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카페인입니다. 카페인은 커피를 인류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죠. 커피는 중세 유럽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잠을 깨우고 다양한 지적인 활동들에 기여해왔습니다. 일단 카페인과 커피 두 단어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부터가 둘의 밀접한 관계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마치 카페인이 커피의 본질적인 요소인 것처럼요. 카페인이 없는 커피는 알코올이 없는 맥주 같은 느낌입니다. (번외질문 : 무알코올 맥주는 맥주일까요?)
만약에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떤 음료라고 말하게 될까요? 정상적인 품질의 디카페인인 경우에는 커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쩌면 우리는 이미 이렇게 커피맛이 나는 음료를 커피라고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여전히 애매한 느낌인데 낮과 밤을 구분해서 생각하면 좀 더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녁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밤에 편두통을 겪는 사람들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페인을 필요로 하는 것은 보통 낮 시간대입니다. 이 때는 카페인이 커피를 커피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졸린 눈을 비비며 카페에 들어선 사람이 '디카페인은 커피가 아니다'고 말해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시간대지요.
하지만 밤에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디카페인은 잠을 쫓아주는 각성효과는 거의 없지만, 늦은 시간에도 커피맛을 즐기고 싶은 고객과 저녁에도 커피를 팔고 싶은 카페에게 훌륭한 솔루션이 되어줍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만큼은 디카페인이 어엿한 '커피'로서 기능을 해왔다고 봐도 무리는 없지 않을까요? 생각해보면, 낮에만 마실 수 있었던 반쪽짜리 기호식품을 하루종일 즐길 수 있는 음료로 만들어준 것은 커피를 한단계 앞으로 나아가게 한 혁신적인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이러한 공을 봐서라도 저는 기꺼이 디카페인을 커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