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 '삶과 봉사' (Life and Work) 100주년 기념협의회 기조강연
WCC '삶과 봉사' (Life and Work) 100주년 기념협의회 기조강연
올해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삶과 봉사’(Life and Work) 운동이 태동한 지 100년을 맞는 해입니다. 1925년 8월,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삶과 봉사협의회’는 세계교회의 ‘정의와 평화운동’의 좌표를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스톡홀름협의회를 교회의 사회적 윤리에 관한 니케아 공의회라고 부릅니다. WCC-CCIA(국제위원회)가 지난 5월 19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주관한 ‘삶과 봉사 100주년 기념협의회’의 기조강연 전문을 번역 게재합니다.  

‘삶과 봉사’ 스톡홀름협의회: 배경, 결과 및 의미 


요나 존슨 감독(스웨덴 교회)

 2025년 5월 19일 / 아테네

 

  1. 1925년 8월 19일, 스톡홀름 구시가지의 왕궁 옆에 위치한 중세 대성당으로 영국 성공회, 루터교, 정교회 주교들, 교단 총회장들, 신부들, 그리고 정교회 총대주교가 포함된 화려한 행렬이 입장했다. 37개국에서 온 600여명의 대표단이 교회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중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325년 니케아 제1차 공의회로부터 이어지는 연속성을 상징하는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정교회 총대주교 포토스였다. 가장 젊은 대표는 후에 세계교회협의회(WCC) 첫 총무가 된 빌렘 비서트 후프트였다. 왕실 가족, 외교관 복장의 대사들, 정부 장관들, 일반 신자들이 자리를 잡는 동안 수천명의 관중이 이 역사적인 사건을 보기 위해 거리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대표적인 교회 지도자 모임이 유럽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약 80명의 기자와 사진기자들이 협의회의 전 과정을 취재했다. 오늘, 우리는 이 협의회가 왜 중요했는지 묻는다. 100년 전 스톡홀름에서 일어난 일이 왜 여전히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일까?

 

  1. 1914년 8월에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수백만의 생명을 앗아가며 유럽의 사회적, 도덕적 기반을 산산조각냈다. 영원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40년만에 종식된 평화, 그리고 기술, 통신, 산업화, 서구우월성이 더 번영된 세계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은 무너졌다.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산산이 조각났다. 유럽은 제국이 붕괴하고 혁명이 사회구조를 파괴하며 전체 인구가 소멸하거나 추방되는 모습을 목격했다. 루마니아, 핀란드, 헝가리 등 여러 국가가 재출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지리적, 사회적, 정신적인 측면에서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거대한 재난이었다. 기독교 국가 간의 잔혹한 전쟁은 인류역사를 영원히 바꿔버렸다.

 

  1. 전쟁과 베르사유 평화조약의 부당함이 스톡홀름에서의 논의를 결정하였다. 수세기 동안 유럽의 교회들은 기독교 가치를 사회에 확산하고 도덕을 형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들은 국가정체성 형성 및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 세계는 사회적 질서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신앙과 공공신학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미국의 교회들은 개인주의적이고 행동주의적인 사회복음 접근법을 통해 사회발전에 지속적으로 집중했지만, 전통적인 유럽교회 지도자들(정교회, 영국 교회, 루터교 등)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 기독교 가치가 다시 한번 정치, 문화, 심지어 국제연맹과 같은 기관에 관철되도록 보장하는 사역에 몰두했다. 많은 대표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품고 전전(戰前)의 비전에 집착했다. 그들의 관심은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는 것보다 기관, 공동체, 국가의 영적, 도덕적 핵심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1. 과거의 기독교 회의 참가자들과 달리, 스톡홀름협의회 참가자 대부분은 공식적으로 선출된 교회 대표들이었다. 그들은 교회 대표로서 발언할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이를 통해 교회들을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정교회 주교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특히 중요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이 협의회는 또 다른 개혁교회 행사에 불과했을 것이다. 정교회의 존재는 스톡홀름을 진정한 에큐메니칼 포럼으로 만들었다. 개혁교회와 정교회가 처음으로 협의회에서 만났다. 예상대로 스톡홀름은 사회적 윤리에 관한 니케아 공의회로 언급되었다.

 

  1. 스톡홀름협의회는 한 사람의 비전과 끈기의 결실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기독교 국제회의와 구분된다. 우프사라 대주교 나단 죄더블롬의 비전과 숙련된 외교가 없었다면 이 협의회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었던 적절한 인물이었다. 죄더블롬은 스톡홀름협의회 자체였고, 그의 인격의 표현이자 연장선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기독교적 양심, 의무감, 그리고 국제사회의 필요는 교회들이 함께 행동하도록 촉구했다. 그의 목표는 교회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초점은 교리나 교회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이 세상에서 실현하는 것이었다. 교회들은 모두 달랐지만, 이러한 생각은 실용적 협력의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미 성령 안에서 하나였다. 일치는 창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인식되어야 할 것이었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긴급성은 비교신학에 빠져들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이는 1927년 로잔에서 열릴 예정인 첫 번째 신앙과 직제협의회가 다뤄야 할 사안이었다.

 

  1. 우리가 알다시피 스톡홀름은 기독교인들을 공동행동으로 초청하는 첫 번째 시도는 아니었다. 교단과 국경을 초월한 복음주의 부흥의 물결은 기독교를 초국가적 공동체로 이해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협의회는 조정, 교류 및 관계망을 촉진하는 수단이었다. 1900년경부터 중첩된 관계망을 지칭할 때 "에큐메니칼"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에큐메니즘은 국제주의와 결합하였고, 기독교인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민족주의, 그리고 유럽의 열렬한 민족주의와 실용주의적 국제주의를 조율해야 했다.

 

  1. 스톡홀름협의회의 배경은 해외선교나 학생선교가 아니라, 1890년대부터 서구교회 지도자, 신학자, 의원, 평화주의자들 사이에서 생겨난 사회적 정의와 세계평화에 대한 우려였다. 노동 계급의 경제적 불평등, 아동노동, 빈곤과 고통은 심각한 문제로 주목받았다. 자선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문제'로 요약되었다. 많은 기독교인은 불의와 빈곤의 뿌리를 연구했으며, 노동자들과 연대감을 표하고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을 지지했다.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영국에서는 ‘사회기독교연합’, 독일에서는 ‘National-Sozialer Verein’, 프랑스에서는 ‘Le Christianisme Social’ 등이 조직되었다.

 

  1. 스톡홀름으로 이어진 또 다른 문제는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악화, 특히 독일과 영국 사이에서 급속히 악화하는 군비경쟁이었다. 평화유지의 일환으로, 다양한 국가의 기독교인들은 서로의 우호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 상호방문 프로그램을 조직했다. 여기에 국회의원, 주교, 학자 등 수백 명이 참여했다.

 

  1.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모든 국가는 분쟁 시 강제중재에 응해야 하고 무기경쟁을 중단할 것을 제안했을 때,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인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1898년과 1907년 헤이그회의에서 그들은 구속력 있는 국제법규 제정을 위해 로비활동을 벌였다. 미국 철강 재벌이자 자선가인 앤드루 카네기는 중재를 통한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 시간과 재산을 투여했다. 그는 헤이그에 평화궁전을 건설한 것 외에도 기독교 평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교회평화연합’(Church Peace Union)이라는 기금설립을 주도했다. 이 기금의 관리는 ‘미연방 교회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 in the US) 국제정의와 평화위원회를 이끌던 프레드릭 린치에게 맡겨졌다.

 

  1. 카네기의 제안으로 1914년 린치는 국제주의, 사회정의, 평화구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150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독일 콘스탄츠로 초청해 그들의 노력을 조정하기 위한 회의를 주선했다. 이 회의는 전쟁의 갑작스러운 발발과 우연히 겹쳤다. 참석할 수 있었던 80명의 참가자는 독일에서 마지막 열차를 타고 즉시 떠나야 했다. 그들은 불안과 급박함 속에서 어깨를 맞대고 함께 기도했다. 밖에서는 젊은 병사들이 전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 세계 정치 지도자들에게 전면 전쟁을 막아달라고 전보로 호소했으며, 교회를 통해 국제연대를 증진하기 위한 세계교회연합(World Alliance for Promoting International Friendship through the Churches)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이 임시 연합은 스톡홀름협의회에 필요한 국제적 기반이 되었다. 당시 다른 적합한 에큐메니칼 조직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1. 비록 콘스탄츠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1914년 11월 우프사라 대주교로 서품된 죄더블롬은 유럽과 미국의 교회 및 주요 정치인들에게 평화호소문을 보냈다. 이 호소문은 돌을 굴리는 계기가 되었다. 죄더블롬과 다른 북유럽 주교들은 전쟁이 계속되는 중에도 교회 지도자들의 대규모 회의를 소집하는 등 다양한 평화중재 노력을 시도했다. 죄더블롬은 평화의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교회들을 단결시키고 지속가능한 에큐메니칼 협의회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사회적, 지적, 외교적 자원을 모두 투입했다.

 

  1. 네 가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강한 의지를 지녔던 죄더블롬은 하나님이 평화의 사명을 위해 그를 부르셨다고 확신하였고, 그는 이 임무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파리에서 보낸 7년은 그를 진정한 '유럽인'으로 만들었으며, 사실 프랑스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언어였다. 그는 스웨덴 교회와 영국교회 간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협의회에 앞서 그는 에큐메니칼 총대주교와 가까운 신부들을 만나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전쟁 전 그가 살며 가르쳤던 라이프치히에서 독일 루터교회 내부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교회생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전쟁 내내 중립을 유지했으며, 그의 의견에 의하면, 웁살라 대교구는 콘스탄티노플, 로마, 캔터베리 다음으로 높은 명성을 지닌 곳이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할 때 그는 교회의 국제회의를 조직하는 데 있어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1. 1919년 가을, 스웨덴 지부 의장으로 활동하던 죄더블롬은 세계교회연합의 첫 전후 회의에 초청되었다. 이 회의는 헤이그 근교의 오드 바사너에서 열렸다. 참석자 대부분은 죄더블롬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사회적 윤리를 주제로 한 에큐메니칼 회의의 비전과, 혼란스러운 전후 세계에서 교회의 공동의 목소리를 대표할 세계교회 국제협의회 설립계획을 제시했다. 그의 계획은 세계교회연합에 의해 승인되었지만, 이 단체는 그러한 조직을 건설할 권한이나 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죄더블롬은 미연방 교회협의회 총무 찰스 맥파랜드와 스위스교회 회장 오토 헤롤드와 함께 협력하도록 요청받았다. 세 사람은 즉시 일을 시작했다. 한달 후 파리에서 소규모 그룹이 모여 '삶과 봉사'(Life and Work)라는 이름으로 운동방향을 설정했다. 린치는 이 과정을 시작하도록 지시받았다. 교회평화연합의 보조금, 미연방 교회협의회의 행정지원, 세계교회연합의 후원을 바탕으로 죄더블롬의 계획은 실현되었다.

 

  1. 첫 단계로 린치는 1920년 여름 80명의 교회 대표들을 제네바로 초청해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미국 측에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죄더블롬은 단호한 지도력을 발휘해 참가자들을 이끌고, 제안된 회의의 목적과 내용, 초청 대상, 장소 및 일정 등에 대한 열띤 토론을 일주일 동안 진행했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책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절차를 방해할 뻔했지만, 스톡홀름에서 개최될 ‘삶과 봉사에 관한 협의회’ 계획이 확정되었고 준비위원들이 선출되었다. 예상과 달리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참여를 결정했다. 회의의 진정한 에큐메니칼 성격을 위해 로마 가톨릭교회도 초청하기로 결의하였지만 교황은 초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1. 스톡홀름협의회가 열리기까지 추가로 5년의 계획과 협의, 기금모금, 상호 신뢰구축, 교회들의 참석을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1. 협의회의 주요 주제로 다음 6개 항목이 제시되었다:

- 하나님의 세상구원 계획에 따른 교회의 일반적 의무;

- 교회와 경제 및 산업의 문제;

- 교회와 사회 및 도덕의 문제;

- 교회와 국제관계;

- 교회와 교육;

- 교회 간의 협력을 촉진하고 국가나 정부의 틀 내에서 긴밀한 협력을 위한 방법과 수단.

 

  1. 스톡홀름협의회는 기독교 사회윤리를 다루는 최초의 회의였다. 참가 교회들은 회의 전에 주제를 논의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들의 보고서는 회의 일주일 전 개최된 여러 위원회에서 논의되었다. 1924년 잉글랜드 버밍엄에서 맨체스터 주교 윌리엄 템플의 주도로 열린 ‘기독교 정치, 경제, 시민권 회의’(COPEC) 보고서는 스톡홀름협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러나 준비위원회가 제안한 보고서와 결의안 대부분이 스톡홀름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가능한 갈등을 피하고 참가자들이 통제 불능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회의 일정은 6개 주제에 관련된 100개 이상의 준비된 연설로 가득 차 있었다. 토론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하루 전에 발언권을 요청해야 했다. 따라서 즉흥적인 발언을 위한 공간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신학적 질문도 피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제는 협의회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였다.

 

  1. 윈체스터 주교 테오도어 우즈가 대성당에서 개회예배를 시작하며 강단에 올라섰을 때, 그는 예수의 말씀으로 협의회의 분위기를 설정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마음의 태도를 바꾸라!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여라! 새로운 시각을 얻어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우리는 그 설립을 위한 공모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 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협의회의 의미입니다. 땅이 바다로 덮이듯 주님의 지식이 가득 차게 될 위대한 날을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설교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했다:

 

20세기 복잡한 문명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은 거대한 과제입니다. 사상, 기술, 인내, 지혜가 필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불가능 을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1. 예배가 끝난 후 대표단은 국왕인 구스타프 5세가 공식적으로 개회를 선언할 왕립 홀로 입장했다. 죄더블롬 대주교는 왕을 초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재할 때, 땅과 물로 분리된 인간들의 마음속에 같은 불꽃이 타 오릅니다…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타오른 불꽃을 정화하고 사랑과 정의의 불꽃으로 하 나되게 하시어 영원하고 신성한 진리의 새로운 빛으로 그리스도교 세계를 비추며 그리스 도의 열렬한 자비로 영혼과 교회를 따뜻하게 하실 것입니다.

 

왕은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

 

비록 정치인과 통치자들은 좋은 법을 통과시키고 선한 조치를 취하는 데 성공할 수 있습니 다. 그렇다고 해서 목적이 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우리의 마음속에 공동체와 민족 간의 평화와 상호신뢰의 토대가 세워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1. 개막식은 상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양한 전통의 교회 지도자들을 식별하는 성직자 복장, 전통과 보편성을 상징하는 고대 교회의 언어, 회의의 정치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대사들의 참석, 그리고 국가 원수로서 회의 개막을 선포한 국왕의 존재 등이었다. 이는 총대주교 포토스에게 콘스탄티노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의회 개막을 선포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스톡홀름에 아타나시우스(당시 핵심 인물)로부터 끊임없이 계승된 총대주교가 참석한 것 자체는 세월과 지역을 초월한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영적 일치를 상징했다.

 

  1. 죄더블롬 대주교는 이 협의회를 교회 역사상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해 왔다. 모든 것은 참가자들 사이의 신뢰, 소통, 우정을 촉진하고, 나아가 교회들의 친교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공동기도, 예배, 찬양, 음악은 친교를 구축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죄더블롬은 예배와 매일의 기도시간을 다양한 언어로 계획하는 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모스크바의 티콘 총대주교를 추모하는 기념예배가 열렸으며, 정교회 저녁기도회와 야외 설교예배도 마련했다. 스웨덴의 고전 미사에서는 모든 참석자가 성찬식에 초대되었다. 죄더블롬은 의식과 상징, 공연과 공간이 효과적인 소통 수단임을 깨달았지만, 동시통역이 없었기 때문에 연설의 해석은 큰 문제로 남아 있었다.

 

  1. 협의회 기간 경제 및 산업 구조의 사회적 영향, 기독교적 자선, 재산권, 소명으로서의 노동, 주택, 가족 문제, 범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발표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협의회의 가장 긴급한 사안인 “교회와 국제관계”에는 단 이틀만 할애되었다.

 

  1. 전쟁이 끝난 지 오래되었지만, 프랑스와 독일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긴장된 상태였다. 전쟁은 친구를 적으로 만들고, 교회 강단을 민족주의 선전의 무대로 변모시켰다. 많은 대표의 마음에는 죄의식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개막식에서 공동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은 품위 있고 질서 있는 토론의 기반을 마련했다. 논의의 중심은 세계정의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는 국제연맹에 초점이 맞춰졌다. 독일 대표단은 협의회가 국제연맹을 지지하는 데 강하게 반대했다. 그 주간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프랑스 감리교도인 엘리 구넬이 독일 대표들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열정적으로 호소하는 장면이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외쳤다. 그와 감독관 카를 클링게만 사이의 논쟁이 교회 간의 화해를 촉진하고 1926년 독일의 국제연맹 가입 결정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1. 협의회의 유일한 공식성명은 교회와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로, 논의내용을 요약하고 원칙을 밝히며 이상을 강조했지만, “개인과 공동체가 자비, 지혜, 용기로 이를 실천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로 남겨두었다”라고 명시했다. 전쟁과 평화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발언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삶과 봉사》협의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지나치게 정제되었다:


우리는 세계교회들과 함께 전쟁의 공포를 나누며 국제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전쟁의 무용 성을 깨닫고, 평화의 왕의 지팡이 아래에서…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춤할 것이라는 약속 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할 것을 촉구한다.

 

이 구절 때문에 일부 평화주의자들이 메시지 전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당연했다.

 

  1. 차기 국제 에큐메니칼 협의회의 개최 제안은 계속위원회의 검토사항으로 위임되었다. 1930년 이 협의회는 그 이름을 '삶과 봉사를 위한 세계협의회'로 변경했다. 이는 WCC의 창립을 향한 결정적인 단계였다.

 

  1. 삶과 봉사를 위한 세계협회의는 우프사라 대성당에서 폐회예배를 거행했다. 약 4,000명의 신자가 화려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는 니케아 신경을 원어로 낭송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었다. 초대교회와의 연속성을 확인하고 ‘삶과 봉사’ 및 ‘신앙과 직제’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계기가 되었다. 총대주교는 교회들 사이의 진정한 일치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고 인정했지만, 루터교 대성당에서 니케아 신경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낭송한 후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우리의 일은 축복받았으며 열매를 맺을 것이라 확신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은 그의 마지막 공개 발언이었다. 귀국 길에 그는 취리히에서 사망했다.

 

  1. 스톡홀름협의회는 공동의 합의나 지침 결의안을 거의 채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의는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지속가능한 조직으로의 에큐메니칼 운동을 재건하는 조건을 마련하는 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참가자들은 스톡홀름에서 경험한 친근하고 창의적이며 깊은 영적 분위기, 그리고 회의 내내 지속된 기독교적 동료애를 기억했다. 이 동료애는 쓰디쓴 종교적 및 국가적 대립을 초월했다. 죄더블롬에 따르면, “모든 현명한 사람들은 이 협의회가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톡홀름이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부분 참가자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1. 협의회는 분명히 서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인도, 일본, 중국 출신 대표 6명을 제외하고 모든 참가자는 서구인이었다. 여성은 적었고 노동자와 젊은이는 거의 없었으며 다른 종교의 대표도 참석하지 않았다. 의제는 서구에서 즉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만 포함하였다.

 

  1. 이 협의회는 민족, 인종, 종교, 파워 블럭의 장벽을 허물며 유럽 기독교의 자의식을 재편했다. 동유럽과 중동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정교회는 처음으로 개신교 기독교인과 협력했다.

 

  1. 현대사회의 필요에 신속하게 응답한 이 협의회는 인간과 사회의 전체 삶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확인했다. ‘삶과 봉사’는 기독교 윤리를 개인적 관심사에서 공동체적 책임으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무제한적 자본주의와 개인 권리에 대한 사회주의의 경멸을 모두 비판했다. 주님의 기도 “당신의 나라가 오소서”가 회의의 구호가 되었다.

 

  1. 스톡홀름협의회와 그 맥락을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그 유사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증가하는 사회적 불공평, 기후변화, 이주, 식량, 희귀 자원, 경작지 경쟁, 전쟁, 학살, 극단적 분열, 가짜뉴스, 대중영합주의적 민족주의, 다자간 국제기구에 대한 공격 및 국제법 무시 등 모든 것이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은 현재 전방위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1. 스톡홀름에 참석한 대표들은 당시의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했으며, 그중 일부는 진정으로 예언적인 방식으로 행동했다. 그들은 어떤 허상도 없이 국제사법재판소와 국제연맹과 같은 아직 미성숙한 기관을 지지함으로써 취약한 평화를 보호하려 노력했다. 23년 후인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첫 총회에서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와 삶과 봉사(Life and Work)가 통합되어 WCC가 설립되었다. 현재 WCC의 구조 내에서, 국제위원회(CCIA)는 1925년 스톡홀름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강력하고 구속력 있는 다자간 구조는 필수적이다. CCIA는 여전히 이러한 구조를 강화하고 국제법을 촉진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평화의 때가 바로 지금이다.

 

번역: 신승민 원장

  나단 죄더블롬 감독
1925년 8월 '삶과 봉사' 스톡홀름협의회