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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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고운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고급짐과 여유러워보임이 한없이 예뻐보여 나도 비속어를 쓰지 않기로 했다. 않기로 했었다. 습관적으로 쓰던 비속어를 내뱉지 않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면 된다. 정말로 어려운 것은 욕이 나와야 될 타이밍에 욕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빨간색, 그러니까 불의 기운이 가득한 사주를 타고 태어난 것치고 나의 성격이 온순하다거나 화를 많이 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성격을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대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성격이 더러워졌었다. 그렇게 온갖 성질과 짜증을 다 내며 몇 년간 살아보니 그것도 피곤하고 귀찮았다. 물론 지금의 내가 화를 안 내는 유들유들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정한 선만 넘지 않는다면 큰소리를 내는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최근 종종 하는 생각들 중 하나는 '내가 나를 피곤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 자신은 잘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내가 가진 나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나도 촘촘하다고 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각각의 기준에 대해 너보다 못난 애들도 생각해봐'라는 말을 했는데 세상에 이보다 와닿지 않는 말이 없었다. 등신 쪼다 같은 인간을 마주치지 않는 이상 각각의 인간들은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산다. 다들 좋은 점이 있기 때문에 단점을 느낄지언정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거나 그것이 치명적인 단점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타인의 단점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나보다 못난 것도 없는 것이다. 

  다들 적어도 한두개씩의 장점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장점이 내가 나에 대해 가지는 기준이 된다. 타인의 장점을 퀼트 이불마냥 조각조각 이어붙여서 내 앞에 세운 기준들은 그 사람이 가진 최고의 특성이기에 높은 허들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를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멈추면 안될 것 같기 때문이다. 멈추는 순간 이 사회에서 영영 도태될 것 같은 그 기분을 아는가? 그렇게 퀼트는 이불이 아닌 커다란 나무 판에 세워놓은 여러개의 칼날이 된다.
  요즘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다이어트다. 깨끗한 음식을 영양 균형을 맞춰서 먹으며 꾸준한 운동을 병행하는 것은 귀찮지만 하기 싫다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정말로 어렵고 힘든 것은 다이어트를 포함한 모든 외모 관리라는 것들이 주는 자괴감이다. '이렇게까지 관리를 해야돼?'가 아닌 '와 나는 먹고싶은거 참고 운동해도 '죽을 때까지 다이어트해야겠네'라고 느끼는데 저 친구는 먹고 싶은거 다 먹어도 얇고 길쭉하네?'라는 물음표가 떠오르는 순간 드는 '와 시발 나 좀(어쩌면 확실히) 잘못 태어난 듯?'이라는 출생 자체에 대한 의구심은 이성과 감성 모두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나만 이렇지, 시발
  바꿀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비교하지 말고 너의 장점에 집중하라고 하지만 바닥을 한 번 치는 순간 어느정도 양호한 상태로 돌아왔다한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멈출 수 없다. 물론 이 의심은 자신의 장점에 대한 의심도 포함된다. 다들 에쁘고 다들 몸매가 예쁘고 다들 똑똑한데 시발 나만 맨날 이따구지? 라는 생각이 치고 올라올 때마다 욕을 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이런 실존적이고 깊은 우울감은 단순히 비속어를 사용하는 것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된다. 그리고 그 노력의 시작은 '시발'을 몇 번 입 밖으로 내뱉은 것으로 시작한다. 몸이 축 쳐질 정도로 우울하고 눈물만 줄줄 날 때에는 욕을 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욕을 한두 마디 뱉어내고 뭐라도 하면 뒤에 이어진 행동이 주는 단절 덕분에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진다. 오 시발 부처님 이 미천한 중생을 구제해주소서! (불교 교리에 전혀 맞지 않는 말임을 알려드립니다)
 
  욕은 짜증을 화로 키우지 않는 좋은 억제제이기도 하다. '아 시발' 한 마디와 함께 순조롭게 넘어가는 사건들을 우리는 인생에서 자주 마주한다. 물론 사회성이 떨어지는 인간은 아니므로 아무데서나 화를 내진 않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비속어 사용은 더욱 중요하다. 아이폰 알림센터에 피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과 함께 카톡 알림이 떳을 때에도, 마트에서 카트로 길을 막고 절대 비켜주지 않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에도, 이유 없이 나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풀이를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말이다. '닥쳐 미친놈아. 쓸데없이 손가락/입 놀리지 말고 꺼져. 눈치도 없는게 이젠 눈깔도 없어졌니? 제발 쌉쳐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디스토피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욕을 할 때마다 자동으로 신체에 조금씩 해를 가하는 사회였다면 나는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미쳐서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다. 
바른 말을 사용할 여유
  비속어의 기원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채로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있을까? 비속어가 비속어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모욕적이기 때문이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친절하고 상세하게 이런 설명을 해주시는 선생님들이 참된 교사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분들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본인은 교사라는 직종의 공무원이라는 것이다. 학생이 사고치면 골치는 아프겠지만 어쨌든 교사라는 직업은 나름 철밥통이고, 지금은 아니지만 라떼는 말이야 교사는 엄청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고민을 안고 살지만 안정감과 존경심이 주는 자존감과 여유를 무시하고는 이 분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대부분의 나이 많은 선생님들께서 조용하고 순한 성질을 타고난 부분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마 나도 강남에 월세가 따박따박 나오는 빌딩을 한 채 보유하고 있다면 항상 미소를 띄고 바른 말 고운 말을 쓸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특정 비속어는 사회적 약자를 낮게 보거나 희화화하는 표현이기에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에 동의하며, 그런 단어는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단어는 이미 기원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현대 사회에서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으며, 그렇게 치면 사용할 수 있는 욕이 하나도 없다. 이런 내 자신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언피씨하다)는 점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진영논리에 빠져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특정 인물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식으로 나름의 항변을 해본다.
  비속어를 사용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이미지가 깎인다는 말에 구구절절 공감하는 만큼, 시발, 이제는 욕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게 되었다.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요정 대모, 나의 시발. 뮤지컬 <시카고>에 등장하는 6명의 살인자*도 평소에 비속어를 활발하게 사용했다면 감옥엔딩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욕과 나의 관계를 잘 정립해 나가야되는 의무가 있다. 어떤 족같은 상황을 마주하고, 웬 같지도 않은 바퀴벌레만도 못한 버러지 같은 새끼가 개같이 굴고 아가리를 함부로 놀려도 나의 멘탈을 잘 부탁해. 
   
*<시카고>의 넘버인 'Cell Block Tango'는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쿡 카운디 감옥에 수감중인 6명의 살인자들이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이야기를 풀어내는 곡이다. 죽은 사람도 죽을만한 짓을 했지만 죽인 사람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드는 생각을 들게 하는 내용이다. 위의 첨부된 영상을 클릭하면 넘버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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