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 같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뚝뚝 흐르는 것으로부터
이가 들어가지 않는 단단함을 향해"
- 김리윤, 이야기를 깨뜨리기 中
안녕 결, 민경이야.
오늘 편지는 김리윤 시인의 <이야기를 깨뜨리기>라는 시의 한 연으로 시작해보았어. 나는 있지, 힘들 때만 시를 읽을 수 있어. 마음이 가라앉을 때만 차분한 표정으로 시의 언어에 집중할 수 있거든. 그리고 그렇게 시를 읽으면서, 시가 주는 고유한 위로의 순간을 기다려.
내가 좋아하는 시는 마음의 공간과 감정의 시간이 아름답게 언어로 재현된 시들이야. 그런 시를 읽을 때면 난해함과 고통으로만 읽히던 나의 마음과 감정에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게 돼. 마음을 내팽개치고 싶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리고 싶을 때 그런 시들을 읽으면 가만히 그 마음을 껴안고 싶어지기도 해. 그런 위로의 순간을 좋아해.
이번 주에는 김리윤 시인님의 <투명도 혼합 공간>이라는 시집이 그 역할을 해주었어. 너에게도 권하고 싶은 시집이야.
많이 지쳤다는 걸 알고 있었어. 여러 증상이 나타났었거든. 그중 가장 명확했던 건, 사람들이 건네는 빛나는 마음을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었어. 그 환함에 눈부심만을 느끼고, 돌려줄 마음이 없어서 도망가고 싶었어.
지난여름부터 잘하고 싶고, 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연달아 생기고 일정이 겹치기도 했어. 그래서 쉴 때마다 조마조마했어. 쉬는 만큼 결과물의 질이 떨어질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지. 자연스럽게 식사를 챙기지 못하고 운동도 건너뛰는 날이 늘었어. 산책보다는 유튜브에 쓰는 시간이 늘어났고. 자연스레 건강이 나빠지고 성격도 날카로워졌어. 내 상태를 숨기고 싶어서 사람들을 피하기도 했어.
이렇게 과거형으로 그때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 모든 일들이 지난 토요일을 기점으로 거의 마무리되었기 때문이야. 토요일에 베어북마켓이라는 독립출판 북페어에 참가했어. '잘하고 싶고, 잘해야만 하는 일' 목록 가장 마지막에 적힌 행사였지. 늦여름 동안 마음 써 만든 책을 캐리어 가득 넣어 서촌으로 가는데 선선한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어. 공들여 고데기를 한 앞머리가 망가지는 게 안타까웠지. 행사 장소에 도착해서 매대를 꾸리고, 사람들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몸과 마음이 이미 지쳤는데 일곱 시간 동안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는 게 버겁게 다가왔거든. 북페어에서는 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 책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누군가를 목격하기도 하니까. 유약해진 마음이 그 무관심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되었지.
그렇게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혼자 벌벌 떨면서 메모지에 "다시는 이런 감정 느끼고 싶지 않아" 같은 문장을 적고 있었지. (지금 생각하니 조금 귀엽고 웃기네!) 그때는 내 주변을 둘러싼 세계가 너무 딱딱해서 이가 다 부러질 것 같았어. 그런데 있지, 지금은 말이야. 다음 북페어에는 어떤 책을 만들어서 나갈지 고민하는 중이야. (웃음) 마켓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 무심히 지나치거나, 눈길도 주지 않거나, 설명을 다 듣고 대답도 없이 떠난 사람을 만났지만, 그보다 더 마음속 깊이 남은 사람들은 몸을 기울여 설명을 듣고 질문을 건네는 사람, 말끝마다 감탄사로 호응해주는 사람, 커진 눈으로 관심을 표한 사람, 따듯한 말들을 건네는 사람, 용기내어 사인을 부탁한다는 사람. 사람과 사람들.
그날의 사인 문구는 아래와 같았어.
만나서 반가워요.
온 마음의 환함을 담아
000 님께, 민경 드림:)
그날 사인을 하게 될 줄은 몰라서 글씨를 적는 동시에 생각 난 문장을 그대로 썼는데 그 문장이 마음에 들었어. 건네받은, 환하게 빛나는 마음조차도 그대로 삼켜버리던 컴컴한 마음이 가시고, 다시 빛이 마음에 들어차고 있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 그렇게 내가 어두운 마음을 가졌던 때에도 끊임없이 빛을 건네준 곁들도 그날 나를 찾아와주었어. 그 얼굴들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어. 미안하고 고마워서.
아까 말했듯, 나를 불안하고 조급하게 만들던 일들이 이제 모두 마무리되었어. 모든 일이 끝나면 까맣게 탄 장작처럼 마음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지금 마음에는 빛이 가득해.
"또 이렇게나 모두 다른 사랑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똑바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부드러운 세계를
흘러가는 시간을 본다"
- 김리윤, 이야기를 깨뜨리기 中
앞으로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내 세계는 거꾸로 익어가는 과일처럼 딱딱해지겠지. 시를 읽을 수 있는 순간들. 깜깜해지는 순간들.
하지만 그만큼 다시 빛이 들어차는 순간들이 내게 찾아올 거야. 지금은 그 순간의 한 가운데에 있어. 지금 내가 가진 세계는 푹 익은 백도처럼 말랑하고, 단내를 풍기고, 부드러운 털이 들판처럼 사방을 채우고 있어.
내가 만들었다기보단 선물 받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세계.
사람들 영향을 너무 많이 받는다고, 사람 의존적인 내가 싫다고 스스로를 다그치는 날들이 적지 않았어. 그래서 가끔 사람이 주는 환함에 애써 무뎌지는 연습을 하기도 했지.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사람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더 명백히 알게 되기만 했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때 더 자연스럽게 살 수 있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그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마음에 건넬 사랑이 없을 때 가장 크게 절망하는 사람. 여름이 빛나는 와중에도 그토록 힘들었던 이유겠지. 이제 가을이 왔고, 나는 나에 대해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고, 마음에는 사랑이 가득해. 그 사랑을 잘 건네며 지내는 게 이 가을의 유일한 목표야.
*
결아, 오늘은 나에게 '사람'과 같은 존재가 너에게는 무엇인지 묻고 싶어. 거꾸로 익어가는 너의 세계를 다시 똑바로 익어가게 만드는 무언가 말이야. 그것에 대해 듣고 싶어.
*
이제 추분이 지나, 낮의 시간보다 밤의 시간이 더 길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이 두근두근했어. 낮을 좋아하지만, 더 편한 건 밤이거든. 동지로 가는 시간들을 좋아한다고, 동지가 지나면 서운하다는 말을 해서 오늘 만난 사람들을 조금 놀라게 했어. 너도 혹시 이런 내 마음이 신기하니? 앞으로의 편지에서는 그 편안함 속에서 더 재미있고 솔직한 마음들을 이야기해볼 거야.
결아, 깊어진 하늘과 넉넉해진 밤 속에서 평안히 지내길 바랄게.
우리 다음 주에 또 만나.
2022.09.25. 민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