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많이 가면 돈이 많은 줄 알지만, 돈이 많아서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도 여행을 가는 것이다. 나의 지난 여행은 물질이 주는 풍요와 거리가 멀다. 이코노미 앞자리와 비상구 좌석에도 가격을 메기는 시대, 돈을 지불하면 그만큼 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상술에 심술을 내면서도 더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함이 슬플때도 있다.
두번의 외국 생활에서도 물질이 풍요로웠던 적은 없다. 2주 단위로 주급을 받으며 생활했던 영국과 코로나로 인해 무급에 가까웠던 오스트리아에서의 생활은 소소한 기쁨보다 줄어드는 잔고에 마음을 더 썼던 시기였다. 2010년과 2020년, 두 번의 외국 생활에서 알게된 건 '시간의 지나도 내 삶이 더 부유해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기며 나를 가꾸어나가기보다 주어진 상황에 급급해하며 살았기에 내 마음속에 영원히 잊히지 않을 궁상맞은 사건들이 몇 가지 있다.
영국 생활 중 처음 유럽여행을 갈 때였다. 내가 지내던 곳은 숙식이 지원되는 곳이었기에 센터 곳간에 보관된 식료품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식빵, 종류별 잼, 누텔라, 쿠키, 음료 같은 것들이었다. 쉬는 날에는 센터에 가지 않고 숙소에서 지냈기에 냉동실에 보관한 식빵에 잼을 발라 먹거나 쿠키와 음료를 마시며 지냈다. 유럽 여행을 떠나며 나는 곡물식빵(흰식빵이 아닌 곡물을 택한건 건강을 챙기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다)과 누텔라 잼 한 통을 가져갔다. 빠듯한 여행비에 식비를 조금이라도 아껴볼 심산이었다. 짐으로 가득 찬 가방 한켠에 잼을 끼우고 식빵을 주렁주렁 들고 다니며, 아침을 챙겨먹지 않음에도 궁상이라는 단어를 절약으로 포장하며 여행했다.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도시를 돌아다니며, 굴비를 매달아 놓고 밥을 먹었다는 선비처럼 대단한 음식을 대하듯 식빵과 잼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영국에서의 절약템이 식빵과 잼이었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휴지였다.
30롤 묶음으로 휴지를 판매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오스트리아 대부분의 마트에서는 10롤 단위의 제품이 많았다. 몸에 직접 닿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필품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던 시기였기에 나는 늘 저렴한 화장지를 골라 들었다. 향기도 나고 예쁜 옆 휴지를 고를 수 없었던 이유는 몇 유로 때문이었다. 한정된 생활비 안에서 첫번째로 구매해야하는 것은 식품이었기에 나는 촉각 대신 미각을 택하며 살았다. 우리나라 화장지로 비유하자면 뻣뻣하고 얇은 휴지였다. 무늬도 향도 없는 말 그대로 쓰이기 위한 태어난 휴지랄까.
휴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된 건 지인집에 놀러 갔을 때다. 변기 옆에 걸린 귀여운 무늬가 그려진 휴지, 심지어 향기롭고 도톰하기까지 했던 휴지를 몇 칸 뜯어 사용해 보니 기분이 좋은 게 아닌가! 폭신하진 않지만 도톰함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은 화장실을 이용하는 순간에도 나를 소중하게 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줬다. 몇푼 아끼자고 이 기분 좋음을 놓치고 살았나 싶어 몇 유로를 더 투자해 좋은 휴지를 쓰기도 했지만, 이 생활이 쭉 이어지진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생활고라 칭할 만큼 돈을 아껴야했기 때문이리라.
풍요로움의 기준이 각각 다르지만 풍요의 기반에 돈이 필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두가지 일이 떠오를 때면 조금 못나게 살았던 그 순간이 속상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을 안다.
풍요로움은 때때로 아주 작은 부분에서 옵니다. 풍요로움이라고 하면 넉넉한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일상의 기분 좋은 변화는 대개 몹시 사소해 지나치기 쉬운 영역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여기기 쉬운 소외된 부분에 마저 나다운 기준이 녹아 있을 때 그런 생활의 주변부까지 마음을 닿게 하는 근육에 풍요를 느낍니다.
-오늘의 기본 중에서
[오늘의 기본]은 라이프스타일이 아닌 라이프마인드(기본)을 지향하는 책이다. 일상을 조금 더 나답게 채워갈 수 있도록 아주 작은 시선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매일 쓰는 생활 속 물건을 의미 없이 두는 게 아니라 소소한 행복을 더하는 물건들로 바꾸어보라'는 말에 지난 두 개의 사건이 또 떠오르고 말았다. 아마 두가지 일은 나를 대하는 법을 고민할 때마다 생각날 것이다.
내가 느끼고 싶었던 풍요가 커다란 집에 앉아 돈 걱정 없이 커피 한잔 홀짝이는 것이 아니라는 걸 배워가고 있다. 호텔 한 번 갈 가격에 내 손이 닿는 곳, 내가 늘 지내는 내 방을 나답게 가꾸는 것이 나를 위한 가장 큰 풍요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늘 창고 같아 버려둘 수밖에 없었던 내 공간을 사랑해 보기로 했다.
의외로 큰돈을 쓰는 건 쉽지만, 소소한 삶의 물건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굳이 그렇게까지'라는 말이 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집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연필, 노트, 핸드크림, 그릇까지 굳이 돈을 쓰지 않아도 될 부분에 돈을 쓰면 좋은 이유는 대단한 사건이 내 삶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소소한 하루하루가 내 행복의 기초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집에서 휴지를 구매할 땐 제일 싼 건 사지 않는다. 여전히 최고급은 아니지만, 적당히 좋은 향과 도톰함을 가진 휴지로 삶의 품격은 아니더라도 화장실에서의 소소한 만족감을 누린다. 몇천 원 더 주고 산 마음에 드는 샤프를 쓸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홍보용으로 받은 포스트잇이 아닌 책에 오래도록 붙여두고 싶은 인덱스를 쓰며 나만의 책으로 업그레이드 시킨다.
내 삶에 가까운 것일수록 나를 닮은 제품을 쓰는 것,
이것이 일상의 행복을 더하는 방법이 아닐까.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꿀 수 없고 한 번에 변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어디선가 가져온 것으로 시트가 찢어져 '앉는 용도'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없지만 선뜻 바꾸지 못하고 있다. 많은 영역 중에 아직 의자를 바꾸지 않은 건 비용과 무관하다 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전히 작고 소중한 돈을 가지고 살기에 내가 품을 수 있는 작은 물건부터 하나씩 바꾸어가려 한다. 내가 지금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소소하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작은 것부터 차근히 채워가다 보면 점점 매 순간 내 삶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