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마르지엘라’, ‘드리스 반 노튼’, ‘라프 시몬스’, 그리고 ‘앤 드뮐 미스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벨기에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들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벨기에 출신의 디자이너들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은 획일화된 흐름을 거부하고 기존의 패션 질서에 대항하는 혁명에 가까운 디자인을 선보였기 때문인데요.

 

오늘은 그중 벨기에 1세대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meester)’와 그녀의 브랜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해체주의라는 개념과 함께 탄생한 그녀. 고딕, 그리고 펑크 정신에 영향을 받은 그녀는 어두우면서도 낭만적인 세계를 창조해 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에요.

 

앤 드뮐 미스터의 로고가 들어간 가방을 맨 대학생들이야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긴 합니다만, 그 로고가 패션계의 ‘전설’로 기억될만한 디자이너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겁니다. 이제는 정말 브랜드의 철학이 들어간 그녀의 작품임을 알고 입어야 할 때. 이번 EGOZINE을 다 읽고 나면 길면서 유약한, 섬세하지만 거친, 중성적인 아방가르드를 꾀하는 앤드뮐미스터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겁니다.

  

벨기에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앤 드뮐미스터.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디자이너 그룹인 '앤트워프 식스'의 일원으로 그 명성을 떨치기도 했는데요.

그녀의 이름을 딴 브랜드, '앤 드뮐미스터(Ann Demeulemeester)'는 성별의 경계를 허문 중성적인 분위기를 무채색의 색감과 날렵한 실루엣으로 드러내어 다크한 로맨틱 무드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 그림자와 빛의 균형미가 돋보이는, 동시에 음울하면서도 서정적인 컬렉션을 쑤준히 선보이는 브랜드에요.

벨기에 출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아방가르드 패션 디자이너 6명을 꼽으라고 한다면. 그냥 ‘앤트워프 식스(Entwerp 6)’라고 답해주시길. 앤 드뮐미스터, 반 노튼, 더크반 샌, 윌터 반 베이렌동크, 더크 비켐버그, 바리나 이, 이렇게 6명이죠. 공통점이라 하면 그들은 모두 1980년대 벨기에의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의 디자인에는 모두 실험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었으며 독창적인 개성과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해체주의적인 무드가 가미되어 있어요.

 

오늘 소개해 드릴 앤 드뮐미스터 또한 ‘앤트워프 식스’ 출신입니다. 그녀는 1959년 벨기에에서 태어났어요. 패션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있던 앤 드뮐미스터는 78년 파슨스, 세인트 마틴과 함께 세계 3대 패션스쿨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에서 본격적인 패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981년 졸업과 동시에 황금 물레상까지 수상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패션에 두각을 나타난 사람인지 알 수 있겠죠. 그녀를 포함한 ‘앤트워프 식스’ 모두가 미완성의 미학을 자랑하는 새로운 아방가르드 디자인을 선보이며 초반부터 화려한 이력과 함께 글로벌 패션 씬에 참신한 변형을 시도해요.  

앤 드뮐미스터는 런던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사진작가이자 남편인 패트릭 로빈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창립해요. 그리고 ‘앤트워프 식스’ 출신 중에서 가장 먼저 첫 컬렉션을 발표합니다. 87-88년에 여성 컬렉션을 시작해 92년도의 첫 파리 컬렉션은 ‘테일러링의 귀재’라는 칭호을 얻을 정도로 패션계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어요. 

무채색의 제한된 색상, 다채로운 소재의 믹스매치, 감각적인 커팅, 그리고 앤 드뮐미스터만의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무심할 정도로 거친 마무리가 그녀만의 특징이었죠. 그 당시에는 ‘중성적인 아방가르드’라고 평가받았는데, 당시 칼 라거펠트는 그녀를 ‘젊은 디자이너 중 가장 재능 있는 디자이너’라고 명했을 정도라고. 

그녀는 2014년 S/S를 끝으로 은퇴하였습니다. 이후로 마틴 마르지엘라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세라스티앙 뮤니에르(Sebastien Meunier)를 거쳐, 지난 2020년부터는 뉴가즈(New Guards) 그룹의 창업자인 클라우디오 안토니올 리(Claudio Antonioli)가 집도하고 있습니다.

  

앤 드뮐미스터를 논할 땐 이 인물을 절대 빠뜨릴 수 없을 정도. 그녀의 뮤즈이자 소울메이트였던 ‘패티 스미스(Patti Smith)’는 미국의 로커, 싱어 송 라이터이자 시인입니다. 미국 음악의 ‘펑크계의 대모’, 혹은 ‘여자 밥딜런’이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에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모습을 간직한 그녀는 앤 드뮐미스터에게는 늘 영감의 대상이었는데요. 패티 스미스의 화장기 일절 없는 밋밋한 얼굴, 셔츠나 재킷을 입는 바이섹슈얼적인 옷차림, 그리고 거친 창법은 고스란히 앤 드뮐미스터의 컬렉션에 녹아들었죠.

 

처음으로 앤 드뮐미스터와 패티 스미스가 함께 콜라보레이션 무대를 선보인 것은 2000 SS 컬렉션. 얇은 튤 소재의 탑에 패티 스미스의 자서전에 쓰인 문구를 넣기도 하고 패티 스미스가 사랑하던 조합인 흰 셔츠와 검정 수트를 선보이기도 했어요. 2006 FW 컬렉션에서는 직접 패티 스미스가 무대 위에 뮤즈로 설 정도였다고. 앤 드뮐미스터의 쇼장에서는 패티 스미스의 보이스가 백뮤직으로 번번히 울려 퍼지기도 했어요.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 은은하지만 우아한 멋이 숨 쉬는 강렬한 디자인 그리고 조형미를 갖춘 해체주의적 미까지. 앤 드뮐미스터는 다양한 무드를 갖춘 아이템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무채색, 화려하지 않은 디테일의 단순한 디자인으로 미니멀리즘적인 특징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미니멀리즘에 화려한 커팅과 사선 재단이 들어가면서 관능적인 아름다움이 추가되면, 그야말로 ‘앤 드뮐미스터’스러운 디자인이 탄생되죠. 직선 위주의 절제미로 차분해보이지만,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해체주의의 관능성이 숨겨져 있는 것이 특징.

 

마르지엘라의 해체주의라 하면, 옷의 디테일이 예상치 못한 부위에 있거나 봉제선이 뒤집혀 있는 등 사고를 깨는 디자인을 떠올리기 십상인데요. 그에 반해 앤 드뮐 미스터의 해체주의는 그야말로 구조적인 변형입니다. 다양한 레이어와 변형된 볼륨, 언밸런스한 커팅을 주로 활용해요. 사선으로 길게 커팅되어 어긋난 여밈 위치로 자연스러운 주름을 형성하거나, 좌우 라펠과 헴 라인의 길이에 변화를 주어 불균형적인 구조를 강조하는 식이죠. 그러한 비대칭적인 형태에 소재를 화려하게 써서 히피, 고스, 바로크의 시대적 반항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내 옷에는 컨셉이 없다. 무컨셉이 컨셉이다”

(앤 드뮐미스터)

 

그저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만든다고 하는 앤 드뮐미스터. 그래서 그녀가 선호하는 컬러는 블랙과 같은 무채색입니다.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기 위해 블랙 위주의 무채색 소재를 선택하지요. 유행에 타지 않는 실험적인 디자인을 꾸준히 선보이기 위해서는 블랙만큼 안성맞춤인 컬러도 없었던 것. 그녀는 가죽, 깃털, 캔버스, 머리카락, 성긴 니트, 스웨이드, 종이 등 다채로운 소재를 활용하여 한 가지 컬러가 가지는 단조로움을 ‘고급스러움’과 ‘기발함’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앤 드뮐미스터는 제 인생에서 특히 중요한 디자이너 중 한 명입니다. 그래서 저 또한 브랜드가 변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안토니올 리-

 

앤 드뮐미스터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뮤즈였던 패티 스미스가 사랑했던 디자인, ‘몸통을 가로지르는 스트랩 블레이저’가 유난히 돋보였던 이번 시즌. 앤 드뮐미스터의 1988년 봄 컬렉션이 연상됐는데요. 긴장감과 리듬감을 더하는 가죽 스트랩, 펄럭이는 팬츠 수츠, 몸을 유려하게 휘감는 비대칭 실루엣의 재킷, 그리고 시그니처인 시크한 블랙 페도라까지. 너무 어려서 90년대 앤 드뮐미스터를 떠올리지 못할 이들에겐, 2022 SS 쇼 하나만으로 브랜드의 매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솔직 면밀했습니다.

  

앤드뮐이 사랑하는 블랙 앤 화이트 룩. 시그니처 아이템인 소피에케 햇(Sofieke Hat)이 돋보입니다.

 

길게 늘어뜨린 여러 개의 스트랩이 이번 시즌 시그니처 디테일. 전반적으로 무채색이지만, 엔드로지너스 스타일의 세미 오버핏 실루엣이 루즈한 무드를 강조해 주네요. 

팬츠 플라이 부분이 드롭되어 있는 디테일도 재미있는 부분인데요. 전반적으로 시크하면서도 유려한 이 룩을 블랙 레더 레이스업 부츠로 깔끔하게 마무리했습니다.

* 플라이(fly) : 바지 앞쪽의 지퍼나 단추의 덮개

화이트컬러로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이 물씬 드는. 땅에 닿을 정도로 루즈한 화이트 컬러의 크로셰 맥시 드레스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코트 라펠 버튼홀에 스트랩을 연결시켜 늘어뜨린 세심함까지. 이것이야말로 섹시하면서도 시크한 분위기를 지향하는 앤드뮐미스터의 대표적인 룩이지 않을까요.

  

이쯤됐으면 블랙과 화이트의 단조로운 컬러도 앤 드뮐미스터의 손을 거치면 아방가르드하고 세련된 패션으로 변신한다는 것을 아셨을 테죠. 세계 패션계를 평정한 앤 드뮐미스터는 그녀가 닦은 길에 대해서 이렇게 전했습니다.

 

“난 이미 원하는 걸 모두 이뤘다. 꿈꾸는 옷을 만들었고, 그 옷을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더 높은 목표를 찾는 건 내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패션은 사업이 아니니까. 다만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도구일 뿐이다. 삶의 본질이 노동과 사랑에 있다고 믿고, 옷 역시 삶의 본질에 가깝게 만들려고 애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