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성 요통과 식도염을 안고 살기에 통증을 완화하는 방법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위 영상들을 보면 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있습니다.
- 23회차 뉴스레터에서도 통증 완화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핵심은 대부분의 통증은 신체적인 손상에 연관되기보다 예측하려는 뇌의 특성에 따른 신경학적 회로(neural circuits)의 문제이며(요통의 경우 85% 이상),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학습되거나 탈학습(unlearn)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 이러한 주장의 선봉에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웨인 주립대 의과대학 Howard Schubiner 교수입니다.
- Schubiner는 중추신경계가 과민해져서 통증을 느끼는 역치가 낮아진 상태가 지속될 때 만성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고 봅니다. 신체적 데미지를 입은 부위는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되는데, 그 이후에도 통증이 완화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안 좋아지거나, 나아짐 없이 안 좋은 상태가 지속되어 일상생활을 현저히 저해합니다.
- 어린 시절 트라우마는 통증 역치가 낮아지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지니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황적 스트레스 요인이나 억압된 정서 등 사회심리적 요인에 따라 중추신경계가 과민해지고, 통증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에 따라 과도하게 통증에 초점을 맞추게 될 때, 뇌는 실제 신체적 위험이 없는 상황에서도 통증 신호를 보내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 패턴이 강화되면 만성 통증이 됩니다.
- 통증을 느끼는 것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며 생존 확률을 높입니다. 하지만 신체적 데미지가 없는 상황에서 경험하는 이 같은 통증은 일종의 오경보입니다. 오경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이 Schubiner의 견해입니다. 즉, 억압된 감정, 해소되지 못한 과도한 스트레스나 갈등, 중요한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켜졌다는 의미인 동시에 대처가 필요하다는 신호인 것이죠.
- 통증 치료는 이런 논리의 흐름대로 통증이 전달하려는 감정적 메시지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식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감정 인식 및 표현 치료(EAET, Emotional Awareness and Expression Therapy)라고 부르는데,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지만 8-9회기 정도의 집단상담이나 개인상담에서 빈 의자 기법이나 역할극, 표현적 글쓰기 같은 기존 심리치료 기법을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들 고유의 이론적 기반은 없는 것 같습니다. 덧붙여, 유튜브 영상에서 수용전념치료와의 차이를 물어보는 질문도 두 번 정도 나오는데, ACT는 통증을 없애려고 하지 않지만 EAET는 통증 완화뿐만 아니라 통증을 없애는 데 주안점을 둔다고 답하네요.
- 통증을 경험하는 모든 이가 EAET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며, 통증 재처리 치료(PRT: Pain Reprocessing Therapy) 과정에서 통증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PRT는 통증에 대한 심리교육과 단계적 노출을 결합한 치료로 보입니다.
- EAET에 대한 RCT 연구도 서너 편 확인됩니다. 주로 CBT보다 우리가 낫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 이런 학술적인 내용보다는 통증과 정서적인 부분이 밀접하게 관련이 있고, 특히 억압된 정서가 통증을 유발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일 수 있기 때문에 내담자/환자가 이 정서를 경험하여 표현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공감이 됩니다.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감정에 신경 쓸 겨를 없이 일에 몰두하다 보면 꼭 요통이나 식도염, IBS 중 일부를 경험한다는 것을 압니다. 단순히 수면의 부족이나 식사 패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죠. Schubiner도 설사, 요통, 목디스크 등을 두루 경험한 환자인데, 특히 의대 졸업 후 첫 병원 근무 시기에 IBS 증상 중 하나인 설사에 시달렸음을 말하는 대목에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 이런 주장의 프론티어는 존 사노입니다. 존 사노는 특히 억압된 분노가 통증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이 분노를 의식화하는 것이 통증 완화에 중요하다고 말한 재활의학과 교수입니다. 그가 치료한 환자들의 간증이 담긴 듯한 다큐멘터리의 트레일러도 있네요. 영상에 Schubiner도 잠깐 등장합니다.
- 존 사노 책 중에 통증혁명이 번역돼 있습니다. 통증 회로를 재배선, 즉 탈학습하는 데 심리교육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합니다. PRT의 핵심적인 구성 요인이기도 하고요. 통증혁명을 읽었을 뿐인데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는 해외 독자의 리뷰도 몇몇 본 것 같습니다. 요통에 시달리는 분들은 꼭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 존 사노는 통증이 억압된 마음 속 무언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있게 돕는 주의분산 전략이라고 봅니다. 상대적으로 감당하기 쉬운 게 무의식적인 내용보다는 통증이기 때문에 이 쪽으로 방향을 튼다는 것이죠. 하지만 Schubiner는 통증을 뇌의 보호적 경보 시스템으로 해석합니다. 통증은 단순히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는 방법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 감정적 내용을 인식하고 표현함으로써 신경 회로를 재배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존 사노보다 심리치료에 적극적이라는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EAET가 ISTDP(Intensive Short-Term Dynamic Psychotherapy)에 영향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도 하고요.
- 통증을 전문으로 하는 심리치료자가 국내에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주변에 아는 분 계시면 소개 바랍니다. 배우고 싶습니다.) 통증 전문 심리치료자가 국내에도 분명 있을 테지만, 누구나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시간적/경제적 여건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감정 인식 및 표현에 도움이 되는 책을 한 권 소개합니다. 마크 브래킷이 쓴 감정의 발견입니다. 이론에 근거하고 짜임새 있으면서도 대중 눈높이에 맞춰져 있어 읽기 편하다고 느꼈습니다. 마크 브래킷이 개발한 무료 감정 앱도 좋습니다. 한 달째 사용 중인데 자신이 평소 느끼는 감정을 체계적으로 기록하여 두드러지는 패턴을 파악하기 용이합니다. 기능적인 면이나 디자인 모두에서 만족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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