은 메이크업 기조의 언어를 평범하고 고지식한 것으로 만듭니다. 인공물에서 조각한 것이 아닌, 음울하며 고상한 풍경화를 조직화한 것만 같습니다. 손 닿아 아름답게 낡은 태피스트리를 햇살에 말려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완강하고도 부드러운 패키지 디자인을 봐주세요. 
네번째 뉴스레터에 수월하게 왔습니다. 일 앞에서 언어의 출발점에 대해 자주 고민하게 됩니다. 발화는 어떤 생각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순간이라면, 발원은 그보다 더 깊은 곳,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감각의 자리에서 천천히 피어나는 움직임입니다. 어쩌면 일이 없어 느긋했던 시절로부터 바빠진 때로 전달된 기운이며, 순순하게 즐거웠던 일들의 감흥을 일로 만들어야 할 때 붙드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디자인의 시작은 언제나 이 발원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바닥에서의 안락함, 따뜻한 코트의 안감, 혹은 무심코 마주한 어떤 장면처럼요. 네 번째 뉴스레터에서 나눈 감응의 단상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작은 실마리로 닿기를 바랍니다. 참, 종종 회신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휴의 고요한 끝자락에서, 감사의 인사를 담아.
2025년 5월 6일, 이혜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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