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사람과 사람들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부터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을 향해"
- 김리윤, 이야기를 깨뜨리기 中


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 편지는 김리윤 시인의 <이야기를 깨뜨리기>라는 시의 한 연으로 시작해보았어. 나는 있지, 힘들 때만 시를 읽을 수 있어. 마음이 가라앉을 때만 차분한 표정으로 시의 언어에 집중할 수 있거든. 그리고 그렇게 시를 읽으면서, 시가 주는 고유한 위로의 순간을 기다려. 

내가 좋아하는 시는 마음의 공간과 감정의 시간이 아름답게 언어로 재현된 시들이야. 그런 시를 읽을 때면 난해함과 고통으로만 읽히던 나의 마음과 감정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돼. 마음을 내팽개치고 싶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리고 싶을 때 그런 시들을 읽으면 가만히 그 마음을 껴안고 싶어지기도 해. 그런 위로의 순간을 좋아해. 

이번 주에는 김리윤 시인님의 <투명도 혼합 공간>이라는 시집이 그 역할을 해주었어. 너에게도 권하고 싶은 시집이야.

많이 지쳤다는 걸 알고 있었어. 여러 증상이 나타났었거든. 그중 가장 명확했던 건, 사람들이 건네는 빛나는 마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었어. 그 환함에 눈부심만을 느끼고, 돌려줄 마음이 없어서 도망가고 싶었어. 

지난여름부터 잘하고 싶고,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연달아 생기고 일정이 겹치기도 했어. 그래서 쉴 때마다 조마조마했어. 쉬는 만큼 결과물의 질이 떨어질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지. 자연스럽게 식사를 챙기지 못하고 운동도 건너뛰는 날이 늘었어. 산책보다는 유튜브에 쓰는 시간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건강이 나빠지고 성격도 날카로워졌어. 내 상태를 숨기고 싶어서 사람들을 피하기도 했어.

이렇게 과거형으로 그때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 모든 일들이 지난 토요일을 기점으로 거의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야. 토요일에 베어북마켓이라는 독립출판 북페어에 참가했어. '잘하고 싶고, 잘해야만 하는 일' 목록 가장 마지막에 적힌 행사였지. 늦여름 동안 마음 써 만든 책을 캐리어 가득 넣어 서촌으로 가는데 선선한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어. 공들여 고데기를 한 앞머리가 망가지는 게 안타까웠지. 행사 장소에 도착해서 매대를 꾸리고,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몸과 마음이 이미 지쳤는데 일곱 시간 동안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는 게 버겁게 다가왔거든. 북페어에서는 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 책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누군가를 목격하기도 하니까. 유약해진 마음이 그 무관심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 

그렇게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혼자 벌벌 떨면서 메모지에 "다시는 이런 감정 느끼고 싶지 않아" 같은 문장을 적고 있었지. (지금 생각하니 조금 귀엽고 웃기네!) 그때는 내 주변을 둘러싼 세계가 너무 딱딱해서 이가 다 부러질 것 같았어. 그런데 있지, 지금은 말이야. 다음 북페어에는 어떤 책을 만들어서 나갈지 고민하는 중이야. (웃음) 마켓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 무심히 지나치거나, 눈길도 주지 않거나, 설명을 다 듣고 대답도 없이 떠난 사람을 만났지만, 그보다 더 마음속 깊이 남은 사람들은 몸을 기울여 설명을 듣고 질문을 건네는 사람, 말끝마다 감탄사로 호응해주는 사람, 커진 눈으로 관심을 표한 사람, 따듯한 말들을 건네는 사람, 용기내어 사인을 부탁한다는 사람. 사람과 사람들.

그날의 사인 문구는 아래와 같았어.

만나서 반가워요.
온 마음의 환함을 담아
000 님께, 민경 드림:)

그날 사인을 하게 될 줄은 몰라서 글씨를 적는 동시에 생각 난 문장을 그대로 썼는데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어. 건네받은, 환하게 빛나는 마음조차도 그대로 삼켜버리던 컴컴한 마음이 가시고, 다시 빛이 마음에 들어차고 있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 그렇게 내가 어두운 마음을 가졌던 때에도 끊임없이 빛을 건네준 곁들도 그날 나를 찾아와주었어. 그 얼굴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미안하고 고마워서.

아까 말했듯, 나를 불안하고 조급하게 만들던 일들이 이제 모두 마무리되었어. 모든 일이 끝나면 까맣게 탄 장작처럼 마음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지금 마음에는 빛이 가득해. 

"또 이렇게나 모두 다른 사랑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똑바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부드러운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을 본다"
- 김리윤, 이야기를 깨뜨리기 中

앞으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내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딱딱해지겠지. 시를 읽을 수 있는 순간들. 깜깜해지는 순간들.

하지만 그만큼 다시 빛이 들어차는 순간들이 내게 찾아올 거야. 지금은 그 순간의 한 가운데에 있어. 지금 내가 가진 세계는 푹 익은 백도처럼 말랑하고, 단내를 풍기고, 부드러운 털이 들판처럼 사방을 채우고 있어. 

내가 만들었다기보단 선물 받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세계. 

사람들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고, 사람 의존적인 내가 싫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날들이 적지 않았어. 그래서 가끔 사람이 주는 환함에 애써 무뎌지는 연습을 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사람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더 명백히 알게 되기만 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때 더 자연스럽게 살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마음에 건넬 사랑이 없을 때 가장 크게 절망하는 사람. 여름이 빛나는 와중에도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겠지. 이제 가을이 왔고, 나는 나에 대해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고,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해. 그 사랑을 잘 건네며 지내는 게 이 가을의 유일한 목표야.

*

결아, 오늘은 나에게 '사람'과 같은 존재가 너에게는 무엇인지 묻고 싶어. 거꾸로 익어가는 너의 세계를 다시 똑바로 익어가게 만드는 무언가 말이야. 그것에 대해 듣고 싶어. 

*

이제 추분이 지나, 낮의 시간보다 밤의 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어. 낮을 좋아하지만, 더 편한 건 밤이거든. 동지로 가는 시간들을 좋아한다고, 동지가 지나면 서운하다는 말을 해서 오늘 만난 사람들을 조금 놀라게 했어. 너도 혹시 이런 내 마음이 신기하니? 앞으로의 편지에서는 그 편안함 속에서 더 재미있고 솔직한 마음들을 이야기해볼 거야. 

결아, 깊어진 하늘과 넉넉해진 밤 속에서 평안히 지내길 바랄게.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나.

2022.09.25. 민경
추신. 이번 주에 찍은 윤슬 사진을 함께 동봉할게:)
답장은 여기로 보내주면 돼,
보내준 답장은 우리 모두 볼 수 있다는 점 기억해줘.
모두들 너의 마음을 궁금해하고 있으니까.
#26-2. 지난주에 받은 답장을 나눌게. 없어져야 할 마음에 대해 물었어.
"말과 행동을 휘두르는 그 사람들이 싫다"

민경아, 나는 지난주 나는 신당역에 다녀왔어.

주중에 소식을 접하고는 마음이 너무 심란해서 주말엔 꼭 다녀오고 싶었어. 신당역을 지도 앱을 이용해서 검색을 하는데, 점점 눈가가 뜨거워지더라. 역에 다가갈수록 심장이 쿵쾅거리더니 역에 도착해서는 오히려 소름이 끼쳤던 것 같아. 도저히 화장실 앞으로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어. 결국 10번 출구 앞에 마련된 추모공간으로 향하는데, 바로 앞이 초등학교 정문인거야.. 이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이 사건이 어떻게 기억될까?

참담한 심정으로 향한 추모공간에는 수많은 포스트잇과 대자보가 붙어있었어. 읽는 내내 마음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묵직하게 내려앉아서 한동안은 가만히 서있었지. 겨우 몇글자를 적어 붙이고는 근처 편의점에 포스트잇을 사러 갔어. 여분의 포스트잇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메세지를 전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가지고 있던 필기구도 그곳에 털어 놔두고 오는 내내 마음이 힘들었어.

최근에 내가 좋아하는 한 유투버가 아주 오랜만에 라이브 방송을 켜서 소식을 전했어. 늦어서 미안하다는 소식과 함께, 그동안 소식을 전할 수 없었던 이유를 전했지. 바로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어. 그런데 민경아, 이번이 처음이 아니야. 내 주변의 여러 여자들이 스토킹을 당해왔는데, 그동안 처벌법은 제자리 걸음이었지. 나는 이번 사건은 범인과 대한민국 국회가 공범인 것만 같아.

질문으로 돌아가서.. 내가 생각하는 유해한 마음을 물었지? 마음을 느낌과 생각으로 구분해서, 나는 생각을 답하고 싶어. 모든 감정은 있는 그대로 존중받아야 하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자기합리화라고 생각해.

실은 이번주 토요일에 너를 만나러 북페어에 가고싶었는데, 미리 신청해둔 연수 날짜가 강사님 사정으로 바뀌게 되어 연수를 받으러갔었어. 이번 연수 주제는 ‘자기 공감’이었는데, 연수 과정은 내가 후회하고 있는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내가 필요로했던 욕구를 찾아보고, 내가 나에게 공감해보는 활동으로 진행되었어.

그즈음의 나는 나와 뜻이 맞지 않는 동료를 향한 나의 행동에 많이 후회하고 있었는데, 6시간 동안 진행된 연수를 통해서 발견한 나의 욕구는 ‘자기 표현’이더라. 상대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나의 뜻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걸 위해 그런 행동을 취한 거였어. 신기하게.. 내가 진짜로 원하는 욕구를 찾으니까 ‘자기 연민’이 올라오더라고…

연수가 끝날 무렵, 서로의 연수 소감을 나누었는데 내가 ‘평소에 자기연민을 경계하면서 살아왔는데, 오늘 활동을 통해 내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니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연민하게 되었어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강사님이 ‘자기 합리화’와 ‘자기 연민’을 구분하라고 하시더라고. 내가 경계해온 것은 실은 ‘자기 합리화’였던 거야.

실제로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말과 행동을 떠올려보면 대부분의 공통된 뿌리가 ‘자기 합리화’인 것 같아. ‘나를 화나게 했으니, 저 사람은 맞아도 돼’, ‘나는 아파트 주민이니 이정도는 요구할 수 있지’이런 생각들. 자기합리화의 굴레에 빠진 사람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말과 행동을 휘두르는 그 사람들이 싫다.

이번 답장은 좀 무겁네. 길어진 편지에 지치진 않았는지..^^;ㅎㅎ

민경아. 9월 마무리 잘하고, 맞이하는 10월은 높은 하늘만큼 자유롭길 바라.
"거세되어야 할 마음일랑 씨조차도 자라지 못하게 덮어버렸으면"

엄마 : 스토킹이 뭐꼬?
나 : 싫다고 하는데 자꾸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것
엄마 : 몇 번 싫타카믄 치워뿌지(몇 번 싫다고 말하면 그만두지)

몇 번 싫다고 의사 표시를 하면 그만 두면 그만인데… Let it be, let it go, 놓아버리는 것, 포기 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집착하게 되는 마음이 유해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마음은 이기적이야. 세상의 기준이 자기 자신인 냥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도 좋지 않아.

감사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은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손해이겠지. 선한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적당히 얽히고 설켜 세상이 굴러가지만 특정 유해한 마음이 돌출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

아름다운 꽃과 이파리가 자라는 정원에는 잡초가 자라지 못하는 것을 보았어. 그래서 나는 생각해 보았어. 아름다운 마음을 키워 거세되어야 할 마음일랑 씨조차도 자라지 못하게 덮어버렸으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 도와주려는 마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 나누어 주려는 마음,.. 도덕 혹은 윤리라 일컫는 마음이나 십계명이나 불경의 말씀을 새겨 실천하기만 한다면 그래도 되는 사회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 가정 폭력이 옛말이 되었듯이 네가 언급한 폭력적인 욕망에 피해를 입는 일도 없어졌으면 좋겠어.

P.s. <말은 생각의 표현이며 생각은 마음의 진동이고, 마음에는 일체 성취의 원력을 갖고 있기에..>
답장 잘 읽었어.
1) 나도 자신에게 연민이 느껴질 때 그 마음을 몰아세웠던 것 같아. 자기 연민은 절대 안 된다고, 스스로를 연민하려는 나를 미워했어. 그래서인지 네 답장을 읽는데 위로가 되었어. 북페어에서 만났다면 반갑고 기뻤겠지만 네가 느낀 마음이 가깝게 다가와서 이편도 나는 좋아:) 그리고 이번에 못 본 만큼 다음에 만난다면 더 반갑겠지. 신당역에 다녀왔구나. 네가 느꼈을 슬픔이 가진 결이 나에게도 그 사건 이후 마음속에 지속되고 있어. 이 일에서 같은 것을 보고, 또 바꾸고 싶은 것이 같은 사람들의 말과 글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고 있어. 네 답장을 읽으면서도 마음이 또렷해졌어. 너의 마음도 가을 안에서는 한결 더 자유롭길 바랄게.
2) 네가 말해준 도덕, 윤리, 불교의 십계명 등 오래 전해진만큼 중요한 것들일 텐데 요즘에는 그런 마음을 따르는 것이 바보 같고 손해 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만연한 것 같아. 그러니까, 유해한 마음들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하는 것이겠지. 나도 마음이 모날 때 불교의 말들을 찾아보곤 해. 이번 주에는 '무재칠시'에 눈길이 갔어. 돈 없이도 나눌 수 있는 일곱 가지를 뜻하는 말인데 따듯한 눈빛, 밝은 얼굴, 부드러운 말 등이 포함되어 있어. 요즘 그런 걸 나누는 것을 소홀히 한 것 같아서 아차 싶었지. 그런 것들은 남에게 좋은 만큼 나에게도 좋을 테니, 다른 사람들과 나 자신을 동시에 돌보는 일이기도 한 것 같아. 아름다운 꽃들을 같이 가꿔보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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