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된 이야기
좋은 브랜드란 무엇일까?
이 막연하고 어려운 질문의 답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준과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만의 이야기를 간직한 브랜드는 감히 그 ‘좋은 브랜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역의 역사와 함께 한 시간의 파도를 타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갈 채비를 중인 제주의 좋은 브랜드 ‘한림수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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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라는 가치를 구입하는 사람들
운영자가 브랜딩에 관심을 갖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돌아보니 그것은 ‘이야기를 좋아해서’였습니다. 모든 브랜드가 마치 사람처럼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체성’이 뚜렷하다는 것이고, 그 정체성은 해당 브랜드만의 ‘가치’로 발전하여 자연스레 소비자들의 구입 동기로 작용할 것이라 믿어서지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시장이 되었습니다. ‘가치소비’라는 말로 상징되는 요즘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에는 브랜드의 이야기가 주는 가치와 공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주’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나고, 자라고, 사라지기까지의 인생 그래프를 경험한 브랜드 ‘한림수직’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장편 역사 드라마 같습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는 한림수직이 문을 닫고 16년이 흐른 후인 2021년, 예상치 못한 시즌2를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부활(?)은 끝났지만 사실은 끝나지 않았던 한림수직과 제주의 이야기가 있어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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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림수직의 브랜드 라벨 ⓒ재주상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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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체성’이 뚜렷하다는 것이고,
그 정체성은 해당 브랜드만의 ‘가치’로 발전하여
자연스레 소비자들의 구입 동기로 작용할 것이라 믿어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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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마리의 양, 명품으로 성장하다
한림수직은 전쟁 후 온 나라가 후유증에 시달리던 1959년 3월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특수한 시대적 상황은 브랜드 탄생의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아일랜드에서 온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2018년 선종) 신부는 제주 4.3 사건과 6.25 전쟁을 연달아 겪으며 제주의 사람들, 특히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러던 중 돈을 벌러 부산 공장으로 간 17세 소녀 신자가 사고를 당해 3개월 만에 시신으로 돌아오는 사건이 벌어지자 그 결심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게 됩니다. 신부는 일단 고향의 가족들이 마련해준 돈으로 35마리의 양을 구입해 ‘성(St.)이시돌 목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양들이 생산하는 양모로 뜨개질 기술 기반의 의류 회사 ‘한림수직’을 열었습니다.
그는 뜨개질 기술을 전수해줄 세 명의 아일랜드 수녀를 초청하고, 한국에는 없는 수직사 기계의 수입을 위해 직접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재래식 배틀로 짜는 수공예 형식의 고급스러운 지역 브랜드이자 제주 유일의 제조 브랜드가 성장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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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수직사 기계를 배우는 임피제 신부와 파견 수녀의 모습 ⓒ재주상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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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인 발전과 성장을 계속 한 한림수직은 7,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직원수가 1300명에 이를 만큼 크게 발전했습니다. 규모의 성장뿐 아니라, 명품 브랜드에 견주어도 부족함 없는 품질과 고급스러움을 인정 받아 서울 웨스틴조선호텔과 제주 KAL호텔에 직영매장을 운영할 정도의 질적 성장까지 이루어 냈습니다. 그저 인간적인 삶을 위해 시작한 브랜드가 규모와 품질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는 현재 한림수직의 스웨터를 그리워하는 국내 소비자들은 물론, 일본 빈티지 시장의 마니아들에게까지 소문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엄마가 딸에게 물려주는 가보의 개념이 생성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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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인간적인 삶을 위해 시작한 브랜드가
규모와 품질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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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시모어와 제주의 연결고리
신부의 고향인 아일랜드 서쪽 골웨이만에는 ‘아란 제도’라는 세 개의 섬이 있습니다. 이 중에는 ‘이니시모어’라는 가장 큰 섬이 있는데, 그곳에는 800명의 주민들이 살았고 그들이 짜던 스웨터가 아란 스웨터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이 스웨터의 ‘아란 패턴’은 이름만 들어서는 낯설지만 눈으로 확인하면 ‘아! 이거!’할 정도로 익숙합니다. 이 패턴의 종류들을 모아 놓은 뜨개질 서적과 뜨개질 법을 공유하는 모임 등도 많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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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란 패턴 예시 ⓒ일본 보그사
한림수직에서 생산된 스웨터들의 시그니처 패턴인 아란 패턴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고 가죠. 그 의미와 상징성 또한 한림수직이 품은 중요 키워드들(아일랜드/척박한 환경과 사람/섬 …)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신비로운 빛의 깊고 푸른 바다가 떠오르는 아일랜드.
이곳의 섬 아란에서 시작된 아란 패턴은 환경적인 요소들로부터 영감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밧줄 무늬, 다이아몬드 무늬 등으로 대표되는 아란 패턴은 집집마다 다른 의미를 담으며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중세 유럽의 가문들이 각각 다른 이미지의 문장을 가지고, 우리나라의 각 가정이 조금씩 다른 김치 레시피와 손 맛을 가진 것처럼요.
또한 이 패턴은 바다로 떠난 남편들에 대한 걱정과 풍어를 기원하는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전설 또한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남편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지경으로 바닷가에 쓸려와도 각 가정의 스웨터 무늬를 보고 가족을 알아보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전엔 항해 기술도 체계적이지 않아 수많은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설과 배경은 육지로 떠났던 17살 소녀의 차가운 귀향과도 맞닿는 것입니다. 외딴섬에서 육지와 떨어져 거의 자력으로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야 했던 옛 제주 사람들의 삶과 간절함은 아란 섬의 그들과 유사했고요. 이렇듯 아란 패턴은 한림수직의 이야기를 할 때 꼭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상징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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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섬에서 육지와 떨어져 거의 자력으로 전쟁의 상처를 이겨내야 했던 옛 제주 사람들의 삶과 간절함은 아란 섬의 그들과 유사했고요. 이렇듯 아란 패턴은 한림수직의 이야기를 할 때 꼭 알아야 할 매우 중요한 상징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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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시즌2의 시작
2010년대 초 제주로 내려간 콘텐츠 기획사 ‘재주상회’의 고선영 대표는 이러한 이야기를 가진 한림수직의 부활을 실천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회적 기업 ‘아트임팩트’와 한림수직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이시돌 목장의 지역민 복지 재단법인 ‘이시돌농촌산업개발협회’와 함께 한림수직을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또한 처음 이시돌 목장이 문을 열 때 들어온 35 마리 양들의 후손인 50여 마리의 양들에서 뽑은 양모는 시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비록 현대 기술의 측면에서 100% 양모로만 제작을 하기 어려워 친환경 섬유 소재를 섞어야 했고, 제조 또한 제주 내에서 해결하기 못해 결국 육지의 손을 빌려야 했지만, 이렇게 제작된 한림수직의 시그니처 디자인들은 부활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몇 가지 꾸려진 니트와 가방, 그리고 머플러는 금세 품절이 되며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소비자들의 애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한림수직은 한창 브랜드가 커가던 시절 실제로 일했던 삼춘(남녀 구분 없이 동네 어른을 부르는 제주의 방언)들을 수소문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그분들과 함께 ‘장인니팅’ 라인을 만드는 것, 장인과 청년들을 이어주는 니팅 스쿨을 운영 등 다양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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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을 통해 판매된 2021년 제품들 ⓒ재주상회
이야기로 하는 브랜드 리뉴얼
흔히 말하는 ‘브랜드 리뉴얼’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로고와 같이 시각적인 요소들을 리뉴얼하여 브랜드 이미지를 달리하는 방법, 브랜딩 방향성과 타깃, 톤&매너 등을 변화시켜 대대적인 리뉴얼을 하는 방법 등이 있지요. 그리고 한림수직과 같이 브랜드가 가진 역사를 지금에 맞게 이어가며 새롭게 리뉴얼하는 방법이 가능합니다.
좋은 브랜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역사가 긴 것이 아니라 그 긴 시간을 어떠한 이야기로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림수직이 시즌2 리뉴얼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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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주상회 한림수직 | http://iiinjeju.com/hallimhandweaver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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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 '수직, 기억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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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분들께 이 뉴스레터를 강추합니다!
+ 자기만의 이야기와 역사를 가진 브랜드를 알고 싶은 분들
+ 가치 있는 로컬 브랜드의 예시를 찾는 분들
+ 브랜드 리뉴얼의 새로운 개념을 깨닫고 싶은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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