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서사로 보내는 첫 번째 뉴스레터입니다.
오늘 뉴스레터는, 구독자분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입니다.
안녕하세요. 복음과상황 독자 여러분. 정민호 에디터입니다. 뉴스레터를 구독하지도 않았는데, 메일을 받게 되어서 놀라셨나요? 복음과상황이 2024년 첫 주부터 매주 <서사의 서사>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합니다.
<서사의 서사>는 '책의 이야기'입니다. 앞으로 이 뉴스레터를 통해서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그중에서도 기독교 책에 관한 이야기가 주가 될 것입니다.
책이 처음부터 독자에게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들고 앉아서 펼치고 읽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다가옵니다. 이유 없이 그냥 만들어지는 책은 없습니다. 저마다 고유한 서사와 내용을 가지고 있죠. 그걸 알게 된다면, 그 책을 사서 읽고 싶어질지도 모르죠.
책을 읽으며 산다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요? 2024년 첫 주부터 기독교 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뉴스레터로 발행합니다. 다양한 책이 '이야기'가 되어 구독자분들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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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는 '엔도 슈사쿠'입니다.
2023년 올해는 엔도 슈사쿠 탄생 100주년이었습니다. 그는 소설 《침묵》으로 유명한 작가인데요. 대표작 《침묵》이 지닌 무게감 때문에 한국 기독교 내에선 작품 세계 전체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습니다. 알고 보면 그는 기행문, 역사소설, 유머소설, 추리소설, 에세이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재다능한 '글쟁이'이자 '익살꾼'이었습니다. 그를 좋아했던 엔도 슈사쿠 '덕후'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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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엔도 슈사쿠를 처음 접한 시점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십몇년 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던 기독교인 학생이 ‘기독교 문학이란 무엇인가?’ 고민하던 차에 김은국의 《순교자(The Martyred)》(1965)와 함께 누군가로부터 추천받은 작품이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만 다녔던 탓에, ‘일사각오의 순교 신앙’ ‘영광과 승리의 예수’는 너무도 익숙한 관념이었다. 엔도는 17세기 일본 기독교(가톨릭) 박해 역사에 근거하여 쓴 소설로 두 이미지를 뒤흔들어 낯설게 보도록 이끄는데, 충격이었다.
작중 사제 로드리고가 박해기 일본의 나가사키 험지에서 맞닥뜨린 것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기리시탄 농민들의 삶이었다. 농민들은 비참한 삶의 탈출구로서 내세 신앙에 붙들려있었다. 그럼에도 이들을 배교시키기 위한 막부의 전략과 포위망은 촘촘했고, 결국 붙잡힌 로드리고는 갈림길에 선다. ‘후미에’(踏繪, 예수 그리스도나 마리아가 새겨진 판)를 밟아 배교하는 길을 택하면,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린 채 극심한 고통 중에 죽어가는 농민 세 명을 살릴 수 있다. 밟지 않으면, 이들은 이대로 죽을 것이다. 배교냐 아니냐. 무엇이 숭고한 신앙 행위인가?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제는 발을 들었다. … 자기는 지금 자기의 생애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던 것을, 가장 성스럽다고 믿어왔던 것을, 인간 최고의 이상이라 꿈꾸어왔던 것을 밟는다. 이 발의 아픔, 그때, 밟아도 좋다고 동판의 그 사람은 사제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너의 발의 아픔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침묵’(沈默)이라는 제목이 갖는 무게감 때문에, 이 작품이 ‘신은 침묵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식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엔도는 후일 《침묵의 소리》라는 책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한 바가 ‘신이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말씀하고 계신다’였음을 밝힌다. 《침묵》을 쓴 엔도의 의도는 ‘순교 신앙’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교자만큼 강하지 못해서 결국 배교와 배신을 반복하지만 신앙의 언저리를 떠도는 약한 신자가 존재하는 현실을 진지하게 돌아보고자 했다.
이처럼 《침묵》은 그가 그리려 했던 ‘비애의 예수’, 순교와 배교를 비롯한 신앙적 선택의 두터운 층위를 강렬하게 드러내며, 그를 세계적 작가로 올려놓기에 이른다. 이 때문인지 엔도 슈사쿠는 주로 《침묵》을 쓴 종교소설가, 지나치게 진중한 고민을 하는 작가로 기억되기에 이른다. 엔도 스스로가 부담스러워했듯이, 이는 그의 모습 중 한 측면을 대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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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의 소설은 음극과 양극을 끌어당기는 이야기다. 엔도는 서구의 이분법과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불교에 만족하지 못했다. 방황하던 그가 마침내 도착한 곳은 어머니 때문에 믿게 된 기독교였다. 몸에 맞지 않는 양복처럼 불편했던 기독교가 어느새 음극과 양극을 모두 끌어당기는 이야기로 그 앞에 나타났다. “인간의 좋은 것은 물론 추잡한 것에도 반응하는 종교가 아니라면 그 종교는 진정한 것이 아니다.” 완벽함과 온전함은 다르다. 온전한 복음에는 밤과 낮이 있다. 순교자와 배교자, 의심과 희망, 실재와 실재 너머 초월, 진지함과 가벼움이 있다. 《침묵》으로 유명해진 엔도는 깜짝 희극배우로 변신한다. 《침묵》을 쓰면서 형성된 진지함을 털어내기 위한 그만의 방법이었다. 엔도는 아무리 좋은 것도 계속 머물러있으면 독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엔도는 모든 고통에는 고독이 따른다고 말한다. 고통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오롯이 홀로 감내하기에 외로움이 엄습한다. 강한 진통제도 소용없는 환자가 고통에 소리 지를 때, 간호사가 다가와 가만히 손을 잡아준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바로 그때 고통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병약했던 엔도가 환자로서 경험했던 이야기다. 엔도의 문학은 혼돈과 모순에 빠진 이들의 절규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손을 잡아주면서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말한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마다 그의 책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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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엔도 슈사쿠 덕후다.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그의 문학관에 두 번이나 찾아갔을 정도니, 덕후라 할 만하지 않을까. 내가 엔도 슈사쿠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대부분 그렇듯 그의 대표작인 《침묵》에 감명받아서는 아니다. 이름이 근사했기 때문이다. 엔.도.슈.사.쿠. 소설가 중 가장 멋진 이름 뽑기 대회를 연다면, 그가 1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름에 꽂혀 덕후가 됐다. 그의 이름이 적힌 책을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지성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엔도 슈사쿠에 대한 나의 환상이 깨진 건 그의 문학관에 처음 방문했을 때다. 문학관 입구에 전신사진이 걸려있는데, 나는 그 사진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 처음 엔도 슈사쿠의 진짜 모습을 본 셈이다. 나는 왜인지, 너무도 당연하게, 비장하면서도 공허한 눈빛을 한 청년 작가의 모습을 상상했다. 실제로 본 그는 코믹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의 말라깽이 아저씨였다. 게다가 “진지함 따위는 내려놓고 들어오게나”라고 말하듯 손가락을 꼰 채 요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코미디언 이주일 씨의 일본판을 만난 것 같았다.
환상은 깨졌지만, 그 후로 엔도 슈사쿠를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다. 신과 종교에 관한 가장 심오한 글을 쓴 작가가 현실에서는 코믹한 중년 아저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누군가 엔도 슈사쿠의 작품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예수의 생애》를 권한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묻는다면 단연코 《인생에 화를 내봤자》이다. 그의 에세이를 모아 엮은 책인데, 진지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장난꾸러기 아저씨의 만담집 같다. 한 대목만 옮겨보면 이런 식이다.
여보 나를 무시하지 마 / 결혼 이후 20년 / 누구 덕분에 먹고 살았나 / 누구 덕분에 자식이 생겼나 / 자꾸 나를 깔보면 / 나는 이 집 나갈 거야 (〈중년 남자를 위한 노래〉 중)
나의 책장에 《침묵》과 《인생에 화를 내봤자》가 나란히 꽂혀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기가 막히다. 《침묵》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데, 골 때리게 웃긴 이 책은 이따금 꺼내 보는 편이다. 그때마다 일본판 이주일 씨와 한바탕 수다 떤 기분이 든다. 실제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장난치는 것을 좋아했고, 유머를 예찬했다고 한다. 책에도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삶은 비극이라네, 웃을 때 빼고.”
그렇지, 유머 없이 침묵을 견디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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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동물기》는 가볍고 유쾌한 동물 에세이입니다. 엔도 슈사쿠는 이 책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지금까지 키우거나 만나왔던 여러 동물이라 말하면서 그들과의 이런저런 인연과 에피소드를 담담한 목소리로 들려줍니다. 지금껏 만나왔던 모든 ‘있는 그대로’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슈사쿠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엔도는 주인이 자살한 숲을 바라보던 개의 눈과 병에 걸려 손안에서 죽어가던 십자매의 눈에서 인간을 보는 예수의 눈과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의 눈을 떠올립니다. 그들의 눈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배후에서 슬픈 눈초리로 우리를 쳐다보고, 멀리서 우리를 지켜주는 어떤 존재의 투영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저는 일생을 통해 사랑하고 교감했던 여러 동물의 눈에서 예수님의 눈,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고, 그 애정 어린 시선을 다시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던지는 엔도의 모습이야말로 “일상이야말로 영원으로 향하는 도약판”이라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어떤 종교적 색채나 경건함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유쾌함과 애정으로 가득한 동물기야말로 참된 ‘영성 일기’로 불려야 마땅하다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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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질문했다. “만물과 나를 비춰줄 궁극적 진리는?” “내 출생의 기원과 삶의 목적은?” 누가 창조주 하나님을 말했다. 그 하나님은 나한테 맞지 않았다. 그래도 하나님이 필요했다. 내가 하나님을 만들었다. 전지한 분! 감출 수 없으니 감출 게 없었고 두렵지 않았다. 뭐든 물었다. 내 안에 계신 듯 답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3년 후 교회에 갔다. 많이 배웠으나 하나님이 작아졌다. 단순하고 투명하게 정리된 신, 배타적으로 타 종교를 혹은 비주류의 사람을 혐오하는 신. 내가 만들어낸 신과 교회의 신이 달랐다. 묻고 답하는 대화 아닌, 도깨비방망이 같은 기도가 나를 배신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읽고, 고통을 없애달라는 기도에 도리어 함께 고통받는 신을 만났다. 다른 작품들도, 《깊은 강》도 읽었다. 그 안에서 마침내 내가 그리는 신을 만났다. 《깊은 강》의 오쓰가 만난 신. 그 이름을 뭐라 해도 좋을 양파. 사랑의 손길. 어쩔 수 없는 인간(유다)의 업을 수용하고 사랑하는 예수를. 누구나 무엇이나 받아주는 갠지스강은, 오쓰가 그 사랑을 흉내 내는 예수를 얼마나 닮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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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박명준(바람이불어오는곳) 대표님을 만났습니다. <서사의 서사>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요청에 흔쾌히 수락해 주셨어요. 매력적인 포인트가 무엇일지, 필진과 카피, 디자인, 주제 등을 고민하며 여러 시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서사의 서사>와 함께할 필자분들이 누구일지 기대 많이 해주세요! (한 분씩 차근차근 공개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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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찾아서》를 읽고 쓴 《교회를 찾아서》와 거의 상관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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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문고 이정화 대표님께서 엔도 슈사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정은문고) 20권을 찬조해 주셨습니다. 구독하고 뉴스레터에 피드백을 남겨주신 스무 분에게 《엔도 슈사쿠의 동물기》(정은문고)를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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